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익 칼럼] 늙은 어린이가 될 수 있다면
김병익 | 문학평론가
점심 후 별일 없으면 으레 동네 카페에서 혼자 커피를 마시며 너른 창문 밖 세상을 내다본다. 멀리 낮은 산이 푸르게 서 있고 그 앞으로 규모가 작지 않지만 높지는 않은 건물이 가로로 펼쳐져 있다. 그 앞으로 꽤 넓은 광장이 펼쳐져 있고 바로 창 앞의 길에는 자동차와 사람들이 바쁘지 않은 걸음으로 오간다. 그 교외 도심 속의 여유 있는 풍경을 바라보며 한동안의 한가를 즐길 수 있는 게 내 노후의 조용한 사치이리라. 이 아늑한 여유 속에 시간 맞춰 노란 어린이버스가 서고 대여섯살 아직 젖내 물씬한 아이들 너댓이 버스에서 내려 제 엄마일 듯싶은 젊은 여자분 손을 잡고 내게는 들리지 않게 재잘거리며 가는 모습을 보면 세상은 참 평온하고 다행스럽다는 안도감에 젖게 된다.
그 게으른 회상 속의 어느 날 문득 떠오른 것이 ‘만년샤쓰’였다. 어렸을 때 읽은 아동소설의 한 대목에 그 뜻과 소리가 다정하게 남은 말이었다. 소년 시절 어린이잡지도 많이 보고 동화책도 자주 보았기에 나름 아동문학을 제법 즐긴 편이었다. 그런데도 세월은 이길 수 없어 6·25 이전의 70여년 전에 본 이야기들을 제대로 가다듬을 수는 없었다. 그런데 제목도 아리송한 이 이야기에서 체육 시간 러닝샤쓰를 입지 않은 맨몸의 소년이 선생님께 대답한 이 재미있는 말만은 잊히지 않는데도, 그 유다른 말의 앞뒤 이야기가 어떤지, 줄거리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누구의 작품인지 기억해낼 수 없었다.
그래서 구한 것이 창비의 <정본 방정환 전집> 5권과 문학과지성사의 <마해송 전집> 10권이었다. 짧은 동화 한편을 위해서는 너무 큰 투자였지만 친절한 두 출판사는 옛 우정을 담아 내게 공짜로 선물해주었다. 참 좋은 인연을 고마워하며 나는 각각의 첫 권에 수록된 방정환의 ‘사랑의 선물’과 마해송의 ‘바위나리와 아기별’을 읽었다(아니, 즐겁게 누렸다). 창비판은 작은 글씨로 꽉 채운, 그래서 성인들의 문학전집처럼 조판되어 있어 어린이 책 같아 보이지 않지만 한세기 전의 말에 그동안 바뀐 오늘의 아이들 말을 부지런히 각주로 붙여 그 뜻을 밝혔고, 경장본의 문지사 전집은 저자의 10대 작품부터 60대에 작고하기까지의 아동문학, 수필, 회고록을 모두 실어 반세기의 우리 역사를 안은 문필가의 개인적·공적 삶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었다. 이렇게, 마침 다가온 어린이날을 맞으며 아동문학 두 대가의 대표작들 속에서 나는 한봄을 지냈다.
내가 찾던 ‘만년샤쓰’는 방정환 전집 제2권의 ‘아동소설’편에 들어 있었다. 체조 선생이 윗도리를 벗으라고 했는데도 한 학생만은 말을 듣지 않았다. 선생님이 다시 지시하자 소년이 양복저고리를 벗었다. 그는 샤쓰도 적삼도 아무것도 안 입은 벌거숭이 맨몸이었다. 선생은 깜짝 놀라고 학생들은 깔깔 웃었다. ‘한창남! 왜 샤쓰를 안 입었니?’ ‘없어서 못 입었습니다.’ 그때 선생의 무섭던 눈에 눈물이 돌았다. 그리고 학생들의 웃음은 갑자기 없어졌다. 가난! 고생! 아아, 창남이 집은 그렇게 몹시 구차하였던가…. “오늘하고 내일만 없습니다. 모레는 인천서 형님이 올라와서 사 줍니다.” “오늘같이 제일 추운 날 한창남군은 샤쓰 없이 맨몸, 으응, 즉 그 만년샤쓰로 학교에 왔단 말이다.” 작품 속의 이 에피소드가 한세기 넘도록 그의 번안동화집 <사랑의 선물> 속 많은 옛이야기와 함께 내 아련한 기억 속 한 조각으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마해송의 글은 대학 시절 이후 에세이와 회상기로 많이 읽었다. <떡배단배>, <편편상>과 <아름다운 새벽>을 이은 그 단아한 문체 속에서 한 작가의 청년기와 교우기를 보았었다. 뒤늦게 그분의 동화가 생각나면서 ‘바위나리와 아기별’을 다시 읽었다. ‘1923년에 발표된 우리나라 최초의 창작동화’로 알려진 이 작품의 편자 주석에 의하면 “1923년 5월1일 제2회 어린이날 처음 행사에서 구연되고 1926년에 <어린이> 1월호에 발표되었다.” 그러니까 이 동화는 정확히 100년 전에 발표되었고 3년 후 활자화되어 우리 문학 최초의 아동문학 작품으로 편입된 것이다. ‘어린이’란 새말을 만든 방정환은 서양 동화를 번안한 <사랑의 선물>(그 이야기들이 참 슬프고 아름답다)을 발표했고 1923년 개벽사를 통해 잡지 <어린이>를 발행했다.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가 첫 근대 잡지 <소년>에 발표된 지 15년, 김동인의 첫 현대소설 ‘약한 자의 슬픔’이 첫 문학동인지 <창조>에 게재된 지 4년 후에, 방정환의 어린이 잡지가 창간되고 세해 후 마해송의 작품이 우리 아동문학사의 첫 창작동화로 발표된 것이다. 우리 아동문학은 짐작보다 이르게 열렸다.
그로부터 정확히 한세기가 된 이제, 그 작품들은 그걸 읽는 내 감상을 기묘하게 이끌었다. 나의 소년기는 해방에서 1950년 한국전쟁을 거쳐 지나왔기에 방정환과 마해송이 살던 세상과 그때 쓰던 말들이 내 어린 시절의 눈과 귀에 익어 있었고 주석 없이도 이해되는 글발들이었다. 편집자가 각주로 ‘듬직하다’로 설명한 ‘끌끌하다’나 ‘부대’(부디) 같은 말은 어릴 적의 익숙한 말로 들려왔고 소년 시절 신문에서 본 마해송의 ‘사사오입’ 정치비판 발언도 바로 기억되었다. 1930년대 초 조선어학회가 표준어를 사정했지만 나는 그보다 10년 전의 방정환·마해송 작품들을 오히려 다정한 소년기에 익은 말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내가 처음 써본 글자는 입학 직전 익힌, 한자의 내 일본어 이름이었지만 한학기 후 해방을 맞으며 새로 만든 한글 교과서로 학교 공부를 새로 해야 했다. 참 혼란스러운 문자 교육 과정이었다.
어린 나이에 읽은 동화들이기에 옛이야기 조각들이 이젠 묵은 정서로 불려 나온다. 추위에 한없이 떨던 한네레, 하늘의 외로운 별과 바다의 작은 풀 한잎이 나누던 그리움, 만년샤쓰의 가난에도 더욱 씩씩한 소년, 그것들은 외려 깊고 오랜 아픔의 추억으로 흰 머리칼의 내 속을 담담하게 적셔온다. 정말 문자보다 말이 오래고 말보다 심정이 더 깊다는 것을 깨닫는다. 한 원시 부족은 해가 바뀌면 나이를 먹어 그 숫자를 줄여가는 문화가 있었다 한다. 태어나면서의 백살 나이가 한살씩 먹혀들어 아흔아홉, 아흔여덟으로 줄어들고 결국 그 나이가 다 없어지고도 혹 살아 있으면 그 삶은 덤이 된다. 지금의 내 나이는 그 재미있고 의미 있는 셈법으로는 ‘만년샤쓰’의 소년에서 ‘아기별’ 사이가 될 것이다. 이렇게 늙은 어린이가 될 수 있다면 어떨까. 남은 몇해 헤아리며 비로소 어린 정서로 적셔들 수 있을까. 여든 넘은 여덟살 애가 될 수 있을지, 참 엉뚱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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