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식을 돈과 바꾼다고? 프랑스선 상상 못해![시차적응]

김수현 기자 2023. 5. 11.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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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나라 사람들은 왜 그렇지?’ 국제뉴스 속 궁금증을 콕 짚어 새로운 시각에 적응시켜 드립니다.
에마뉘엘 마크롱 정부의 연금 개혁에 반대한 프랑스 시민들이 4월 17일 파리의 거리로 나와 항의 표시로 냄비를 두드리며 시위하고 있다. 파리=AP 뉴시스
‘2년만 더 일하면 연금을 더 준다는데 그렇게까지 반대할 일인가?’

요즘 프랑스를 뜨겁게 달구는 연금 개혁 반대 시위를 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연금 재정 고갈을 막기 위해 ‘더 일하고 더 받자’는 마크롱의 개혁에 일리가 있어 보이는데 프랑스 사람들은 거리에서 프라이팬과 냄비를 두드리며 결사반대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선 ‘정년 보장’은 큰 혜택이고, 하물며 ‘정년 연장’은 감지덕지할 일입니다. ‘프랑스 사람들은 너무 일하길 싫어하는 거 아냐?’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연금 개혁에 왜 그리 반대하는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한국에 머무는 프랑스 사람 3명에게 물었습니다. 그들은 당연한 듯 답합니다.

“인생에서 드디어 쉴 수 있는데, 그걸 왜 미뤄야 하죠?”

▽기자
단도직입적으로 여쭤볼게요. 더 일하고 더 벌면 좋은 거 아닌가요? 왜 일을 안 하려고 하나요?

▽마리나
“한 마디로, 삶의 행복이 줄어들기 때문이에요. 프랑스 사람에게 휴식과 돈은 애초에 교환 대상이 아니에요. (한국에선 ‘휴일에 차라리 일하고 수당 더 받자’는 사람이 많아요.) 휴일에 왜 일을 하죠? 휴일은, 말 그대로 쉬는 날이잖아요.”

▽바네사
“누가 저한테 휴일에 일하면 더 준다고 해도 저는 절대 일 안 해요(웃음). 쉬어야 하는 날 왜 돈을 벌어야 하나요?”

▽쉐리안
“저 같은 젊은 세대들은 코로나19 직장에 대한 인식이 많이 바꿨어요. 윗세대가 ‘평생 일한 후 은퇴하고 쉰다’고 생각한다면 지금 친구들은 언제든지 쉬고 싶을 때 그만 둬요. 돌아와서 다른 일을 찾으면 되니까요.”

▽기자
최대한 늦은 나이까지 일하면서 많이 벌어놔야 노후가 더 안정되지 않나요?

▽마리나
“프랑스에선 인생에서 3번의 삶이 있다고 해요. 첫 번째는 학생의 삶, 두 번째는 직장인의 삶, 그리고 마지막은 은퇴의 삶이죠. 학생 때는 꿈이 있으나 돈이 없고, 직장인은 돈이 있으나 시간이 없죠. 비로소 은퇴할 때 그동안 간직해온 꿈, 돈, 그리고 무엇보다 시간이 있어요. 은퇴야말로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이룰 수 있는 가장 안정된 삶의 시작이죠.”

마리나 위옹 한남대 프랑스어문학과 교수(41)
▽바네사
“정년에 대한 개념이 한국과 완전 달라요. 프랑스에서 일은 결코 ‘평생’ 개념이 아니에요. 할 수 있는 만큼 하는 거죠. 은퇴란 할 일을 모두 끝냈다는 의미예요. 쉴 자격을 얻는 거죠.”

▽마리나
“인생에서 ‘마침내 쉬는 구나!’ 하는 거죠. 은퇴는.”

▽바네사
“가장 중요한 건 행복이잖아요. 행복하지 않다면 일하는 게 무슨 의미죠.”

은퇴가 늦어지면 여생은 언제 즐기죠?

▽기자
하지만 ‘100세 시대’에 62세에 은퇴하기엔 너무 이르지 않을까요?

▽바네사
“직군에 따라 다를 거 같아요. 저희 같은 교육자는 62세 넘어서 일할 수 있어요. 하지만 몸을 쓰는 직군은 다르죠. 지금도 62세 전에 연금 일부를 포기하고 조기 퇴직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삶의 질을 위해 떠나는 거죠. 정년이 64세까지 늘면 더 많은 사람들이 견디지 못하고 떠날 거예요. 그 자리는 어떻게 메워야 할까요? 결국 남아 있는 사람들만 부담이 늘어나는 거죠.

▽마리나
“은퇴는 두 가지가 공존해야 해요. 일단 은퇴를 해야 하고(웃음), 그 다음으로는 건강해야 해요. 여생을 즐길 수 있는 조건이 갖춰져야 해요. 은퇴가 늦어지면 특히 몸을 쓰는 직군은 아프고, 기력도 약해지고 그래서 삶을 즐기기 어려워져요.

한 노인이 친구와 배를 탄 채 노를 저으며 여가를 즐기고 있다. 픽사베이
▽기자
한국에서 은퇴는 주로 노후 자금 마련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요. 프랑스는 어떤가요?

▽마리나
“프랑스는 달라요. 은퇴 후 생활비는 연금으로 어느 정도 해결된다고 보기 때문에 그렇게 큰 관심은 없어요. 가족과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어디를 여행할지 같은 어떻게 하면 행복할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요.”

▽바네사
“프랑스에서 은퇴 계획은 곧 ‘행복을 찾는 일’이에요. 저는 80, 90살이 기대돼요. 저희 할아버지는 93살에 돌아가실 때까지 인생을 충분히 즐기셨어요. 86살 때는 인터넷도 독학으로 익히셨어요. 그런 모습을 보면, 저도 기대가 되는 거죠.”

바네사 부르봉 충남대 불어불문학과 교수(49)
▽마리아 & 바네사
“은퇴 연령을 정부가 일괄적으로 정하는 것도 문제예요. 남들보다 일을 일찍 시작하는 사람도 있고, 또 노동 강도가 높아 64세까지 일하는 것이 무리인 사람도 있어요. 마크롱 대통령은 평등의 원칙이라며 정년을 (일괄적으로) 정했지만 그건 평등과 다른 문제에요. 그런 접근은 ‘프랑스’가 아닌 거예요.”

▽기자
한국과 프랑스에서 은퇴를 보는 시각차는 왜 생긴 걸까요?

▽바네사
“출발점이 다르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프랑스에선 기존 월급의 약 70%를 연금으로 받을 수 있어요. 제 할머니가 곧 97살이신데 한 달에 약 2000유로(290만원) 가까이 받고 계세요. 이전에는 연금 수령액이 지금보다 많았으니까요. 요즘 점점 줄어드는 건 사실이에요.”

▽마리나
“직업에 관한 가치관도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에서 직업과 사회적 인정이 거의 동일시 되잖아요? 일이 없어지면 곧 삶이 끝난다는 생각이 있는데, 프랑스는 그런 개념이 없어요. 돈도 결국 살기 위해 필요한 요소일 뿐이죠. 돈을 위해 가족이나 내 시간을 포기한다는 게 이해되지 않아요.

픽사베이


프랑스인들도 “더 나은 복지 원하면 북유럽 가야”

▽기자
젊은 세대는 어떤가요. 한국에선 벌써부터 노후 대책을 고민하는 2030이 많은데.

▽쉐리안
“제 친구들을 보자면, 아직 은퇴가 먼 미래라고 생각해서인지 크게 신경 쓰진 않아요. 다만 윗세대와 분명한 차이가 있다면, 모두가 은퇴 후에 지금보다 훨씬 더 가난해질 거란 걸 알고 있어요. 더 이상 연금이나 정부 복지만을 믿진 않아요. 대기업 다니는 친구들은 벌써 개인용 은퇴 저축도 알아봐요. 각자 은퇴를 위해 스스로 준비하는 거죠.”

▽기자
그렇다면 지금의 연금개혁에 찬성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연금제도의 불안정성이 줄어들 수 있잖아요.

▽쉐리안
“아니죠. 저희가 은퇴할 때까지 연금제도가 유지될지 아무도 모르잖아요. 이번 법안에서 더 일해야 하는 기간이 2년이 늘어났다면, 언제든지 3년, 4년, 극단적으로는 10년까지도 늘어날 수 있다는 뜻이에요. ‘정부가 나의 삶을 보장해줄 것이다’는 전제 자체가 많이 흔들리고 있어요. 코로나19 영향이 컸다고 봐요. 2년을 더 일하고 세금을 더 내도, 삶이 나아지지 않을 것 같다는 불안감이 큰 거죠. 그래서 정년 연장을 거부하는 거죠. 한국에선 유럽은 복지가 좋을 것 같다고 하지만, 우리끼리도 더 나은 복지를 원하면 북유럽으로 가야 한다고 말해요(웃음).

쉐리안 맥피(27) 씨 . 프랑스 기업에서 근무하다 현재 퇴사 후 여행 중.
▽기자
최근 통과된 프랑스 연금개혁법은 어떻게 보세요?

▽쉐리안
“우리도 연금개혁이 필요하다는 건 알고 있지만 시기가 너무 안 좋아요. 다들 경제적으로 너무 힘든 시기에요. 지난해에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여파로) 연료를 못 구해서 사람들이 차도 못 타고 다녔어요. 5년 전 노란조끼 시위(2018년 마크롱 정부의 유류세 인상 발표로 촉발된 반정부 시위) 이후 달라진 건 없는데, 일은 더 시킨다고 하니 사람들이 분노하는 거예요.

▽마리나
“강압적 방식도 문제였어요. 헌법 49조3항 발동했잖아요. 의회 동의도 없이 법안을 통과시켰죠. (프랑스는 헌법 49조3항에 의해 정부가 긴급한 상황이라고 판단할 경우 의회 동의 없이 법안을 통과시킬 수 있다.)”

▽바네사
“프랑스 사람들은 문제가 생기면 무조건 ‘노(No)‘하는 것도 사실이에요(웃음). 그런데 논의도 없이 일을 강행한다, 그건 프랑스가 아니에요.”

마크롱 정부의 연금 개혁에 반대하는 프랑스의 진보단체 회원들이 노동절인 5월 1일 파리의 공화국광장에 있는 동상 위에 올라가 ‘마크롱은 물러나라’는 현수막을 걸고 시위하고 있다. 파리=AP 뉴시스
기자는 인터뷰를 마치며 은퇴하면 지금보다 행복할 것 같은지를 묻자 세 사람 모두 “그렇다”고 답했다. “일하기는 싫지만 연금은 받고 싶어서 시위하는 것 아닌가”라는 다소 도발적인 질문에는 이런 답이 돌아왔습니다.

“그렇게 볼 수도 있을 거예요. 하지만 복지는 프랑스 사람들이 이전부터 지켜왔던 당연한 권리인 걸요. 내가 일한 돈으로 기꺼이 세금을 많이 내고, 그에 따라 모두가 정당하게 복지를 누리는 것. 그게 프랑스의 민주주의라고 생각해요.”(바네사)

김수현 기자 news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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