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농정]① ‘랜드푸어’로 가득한 농촌… “농사 안짓는데 팔지도 못한다”

윤희훈 기자 2023. 5. 11. 16:01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농지’ 老농민의 노후자금인데…거래 막히며 농촌 경제 직격탄
사실상 지역 농민 간 거래만 가능한데…“노인들이 땅을 왜 사겠나”
“땅 처분도 못하고 하나둘 죽는데, 농식품부는 하세월”

[편집자주] ‘농촌 소멸’이 현실이 됐다. 최근 통계청이 발표한 2022년 농림어업조사 결과에 따르면, 농가 경영주의 평균 연령은 68세로 전년보다 0.8세 증가했다. 70세가 눈앞이다. 농가 인구는 216만6000명으로 전년 대비 2.3% 감소했다. 초고령화 상황을 감안하면 농촌 인구가 감소하는 속도는 더 빨라질 전망이다. 농촌의 위기는 규제와 과잉 보호가 낳은 결과물이다. 규제는 자연스러운 성장을 방해했고, 과잉보호 지원 정책은 혁신을 가로막았다. 식량안보 불안감을 키우는 농촌의 현실과 농정 정책을 들여다본다.

경남 밀양 단장면 범도마을에서 오윤석(70)씨가 매실나무 가지를 손질하고 있다. /윤희훈 기자

“땅이 있으면 뭐 합니까. 땅 거래를 막아놓으니 여기저기 ‘랜드푸어’만 양산되고 있지 않습니까.”

지난달 21일 경남 밀양 단장면 범도마을에서 대추나무를 손질하던 오윤석(70)씨는 기자를 만나 2021년 농지법 개정으로 농지 거래가 막히면서 ‘벼락 거지’가 됐다며 이같이 하소연했다.

오씨는 “나이가 들어 경작하기 어려운 땅을 정리하려는데 살 사람이 도통 나타나질 않는다”며 “예전에는 논을 내놓으면 1~2달이면 살 사람이 나타났는데, 지금은 평당 50만원 하던 땅을 30만원에 내놔도 문의조차 없는 상황”이라고 했다. 그는 “2021년 한국토지주택공사(LH) 부동산 투기 사태 대책으로 정부와 국회에서 농지 거래를 강하게 규제했다”며 “투기는 정치인, 공무원, 공공기관 직원들이 해놓고서, 엄한 농민들만 피해를 보는 상황”이라고 토로했다.

오씨는 “농촌의 고령화 상황을 고려하면 말도 안 되는 규제”라며 “땅을 팔아 자녀에게 증여하거나, 병원비로 쓸 목돈을 마련하는 것도 지금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는 “농사지을 사람은 줄어드는데, 땅은 그대로니 손이 안가는 곳은 황무지가 된다”며 “’식량안보’라느니 ‘농지의 공익성’이라느니 모두 말만 그럴싸할 뿐”이라고 했다.

오씨는 방치된 농지의 현실을 보여주겠다며 기자의 손을 끌었다. ‘진흥지역’으로 지정된 단장면의 주요 농지는 대추나무로 채워져 있었다. 대추나무가 심어진 땅 뒤로는 잡목과 잡초가 무성했다. 오 씨는 “황무지처럼 보이는 이곳도 농지로 지정된 땅”이라며 “이 황무지가 바로 지금 농촌의 현실”이라고 했다.

단장면에서 농지 거래를 전문적으로 하는 부동산을 운영하는 김모 공인중개사는 “농지법 개정 이후 농지 문의가 뚝 끊겼다”며 “석 달 전엔가 80이 넘은 할머니가 딸네 전세금 마련해야 한다며 땅 좀 팔아달라고 했는데 땅을 보겠다는 사람이 전혀 없다”고 했다. 김 중개사는 “최근 들어서 농지 거래가 이뤄지지 않다 보니 대부분 자녀들이 상속을 받는 상황”이라며 “농사를 잇는 자녀라면 다행이지만, 도시에 사는 자녀들에겐 세금만 물리는 ‘애물단지’가 되고 있다”고 전했다.

21일 경남 밀양 단장면의 한 농업진흥구역의 모습. 농지를 효율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지정된 땅이지만, 사람의 손이 닿지 않아 작목이 이뤄지지 않고 있었다. 해당 지역은 도로 전신주가 설치돼 있을 정도로 접근성이 좋은 지역이지만 일할 사람이 없어 방치되고 있다고 주민이 설명했다. /윤희훈 기자

◇LH 투기 사태가 불러온 농지 규제…농가 경제

현행법 체계는 농지의 공공성과 공익성 보존을 위해 다양한 규제를 도입하고 있다. 농지를 보존하기 위한 제1 원칙은 헌법에 명시된 ‘경자유전(耕者有田)’이다. 경자유전은 ‘농사를 짓는 사람이 농지를 보유한다’는 뜻이다.

경자유전에는 대지주와 소작농으로 구분되는 봉건시대 농지 구조를 타파하고, 자영농 체제를 지키겠다는 뜻이 담겨 있다. 농지를 보존해 식량자급률을 유지하고 식량안보를 지키겠다는 취지도 함께 담겨 있다. 이 원칙에 따라 현재도 농지는 농업인과 농업 법인만 소유할 수 있도록 규정이 돼 있다.

하지만 이러한 원칙이 항상 지켜진 것은 아니다. 개발을 통한 막대한 시세차익을 노린 투기 자본이 농지를 향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사회적 분노를 유발한 2021년 LH 임직원의 부동산 투기가 대표적인 사례다. 당시 LH 직원들이 3기 신도시 등 사업 계획과 연관 있는 지역에 집단적으로 투기를 한 의혹이 폭로됐다. 이후 조사 과정에서 정치인과 공직자들의 전방위적인 투기 논란으로까지 확산했다.

농민들의 터전인 농지를 투기 대상으로 삼아 사익을 추구했다는 사실에 농민들은 분노했다. 부산·경남지역 농민들은 진주의 LH 본사를 찾아가 항의 시위를 벌였다.

국회에선 부동산 투기를 막는 입법 제안이 쏟아졌다. 2021년 7월 23일 국회는 본회의에서 농지법 개정안을 처리했다. 농지법 개정안에는 농업진흥지역 내 농지의 주말·체험영농목적 취득을 제한하고, 농지취득자격증명 심사 요건을 강화하는 내용이 담겼다. 부동산 투기를 막겠다는 취지로 사실상 외지인의 농지 취득을 제한하는 입법이었다. 여기에 토지와의 직선거리가 30㎞ 이상인 거리에 사는 외지인이 농지를 구입하는 경우 이 농지를 팔 때 양도세를 중과하도록 세제도 강화했다.

그런데 정작 피해는 LH 부동산 투기 사태에 분노를 표출했던 농민들에게 돌아갔다. 토지 거래가 꽉 막혀버린 것이다. 통계청 토지거래현황에 따르면 지난 2월 전(田) 거래량은 전년 동월 대비 31.6% 줄었다. 한 달 전인 1월에는 1년 전보다 43.7% 감소했다.

통상 고령농들은 은퇴를 앞두고 농지를 정리해 노후 자금으로 활용한다. 일부는 자녀에게 증여하고, 본인의 생활비나 의료비 등으로 대부분 사용한다. 하지만 농지법 규정이 강화되면서 부동산을 현금화하는 게 어려워졌다. 특히 수도권이나 도시 지역에서 멀어 투기 가능성이 적은 지역에서 농사를 짓는 고령농들은 맑은 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셈이 됐다.

농지를 매각한 대금으로 경제 활동을 영위하는 노인 인구가 많은 시골에선 이 같은 농민의 ‘돈맥경화’가 지역 경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농지 거래 규제를 풀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지방에서 터져 나오는 이유다.

장병국 경남도의원은 “수도권 등 개발 가능성이 있는 대도시 인접 농촌에 대해선 투기를 예방하는 차원에서 규제를 강화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개발 수요가 전혀 없는 두메산골까지 규제 대상으로 삼는 것은 과하다고 본다”면서 “대상을 세분화하는 등 농촌의 현실을 반영해 규제를 손질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충북 영동 황간면의 농지 전경. 농지에서 만난 농민은 "정부가 쌀 감산을 요구하면서 밭 작물이나 과수 작목을 심지 못하게 한다"고 말했다. /윤희훈 기자

◇ ‘사람’ 보다 ‘땅’? 농민 외면하는 ‘농지 규제’

이렇게 농지를 지키면 대한민국의 농업이 지속 가능하긴 한걸까. 기자가 만난 농민들은 모두 고개를 가로저었다. 청년농 육성 전략이 부재한데다 도시민의 농업에 대한 관심이나 투자를 유도할 유인책이 보이지 않는다는 게 이들의 지적이었다.

오씨는 “지금 정부의 농업 정책은 모두 몇십 년 전 농업이 우리나라 최대 산업일 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며 “토지의 효율적인 이용이나 미래 농업인으로의 농지 인계 등에 대한 고민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그는 “일할 사람이 없어 땅은 방치되는 상황인데, 애써서 데려온 외국인 노동자를 위한 숙소를 농업진흥구역에 짓는 것은 또 막고 있는 게 현행법 체계”라고 했다. 그러면서 “농지법을 개정할 때부터 농민들의 피해가 예견됐지만 주무부처에선 입을 닫았다”며 “농촌에선 늙은 농민들이 땅을 처분하지 못하고 죽는데, 부처에선 하세월만 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경북 성주에서 농사를 짓는 김모씨는 “요새 장사를 해도 1년은 동일한 업종에서 해보라고 하지 않느냐. 그런데 귀농은 이러한 과정 없이 도시 생활을 모두 내려놓고 ‘올인’하듯이 도전해야 하는 상황”이라며 “도시에 거주하더라도 짬을 내 땅과 작물을 관리해 보면서 적성에 맞는지 확인하고 귀농을 하도록 해야 하는데 현행 제도는 농사에 올인하겠다는 사람만 농지를 취득하는 게 가능한 상황”이라고 꼬집었다. 김씨는 “농가의 65%는 농축산물 수입이 1년에 1000만원이 안 된다는 통계가 오늘 농촌의 현실”이라며 “인프라는 불편하고, 돈도 못 벌고, 땅도 못 판다. 내 자식이 농사를 짓는다면 무조건 반대”라고 했다.

일관성 없는 정부 정책에 대한 지적도 나왔다. 충북 영동 황간면에서 포도와 논농사를 짓는 윤명수씨는 “쌀이 남는다고 쌀 생산을 줄이라고 하면서, 농지를 밭으로 전환하는 것은 못 하게 막는다”며 “콩, 밀, 조사료 등 정부가 정한 작물만 심으라고 하는데, 손은 많이 가고 수익성은 떨어지는 작목이다. 쌀이 남아 값이 떨어져도 손이 덜 가니까 쌀농사를 짓는 것”이라고 했다.

전문가들은 현행 농지 관리 체계를 ‘도시의 자본이 유입되는 것을 차단하는 구조’라고 진단한다. 농촌 소멸을 막고, 지역 균형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선 이러한 이분법적 사고를 해소해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제언이다.

박합수 건국대 부동산대학원 겸임교수는 “초고령화한 농촌의 지상 과제는 ‘세대교체’다. 하지만 정작 농지에 대한 규제가 강화되면서 일할 사람은 사라지고, 땅만 남는 불균형이 심화하고 있다”며 “도시의 노동력과 자본을 어떻게 농촌으로 유입시켜야 할 것인지를 찾는 것이 시급한 과제인데, 현재 농지 관련 규제는 이러한 유입을 차단하는 데만 역점을 두고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농식품부 관계자는 “농지법 규제 강화 이후 농지 거래가 제한돼 농민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면서 “영농 목적의 농지 거래를 제한하지 않도록 지역별로 차등을 두는 등 관련 법을 재개정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다만 “경자유전 원칙과 관련해선 개헌이 필요한 사항으로, 당국자가 직접적으로 언급하기 어려운 문제다. 사회적 합의가 선행돼야 할 것”이라고 했다.

- Copyright ⓒ 조선비즈 & Chosun.com -

Copyright © 조선비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