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집주인은 전세사기로 실형 받았는데···1500만원 때문에 ‘피해자’ 아니라는 정부

심윤지 기자 2023. 5. 11.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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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정부는 전세사기 피해지원 특별법 적용 대상을 보증금 4억5000만원까지 높이는 수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기존 ‘보증금 3억원 이하’라는 원칙은 유지하되, 국토부 산하 피해자지원위원회가 시·도별 상황을 고려해 최대 150%까지 조정할 수 있도록 했다. 부양 가족이 있어 상대적으로 넓은 집에 살아야 하는 피해자들을 간과했다는 비판을 수용한 것이다.

전세사기피해자전국대책위원회 및 시민사회대책위원회 관계자들이 지난달 20일 용산 대통령 집무실 인근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전세사기 대책 관련 윤석열 대통령과의 면담을 촉구하고 있다. 문재원 기자

경기도 광명의 한 빌라에서 9살 아이를 홀로 키우고 있는 A씨(32)는 그러나 11일 “정부의 수정안을 보고 마지막 남은 희망까지 무너져내리는 기분이었다”고 말했다.

A씨의 전세 보증금은 4억6500만원이다. 수정된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한다 해도 1500만원 차이로 전세사기 피해 지원 대상에서 제외된다. 명백히 전세사기 피해자이지만 보증금 한도액을 벗어난다는 이유로 피해자로 인정받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A씨의 임대인 박씨는 보증금 70억원을 가로챈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2400 일당’ 중 한명으로, 최근 1심에서 징역 7년형을 선고받았다.

A씨는 당초 전셋집을 경매에 넘겨 ‘셀프 낙찰’을 받을 생각이었다. 2020년 12월 전입 당시엔 전세가와 매매가가 같았다. 지금은 집값이 더 떨어졌기 때문에 보증금 전액 회수는 불가능하다. 낙찰을 위해선 2000만원이 넘는 취득세와 2억8500만원에 달하는 기존 전세대출 상환비용도 따로 마련해야 한다.

A씨는 “가족들의 전재산까지 보증금에 묶여있기 때문에 손해를 보더라도 하루 빨리 그 집에서 나오려했다”며 “그런데 보증금이 3억원 이상이라는 이유로 정부의 저리대출 지원도 받지 못했고, 매달 이자만 160만원씩 내고 있다. 그래도 사기를 당한 내가 감당할 몫이라 생각해 참고 견뎠다”고 했다.

특별법이 통과된 이후에도 ‘피해자’임을 인정받지 못한다면 A씨는 그 집에서 빠져나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박씨가 체납한 종합부동산세는 약 60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경우 A씨가 경매 개시를 신청한다 해도 법원에서 ‘무잉여 기각’될 확률이 높다. 조세채권(세금징수권한)이 A씨의 보증금 채권보다 앞서기 때문에 경매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이득이 없다는 것이다.

정부는 이러한 무잉여 기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임대인의 전체 세금체납액을 임대인의 보유 주택 별로 나누는 ‘조세채권 안분’ 조항을 특별법에 신설하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A씨는 박씨의 조세채권 안분 대상에서 제외될 가능성이 높다.

국세청 관계자는 경향신문과의 통화에서 “조세채권 안분은 전세사기 피해자를 지원하기 위한 특별법에 근거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국토교통부로부터 피해자 인정을 받는 것이 우선”이라고 했다.

A씨는 “보증금이 4억5000만원이면 피해자, 4억6500만원이면 피해자가 아니라고 보고 후자는 집에서 탈출할수 조차 없게 하는 정책이 맞는 것이냐”고 눈물을 보였다.

경향신문 취재 결과, 정부는 지난 2일 ‘전세사기 특별법’ 초안을 발표할 때까지도 보증금 요건에 걸려 경매를 할수 없는 피해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조세채권 안분은 화곡동 일대에서 활동한 ‘빌라왕’ 김모씨 피해자들이 주로 요구했던 대책으로, 이들 대부분은 보증금 3억원 이하다.

A씨는 “전입 당시 광명시의 인근 신축빌라 전세가는 5억원에 육박했다”고 했다. 이어 “경매가 개시돼 법원에서 이해 관계자의 지위를 얻기 전까진 임차인이 임대인 명의의 체납세금이 얼마인지조차 알 수 없다”며 “이때문에 계약기간이 남은 피해자들은 아직 문제를 인지하지 못한 경우가 많다”고 전했다.

윤재옥 국민의힘 원내대표(왼쪽)와 박광온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가 11일 국회의장실에서 만나 악수하고 있다. 이날 여야는 25일 전세사기 특별법 본회의 통과에 합의했다. 박민규 선임기자

정부는 저리대출과 긴급주거를 지원하는 주택도시기금의 예산이 한정돼있는 만큼 ‘전세사기’와 ‘단순 보증금 미반환’을 구분하는 것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전세사기 피해실태를 조사한 후 정한 요건이 아니기 때문에 A씨와 같은 ‘피해자 아닌 피해자’가 앞으로 얼마나 더 늘어날 지 알 수 없다.

권지웅 더불어민주당 전세사기 고충접수센터 공동센터장은 “피해자들마다 상황이 너무 다른데, 정부가 각종 조건을 달아 피해자의 ‘급’을 나눈다는데 분노가 크다”며 “전세사기와 보증금 미반환 모두 주거권이 흔들리고 일상이 무너진다는 점에선 동일하기 때문에 엄격한 구분이 큰 의미가 없다”고 했다.

이어 “특별법 요건의 일부만 충족해도 피해자로 인정하되, 법 취지를 악용하는 경우엔 피해지원위원회 직권으로 대상에서 제외하는 방법도 있을 수 있다”고 했다.

여야는 오는 25일 국회 본회의에서 전세사기 특별법을 처리하기로 11일 합의했다. 국회 국토위 법안심사소위는 지난달 말부터 특별법의 지원 범위와 채권매입 방안을 놓고 논의해왔지만 결론을 내지 못하다가, 이날 4번째 전세사기 피해자 사망사건이 벌어지자 신속한 처리에 공감대를 모았다.

심윤지 기자 sharps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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