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허한 히로시마의 평화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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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발의 폭탄이 모든 것을 빼앗아갔다."
지난달 26일 일본 히로시마에서 만난 원폭 피해자 2세인 권준오(73) 재일본대한민국민단 히로시마본부 원폭피해자대책특별위원회 부위원장이 건넨 자료집에 적힌 글귀다.
세계에서 일본 다음으로 원폭 피해자가 많은 곳이 한반도다.
원폭 피해자들은 '일본의 식민지배만 아니었어도 이런 무고한 죽음은 없었을 것'이라고 분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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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칼럼] 김소연 | 도쿄 특파원
“단 한발의 폭탄이 모든 것을 빼앗아갔다.”
지난달 26일 일본 히로시마에서 만난 원폭 피해자 2세인 권준오(73) 재일본대한민국민단 히로시마본부 원폭피해자대책특별위원회 부위원장이 건넨 자료집에 적힌 글귀다. 78년 전인 1945년 8월6일 월요일 오전 8시15분, 히로시마에 미국이 인류 역사상 최초로 사용한 원자폭탄 ‘리틀보이’가 투하됐다. 아비규환으로 변한 히로시마에선 당시 주민 약 35만명 중 14만여명이 희생됐다.
원폭의 참상을 담은 사진과 유품 등이 전시된 히로시마 평화기념자료관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는 일은 쉽지 않았다. 단 한발의 폭탄이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한순간에 파괴한 모습은 자료관을 나온 뒤에도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자료관 뒷길로 약 30분 정도 걸어가면 왼쪽으로 오타강이 흐르는 초록 잔디밭이 펼쳐진다. 히로시마 주민들의 쉼터 같은 모토마치 부근은 예전에 ‘원폭 슬럼’으로 불렸던 곳이다. 원폭 피해로 모든 것을 잃은 히로시마 사람들은 살기 위해 이곳에 집을 짓고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오갈 곳 없는 조선인도 몰려들었고, 무허가 판잣집은 강을 따라 빽빽하게 들어섰다.
원폭 피해자 1세인 이헌백(89) 할아버지는 “가난하고 더럽고 위험한 곳으로 인식된 ‘원폭 슬럼’은 시대가 낳은 가슴 아픈 이름”이라고 말했다. “동포들이 이곳에 많이 살았습니다. 당시 조선인 원폭 피해자는 차별과 낙인으로 살 수 있는 곳이 별로 없었어요.” 1960년대 중후반 히로시마에 사는 조선인 6분의 1 정도가 이곳에 살았다는 통계도 있다. 여름엔 수해, 겨울엔 화재로 피해가 반복됐지만 이곳을 벗어나기는 힘들었다.
고국으로 돌아간 피폭자들도 삶이 고달팠다. 원폭 피해자 1세인 손진두(1927~2014)씨는 피폭 후유증 치료를 받기 위해 1970년 12월 일본으로 밀항하다가 체포됐다. 한국에서 제대로 치료를 받을 수 없었던 손씨는 일본에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다. 일본 정부는 1957년 ‘원폭 피해자의 의료 등에 관한 법률’을 제정했지만, 치료 대상을 일본에 사는 사람들로 한정해 손씨는 혜택을 받을 수 없었다. 일본 시민사회의 지원 속에서 손씨는 긴 법정투쟁 끝에 1978년 일본 최고재판소에서 승소했다. 한반도 출신 피해자들은 치열하게 싸우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어낼 수 없었다.
세계에서 일본 다음으로 원폭 피해자가 많은 곳이 한반도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조선인 피폭자는 약 7만명, 이 중 4만명가량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왜 이렇게 많았을까. 두 도시엔 군수공장이 몰려 있었고, 조선인 강제동원 노동자들이 많았다. 원폭 피해자들은 ‘일본의 식민지배만 아니었어도 이런 무고한 죽음은 없었을 것’이라고 분노한다.
뼈대만 앙상하게 남은 ‘원폭 돔’, 평화기념자료관, 평화기념공원 등을 둘러보면, 히로시마가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과거를 잊지 말자’는 것이다. 일본 정부는 이달 19~21일 히로시마에서 열리는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서도 원폭의 참상을 알리며 다시는 반복하지 말자고 호소할 예정이다. 다만 일본의 과거는 너무나 선별적이다. 세계 유일의 피폭 피해국 일본만 강조될 뿐, 식민지배나 아시아 침략 등에 대한 반성과 성찰은 찾기 힘들다. 일본이 외치는 ‘평화’가 공허하게 들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dand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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