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서랍 속 드라마] 지금의 봄날은 한번뿐…망설이는 청춘아, 후회 없이 연애하라
처녀 귀신 빙의된 소심한 여주인공
남성과 하룻밤 보내야 승천한다는
발칙한 상상을 귀엽게 그린 로맨스
봄이다. 또 봄이다. 겨울이 지나고 새 봄이 올 때마다 기분이 묘하다. 매년 같은 듯 다른 봄이 오고 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으면 봄의 화사함보다는 계절의 순환에 더 눈길이 간다. 봄과 여름, 가을과 겨울이 차례대로 왔다가 차례대로 가는 자연의 풍경 앞에서 숙연해진다고 할까. 비 오는 날, 벚나무에서 내리는 꽃비를 이토록 경외하는 마음으로 바라보게 될 줄이야.
아, 카톡 프로필사진에 꽃이 등장하는 순간 청춘은 끝난 거라고 했는데…. 한 송이 꽃이 아니라 한 다발의 자연이 코앞까지 성큼 다가온 느낌이다. 어쩔 도리가 없다.
세월의 거친 파도를 우아하게 서핑하는 힙한 어른이 되는 수밖에. 음, 오늘 내가 마음 깊은 곳에 자리한 서랍에서 고이 꺼내온 드라마는 ‘오 나의 귀신님’(2015년, 대본 양희승, 연출 유제원)이다.
코로나19가 멀찌감치 물러앉은 요즘, 대학가는 청춘의 속삭임으로 분주하다. 비대면 수업이 모두 끝나고 학교로 돌아온 학생들은 그동안 참아왔던 인생의 봄날을 만끽하고 있다. 물론 봄의 한가운데를 차지한 건 캠퍼스 연인이다. 한껏 들뜬 표정으로 강의실에 들어오는 그들의 존재감은 유독 도드라진다. 봄을 닮은 그들의 연애는 추운 겨울을 견디고 새싹이 움트는 이른 봄의 굶주린 식물처럼 그 안에 품고 있는 에너지가 가히 핵폭발급이다. 주변에 남아나는 게 없다. 두 사람만 남기고 우주의 모든 생명체를 다 소멸시켜버릴 것처럼 서로에게 집중한다.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한 그루 나무를 ‘사랑’하겠노라는 굳은 신념으로 학점도 교우관계도 그렇게 공멸의 길을 걷는다. 미안한데 얘들아, 내년에 봄이 또… 식목일이 또… 나무가 또….
자, 이제 슬금슬금 준비한 드라마를 내놓을 시간이다. ‘오 나의 귀신님’은 소심한 주방 보조 나봉선의 몸에 음탕한 처녀 귀신이 빙의되면서 벌어지는 로맨스물이다.
평소 나봉선은 우울하고 의기소침하고 그래서 늘 어깨를 움츠리고 다닌다. 하지만 처녀 귀신 심순애가 빙의되면 정반대 성격으로 돌변한다. 가장 극적인 변화를 보여줄 때가 흠모하는 강선우 셰프와 단둘이 있을 때다. 한 번만 같이 자자고 졸라대며 강선우에게 달려드는 저 능글맞은 ‘음란 마귀’ 보소. 나봉선 역을 맡은 배우가 ‘국민 여동생’ 박보영만 아니었으면 드라마 장르가 19금 성인물로 바뀌었을 뻔했다. 극 중 처녀 귀신 심순애는 양기남과 하룻밤을 보내면 이승을 떠돌지 않고 승천할 수 있다는 말에 남자들에게 저돌적으로 달려들기를 반복한다. 무수한 시행착오 끝에 힘겹게 만난 ‘나만의 양기남’를 놓칠 수 없어 애간장이 타는 처녀 귀신 심순애와 남몰래 오너 셰프를 짝사랑하는 주방 보조 나봉선의 의기투합.
“오늘 무슨 일이 있어도 셰프 자빠뜨려야 되겠구먼.” 삼국지의 도원결의도 이보다 필사적이지는 않았으리라.
‘문제적 남자’ 강선우는 극중 모든 여성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초절정 인기남이자 차가운 도시 남자다. 한국 로맨스물의 대표 남주 캐릭터 ‘로맨틱 츤데레’로 막강한 존재감을 발산한다. 드라마 초반 자신에게 쉴 새 없이 접근하는 나봉선에게 만리장성급 철벽을 친다. 나봉선이 누구인가. 사슴 같은 눈망울을 가진 배우 박보영 아니던가.
강선우는 처음에는 나봉선의 무데뽀 대시에 불편해하다가 점점 자기도 모르게 익숙해지고 결국에는 나봉선에게 마음의 문을 조금씩 열기 시작한다. 방영 당시 강선우 역을 맡은 배우 조정석이 돈을 내고 촬영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이 나올 정도로 ‘귀염뽀짝 팜파탈’ 나봉선의 매력은 치명적이었다. 이 드라마를 통해 배우 박보영에게 입덕했다는 팬들이 많았다. 하지만 강선우가 누구인가. 한때 대한민국을 연애고수 ‘납득이’ 열풍으로 몰아넣었던 배우 조정석 아니던가. 강선우는 새로 시작하는 사랑 앞에서 경험자답게 연륜미 넘치는 조언을 건넨다.
“아무리 맛있고 비싼 음식이라도 급하게 먹으면 체하는 거야. 몸 체하는 것보다 무서운 게 마음 체하는 거야. 알았어?”
새로 시작하는 캠퍼스 연인들이 내년까지 ‘생존’에 성공할 가능성에 대해 굳이 말하지 않겠다. 그렇다고 강선우의 ‘몸체맘체’ 대사를 내년에도 봄은 또 오니까 올해의 봄과 적당히 거리를 둬야 한다는 말로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봄은 매년 새로 오지만 지금 이 순간의 봄은 한 번뿐이다. 그러니까 단 한 번뿐인 소중한 ‘그 봄’을 꼭꼭 씹어 그 맛과 향을 천천히 음미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고이 모셔온 ‘이달의 덕담’이다. ‘내 서랍 속 드라마’도 마찬가지다. 한 달에 한 번. 만남의 횟수로 적다면 적고 많다면 많다고 할 수 있다. 한 달에 한 번 서로에게 조금씩 스며들 듯, 적당량의 그리움과 반가움을 담은, 애틋한 사이가 되길 소망한다. 새달에 또 만나요.
김민정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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