[4·3 증언] 이계순 할아버지의 ‘힘겨웠던 삶’
[KBS 제주] [앵커]
4·3의 역사를 기록하는 KBS 연속기획, 일본 오사카에 있는 유족들의 증언을 들어보는 세 번째 순서입니다.
이계순 할아버지는 4·3 당시 다섯 살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훗날 일본으로 건너와 힘겨운 삶을 살아왔습니다.
유용두, 강재윤 기자가 만났습니다.
[리포트]
[이계순/재일본 4·3유족 : "제가 제주에 17살 때까지 있었으니까 어머니 기억은 나죠. 아버지 기억은 거의 없습니다. 제가 5살 되기 전에 돌아가셨으니까. 저희 장인 되시는 분이 여기(일본) 살다가 고향으로 귀국했는데, 4·3 운동을 열심히 했던 모양입니다. 가까운 이웃이었기 때문에 저희 아버지도 아마 거기에 많이 동참해서 같이 운동하는 집회에도 자주 참석을 했던 모양인데, 그게 원인이 돼서 체포됐죠. (어머니가)한두 번 면회를 갔었던 모양인데 (아버지가) 얼마 없으면 나가니까 아무 걱정도 말아라. (대정읍) 상모리 이교동. 1948년도, 동짓달 13일인가 (희생된 것으로) 지금 기억하고 있습니다. 장인 되시는 분하고 저희 아버지하고 같은 장소에서 같은 날 희생당했습니다."]
[이계순/재일본 4·3유족 : "우리들이 4남매가 있었기 때문에 어머니가 고생이 많았죠. 저희 사촌 형이 중학교 때 사고로 돌아가시고 말았어요. 제가 큰아버지 밑으로 양자를 가게 된 것이죠. 그런 것도 있고 해서 우리 어머니께서는 (큰어머니를) 일본으로 밀항을 보내서 잘 되면 조카들 밀항으로 불러주도록. 우리 처가 4월에 밀항했고 제가 5월에 밀항했어요. 일본 말을 몰랐던 것보다 불법체류니까, 그런 면에서 정신적으로 고통이 많았죠. 항상 피해 다녀야 했으니까. 선반이라는 기계가 있죠. 공작 기계, 그 기술을 배워서 10년이면 귀국할 예정이었어요. 제 생각으로는. 그게 그렇게 안 돼서 지금까지 여기 있는 거죠."]
[이계순/재일본 4·3유족 : "저한테 영향이 컸던 것은 아버지가 안 계시다는 것이지요. 그게 어렸을 때 가장 서러웠던 것이지요. (제 장인도)혼인신고를 안 해서 그대로 뒀었기 때문에 큰아버지가 (제 처를) 국민학교 입학시키기 위해 큰아버지 호적에 올려버렸어요. 저희 처가 사촌 두 명하고 오촌 고모하고 보증인을 해서 진술서까지 제출했는데 (4·3 유족 신청) 반려를 했어요. (제 처가 재작년에 별세했는데) 당신이 돌아가면 고향에 가서 거기 같이 묘를 만들어 달라는 그런 유언이 있었어요. 여기 생활이 아주 오래됐었는데요."]
[이계순/재일본 4·3유족 : "이쪽(일본)에서 유족회를 만들기 시작해서 그때부터 좀 (4·3 논의가) 활발해진 것 같습니다. 저희 숙부께서 그것에 대해 시간이 걸리긴 걸리더라도 언젠가는 (4·3) 명예회복이 될 것이라는 내용의 편지를 자주 받았어요. (2001년 유족 신고는) 4·3에 대한 것은 되도록 희생자만큼이라도 얼마나 있었는지 정확히 해주셨으면 그런 마음으로 신고를 했습니다. 저는 (4·3)을 의거 사건이라고 하고 싶어요. 그 당시에 단독선거를 한다는 것은 남북이 분단되는, 직결되는 문제였기 때문에."
유용두 기자 (yyd9212@kbs.co.kr)
강재윤 기자 (jaeyun@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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