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퍼지는전세사기, '나도 당할지 모른다' 커지는 불안감
[안나 인권운동네트워크 바람 상임활동가]
"명백한 피해 사실이 있고 정부의 도움 없이는 결코 해결될 수 없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단지 보증금이 크다는 이유로 구제받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피해자가 제발 피해자로 인정해달라고 하는 이 호소가 너무나 기가 막힙니다. 정부는 여전히 세입자들의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지난 5월 3일 있었던 '제대로 된 전세사기‧깡통전세 특별법 요구 행진'에서 전세사기 피해 세입자의 발언이다. 전세사기·깡통전세 피해자 전국대책위(이하 전국대책위)와 전세사기·깡통전세 문제 해결을 위한 시민사회대책위(이하 시민사회대책위)가 주관한 집회의 참여자들은 용산 대통령 집무실에서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 집 앞까지 행진했다.
행진이 긴급하게 진행된 이유는 5월 3일 국회국토교통위원회 법안심사소위원회에서 전세사기 피해 지원을 위한 특별법(이하 특별법) 제정안 논의가 있었으나 여야의 합의가 불발되었기 때문이다. (5월 10일 심사가 재개되었지만 16일로 다시 논의가 미뤄졌다.) "전세사기가 사회적 재난이라는 데도 동의하지 않는다", "모든 사기 피해는 평등하다"라는 원희룡 장관의 말은 피해자들을 더욱 분노하게 했다.
거리를 채운 구호와 피해 세입자의 발언. 오로지 세입자와 피해자들의 목소리로만 메운 행진은 절박했다.
전국적으로 확산하는 전세사기
지난 2월과 4월 인천 미추홀구에서 '건축왕' 가해자의 전세사기를 당한 피해 세입자 3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마지막 희생자는 2019년 9월 7200만 원 보증금으로 전세 계약을 맺었고, 재계약을 하면서 임대인의 요구로 보증금을 9000만 원으로 올렸다. 그리고 지난해 6월 그가 살던 아파트는 전세사기로 전체 60세대가량이 통째로 경매에 넘어갔다. 그는 집이 낙찰돼도 받을 수 있는 최우선변제금이 없었다.
전세사기는 주로 전세가율(매매값 대비 전세보증금 비율)이 높은 깡통전세나 매매가가 형성되지 않은 신축 빌라를 보증금을 활용해 매수하는 방식으로 행해졌다. 건축주, 바지사장, 공인중개사, 브로커 등이 함께 짜고 사기를 조직적으로 이뤘다. 집주인이 임차 기간 중 바뀌거나, 실제 소유주가 아닌 사람이 소유주인 척 거짓말해 전세 계약을 체결하거나 이중계약을 맺는 등 전세사기는 여러 수법으로 진화하고 있다.
전세사기 피해는 전국 곳곳으로 번지고 있다. 서울 강서구, 인천 미추홀구 등 빌라와 오피스텔이 밀집한 지역에서부터 경기 구리, 동탄, 대전, 광주, 포항, 부산에까지 전국적으로 피해자들이 잇따라 나오고 있다. 대법원 등기정보광장에 따르면, 올해 1분기 전·월세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한 세입자들의 임차권 등기명령 신청 건수는 8294건으로, 지난해 1분기(1886건)보다 339.8% 급증했으며 이는 지난해 연간 수치(12,038건)의 68.9%에 달하는 건수이다.
깡통전세의 위험은 앞으로 더 커질 것으로 보인다. 정의당 심상정 의원실이 국토교통부 주택자금 조달계획서(2020년~2022년 8월) 161만 건을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전세가율이 80%를 넘는 갭투기 깡통주택 고위험군으로 분류할 수 있는 경우가 12만1553건, 전세가율이 60~80%인 잠재적 깡통주택 위험군이 11만1481건이었다.
죽음으로 내몰린 피해자들의 이야기는 그저 남의 문제가 아니다. 집‧주거 관련 논쟁거리는 모두가 겪는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전세사기 피해 소식은 세입자로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공포로 다가왔다. '나도 당할지 모른다', '돈 떼일지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전세보다 월세를 찾는 이가 늘어났다고 한다. 전세 위험 부담을 감안하기 위해 한 달 거주 비용이 70만~80만 원인데도 고시원을 선택하는 청년들도 있다고 한다.
원희룡 장관이 부정하지만 전세사기는 명백하게 사회적 재난이다. 윤석열 정부는 3주택 이상 다주택자가 주택을 사들일 때 부담하는 취득세율을 완화하고 1년 이상 보유한 주택을 중과 대상에서 제외하는 등 '부동산시장 연착륙 방안'을 발표했던 바 있다. 사실상 모두의 안정적인 주거를 보장하기 위한 정책이라기보다 부동산 규제를 완화해 투기를 부추기는 정책이다. 정부 정책이 부동산 투기를 조장하는데 전세사기가 횡행할 수밖에 없다. 집을 여러 채 소유하라고, 집을 사는 것이 투자라고 부추기고 은행대출을 쉽게 해주는 국가의 부동산 정책이 부른 사회적 참사다.
정부가 '전세사기 예방 및 피해 지원방안(’23.2.2)'을 발표하면서 피해자 지원으로 주택도시기금의 전세사기 피해자 대환 대출을 신설한다고 밝혔다. 원희룡 장관은 "민간 고금리 전세대출로 경제적 어려움이 가중됐던 피해자의 부담을 조금이나마 덜어 드릴 수 있을 듯"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세입자에게 빚을 안기는 대출을 피해자 지원 대안이랍시고 내놓은 것이 이해되지 않는다. 기존의 전세금을 충당하기 위해 빚을 만든 사람들에게 또 대출을 받으라는 것은 구제책이 되기 어렵다.
"너희에겐 재산증식 우리에겐 보금자리"
논의 중인 특별법은 피해자 인정 범위를 확대하고 보증금 채권 매입 방안을 포함시키자는 야당들의 요구를 정부여당이 수용하지 않고 있다. 특히 보증금 채권 매입은 정부가 전세사기 피해자들의 채권을 먼저 사들이고 추후 투입한 재정을 회수하는 선구제 후회수 방안으로 특별법 내용으로 포함돼야 다양한 피해 유형을 실효성 있게 구제할 수 있다.
5월 8일, 전국대책위와 시민사회대책위는 제대로 된 전세사기‧깡통전세 특별법 제정 촉구'를 요구하며 국회 앞 무기한 농성에 돌입했다. 이들은 "빠른 특별법 제정도 중요하지만 제대로 된 특별법의 처리가 더 중요하다"면서 시간이 걸리더라도 피해자들의 요구가 반영된 특별법을 제정하라고 촉구했다.
전세사기로 현재 주거와 생계의 어려움을 겪는 피해자들을 진짜 구제할 법이 필요하다. 세입자들이 느낄 전세사기의 공포를 누그러뜨릴 법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입자의 목소리, 당장의 피해자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세 차례 여야 합의가 무산되며 조마조마한 마음이 있지만, 농성을 하고 있는 피해자와 시민사회의 요구처럼 부디 피해 세입자를 위한 특별법이 제대로 제정되기를 바란다.
나아가 집으로 장사하려는 이들을 제지해 세입자들이 그들에게 위축되지 않고, 이사를 계속 다니지 않고 보금자리를 꾸릴 수 있도록 주거 불안을 없앨 법‧제도가 마련되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 "이대로 살 수 없지 않습니까." "얼마나 더 죽어나가야 합니까." 피해자들과 세입자들의 절박한 외침에 정치가 구체적인 답을 내놓아야 한다. 집을 투기의 대상으로 접근하지 않고 생활의 장소, 주거의 장소로 자리매김하게끔 하는 부동산 정책으로 전환해야 비슷한 비극을 멈출 수 있다. 집이라는 삶과 주거라는 권리에 국가 책임이 있음을 정부가 이제라도 깨달아 구체적인 실천을 행하길 바란다.
[안나 인권운동네트워크 바람 상임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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