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고는 불타지 않는 법
[크리틱]
[크리틱] 김영준 | 전 열린책들 편집이사
1933년, 독일에서 나치가 집권한 지 한달 만에, 여행 중이던 토마스 만은 그대로 망명길에 올랐다. 문제는 그가 써온 일기가 고스란히 집에 있다는 점이었다. 여기에는 그가 평생 세상 사람들에게 감추려 애써 온 자신의 비밀이 적혀 있었다. 집에서 일기를 넣어 부쳤다고 한 40㎏ 무게의 트렁크는 아무리 기다려도 도착하지 않았고, 작가는 압수됐을 가능성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무서운, 아니 끔찍한 일이 기다리고 있는지 모른다.” 다행히 트렁크는 몇주 뒤 국경을 통과했다. 토마스 만은 일기의 대부분을 태워 버렸으나 일부는 후세를 위해 남겨 뒀다.
작가 사후 1970년대에 공개된 이 일기는 그가 동성애적 정체성을 지닌 작가라는 데 어떤 의심도 없게 만들었고, 그의 작품 세계를 새롭게 바라보게 했다. 역설적으로 사람들은 그가 소설에서 그 비밀을 별로 감추지 않았다는 사실도 비로소 알게 됐다. 토니오 크뢰거가 친구 한스에게, 아셴바흐가 미소년 타지우에게 빠져드는 감정을 이제는 상징으로 해석하기 전에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게 됐다.
자신이 세상에 남길 것을 선별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토마스 만은 운이 좋은 편이었다. 이런 일은 유언으로 부탁하면 뜻대로 안 될 확률이 높은 것 같다. 카프카의 경우가 가장 유명할 텐데, 원고를 불태우라고 유언했지만 친구 브로트는 이를 출판하고 말았다. 이 유언에 대해 여러 해석을 할 수도 있겠으나, 불태우라는 것이 빈말은 아니었을 듯하다. 극도로 자기비판적이었던 카프카는 써온 글들 대부분을 기회 있을 때마다 불태워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는 동안 태우고 싶지 않은 원고까지 태운 적은 없었을 테니 카프카도 운이 아주 나쁜 편은 아니었다.
러시아 작가 미하일 불가코프의 환상 소설 <거장과 마르가리타>(1940)에서 주인공은 복잡한 이유로 원고를 벽난로에 태운다. 그러나 악마는 그게 아무 문제가 안 된다는 듯이 원고를 꺼내와 읽으면서 이렇게 말한다. “원고는 불타지 않는 법입니다.” 나중에 불가코프의 전기 제목으로도 사용된 이 인상적인 어구는 소설보다도 유명해져서 맥락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석되고는 한다. 인간의 정신적 창조는 어떤 수단으로도 억압될 수 없다는 식으로. 그런 취지에 반대할 수야 없지만 이 어구는 좀 더 개인적인 뜻으로 봐도 좋을 것 같다. 원고를 태웠지만 머릿속에 있는 것까지 지워버릴 수는 없었다는 고백으로 말이다. 불가코프는 이미 이 소설의 초고를 한번 불태운 적이 있다. 당국의 거듭되는 출판금지 조치로 발표 가능성에 회의가 들었기 때문이다. 그가 소설을 다시 쓰면서 이 구절을 넣은 것은 이런 깨달음에 도달했다는 것 아닐까. 결국 자신은 불태운 것과 똑같은 소설을 쓸 수밖에 없다는 것. 불에 탄 원고는 그런 식으로 멀쩡히 다시 돌아온다는 것. 그렇게 보면 “원고는 불타지 않는 법”이라는 말은 과거는, 또는 인생은 취소할 수 없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1920년대 말, 모든 작품이 출판 및 공연금지 상태가 된 불가코프는 체포될 가능성까지 고려하게 됐다. 그는 이번에는 일기를 불태웠다. 이 일기의 운명은 너무나 기이하기 때문에 무슨 말을 덧붙이는 게 좋을지 알 수 없다. 그가 불태운 일기는 60년 뒤인 1989년 소련 국가보안위원회(KGB) 문서창고에서 발견됐다. 불에 그을린 상태는 아니었다. 그의 집필 활동을 늘 주시하고 있던 비밀경찰이 작가가 불태우기 훨씬 전에 타이프라이터로 깔끔한 사본을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독자들은 소설에서 “원고는 불타지 않는 법”이라는 악마의 말이 약간 조롱조였음을 기억할 수도 있을 것이다. 수수께끼 같던 말은 정확한 예언이 되고 원고는 실로 멀쩡히 돌아왔다. 일기는 1990년에 출판됐다. 작가가 사망하고 50년 뒤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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