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이대론 전력생태계 붕괴···하청업체도 "전기료 인상만이 해법"
한전 적자 탓 일감 줄어들어 1차 하청 800여곳 위기
협력사 "정치권이 차일피일 결정 미뤄···현실 몰라"
'한전 지분 33% 보유' 산은 대출 여력에도 악영향
한국전력의 하청 업체인 A사는 전기 공사 수주 시 월 2억 원이 넘는 돈을 쓴다. 지역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인건비만 월 8000만 원은 족히 나간다. 고숙련 인력에게 지급하는 연봉만 1억 원이 넘는다. 여기에 고소작업차 등 관련 장비 구매 및 임대 비용도 만만치 않다. 이 회사 김상태(가명) 사장은 11일 “최근 한전이 책정하는 공사비 계산 방식이 바뀌고 전선 보수공사도 최소화하면서 수입이 급격히 줄고 있다”며 “현재는 수익이 손익분기점(월 2억원)을 밑돌 만큼 경영이 어렵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처럼 한전 하도급에만 의존하는 업체가 많아 업계 전반이 상당히 힘든 상황”이라고 분위기를 전했다.
A 업체가 어려워진 직접적 원인은 공사비 산정의 기준이 되는 ‘품셈’의 하향 조정 때문이다. 한전은 공사 업체들에 전선주에 직접 올라가 작업하는 대신 고소작업차 같은 장비를 활용하라고 지시했다. 관련 사고가 발생했기 때문이지만 업계에서는 한전의 자금난으로 공사 대금을 낮출 목적도 있었다고 보고 있다. 한전 입장에서는 안전사고 발생 가능성이 줄어든 만큼 품셈을 이전보다 40%가량 낮췄다.
문제는 안전 사고를 염두에 둬야 하는 하청 업체로서는 고숙련자를 활용한다는 점에서 이전과 달라진 게 없다는 데 있다. 김 사장은 “전기공사 업체로서는 안전 때문에라도 사람을 바꿀 수 없다”며 “사실상 품셈만 낮아져 (한전으로부터) 들어오는 돈이 적다 보니 하청 업체가 경영난에 빠지는 셈”이라고 말했다.
A 업체처럼 한전의 전기공사(고압·지중·저압)를 맡은 1차 하청 업체는 전국적으로 800여 개에 이른다. 이들이 추가로 2차·3차 식으로 하도급을 주는 업체까지 합치면 한전의 협력사는 수천 개에 달할 것으로 추산된다.
한전이 품셈 조정을 통해 부담을 하청 업체에 사실상 전가하면서 피라미드 아래에 자리한 업체들은 연쇄적인 경영난이 불가피할 수밖에 없다. 전력 생태계 붕괴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한 업계 관계자는 “과거에는 신규 공사 일감이 없어도 보수공사 일감은 많았다”며 “요즘에는 한전의 경영난 때문인지 한전이 보수공사에도 비교적 신중하게 접근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불경기로 신규 전기공사가 많이 줄어 직원 월급이 밀리는 곳도 나오고 있다”고 덧붙였다. 여기에 한전이 예산을 이유로 대금 지급에 차질을 빚으면서 공사가 지연되는 사례도 늘고 있다는 전언이다. 한 관계자는 “공사가 지연됐음에도 공사 계약 기간 마감 일에 딱 맞춰 공사를 중단하는 식의 타절 준공도 늘고 있다”고 말했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런 업체마저도 한전에 대한 피해 의식보다는 전기료 동결이 더 문제라고 지적한다는 점이다. 한전의 한 협력 업체 실무자는 “한전의 누적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다 보니 (한전이) 거꾸로 우리에게까지 어렵다는 말을 하고 있다”며 “원가에도 못 미치는 가격에 전기를 공급해 이런 사달이 나는 거 아니냐”고 말했다. 그는 “정치권이 한전에 자구 노력을 얘기하면서 차일피일 전기료 인상 결정을 미루고 있는데 너무 한가하다”고 꼬집었다.
시장에서는 올 초 금융시장에서 나타났던 한전발 위기가 전력 생태계를 위협하는 지경까지 왔다는 진단을 내놓고 있다. 이미 한전 경영난은 민간 발전사에도 큰 손해를 끼치는 상황이다. 전력도매원가(SMP) 상한제로 인해 민간 발전 업체들이 도매가 인상분을 한전에 그대로 적용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SMP 상한제는 한전의 SMP에 상한선을 적용하는 것이 골자로 한전의 적자가 이어지면서 지난해 말 도입됐다. 이날 집단에너지협회는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전체회의에서 “한전의 자구 노력도 좋지만 다른 기업에 비용을 전가하는 것은 곤란하다”며 “에너지 절감과 온실가스 감축에 크게 기여하고 있는 집단에너지 회사들도 지난해 34곳 중 14곳이 적자를 기록할 정도로 한전의 적자는 한전만의 문제로 그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전의 부실에 정책금융기관인 산업은행의 운신도 제한적이다. 산은은 한전 지분 33%를 보유하고 있어 산은의 대출 여력에도 악영향을 끼치고 있는 탓이다. 손양훈 인천대 경제학과 교수는 “전기요금 인상이 선행돼야 한다”며 “요금 동결이 금융은 물론 실물시장에서도 다양한 부작용을 낳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일단 전기요금 정상화를 통해 한전의 숨통을 틔워줘야 협력 업체 사정도 나아질 수 있다”며 “중장기적으로는 전력 시장에 경쟁 구도를 도입할지도 재고할 필요가 있다”고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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