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 ‘광주인권상’에 반발한 이유는? [특파원 리포트]
지난 2019년 여름 홍콩에서 '송환법 반대' 시위 현장을 취재하던 한국 기자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시위대가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5·18 광주 민주화운동을 모티브로 만들어 80년대 민주화 시위 현장마다 울려퍼지던 바로 그 노래입니다.
■ 홍콩 시위대, 5·18 모티브 '임을 위한 행진곡' 불러
KBS뉴스 등 보도를 통해 이같은 사실이 알려지면서 국내에서 홍콩 시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후 '임을 위한 행진곡'을 광둥어로 번역해 노랫말을 붙이고 직접 시위 현장에서 노래한 홍콩 활동가 매리 킹씨가 직접 광주를 찾기도 했습니다. 1980년 5월 최후 항쟁지였던 옛 전남도청도 방문했던 매리 킹씨는 당시 KBS와의 인터뷰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처음 들었을 때 매우 감동적이어서 모든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고 말했습니다.
또 홍콩 젊은이들은 2019년 시위가 열리던 길거리에서 민주화 과정을 다룬 한국 영화들을 상영했습니다. 5·18을 다룬 '택시운전사'도 그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 올해 '광주인권상'에 홍콩 인권변호사 선정...홍콩 시위 주도
이같은 공감 때문이었을까요? 5·18기념재단은 이달 초 올해 '광주인권상' 수상자로 홍콩의 천안문 추모 시위 등을 주도한 홍콩의 인권변호사 초우항텅을 선정했습니다. 초우항텅은 6·4 천안문 민주화 시위 희생자 추모 집회를 홍콩에서 30여년간 개최해온 홍콩시민지원애국민주운동연합회(약칭 지련회)의 부주석입니다.
초우항텅은 2020년과 2021년 당국이 불허한 천안문 민주화 시위 추모 집회 참가를 독려한 혐의로 징역 22개월을 선고받았습니다. 지련회의 다른 간부들과 함께 홍콩 국가보안법상 국가권력 전복 혐의로도 기소됐습니다.
'광주인권상' 심사위원회는 "홍콩 정부의 반민주, 반인권적 처사에 맞서 저항해오며 현재 구금상태에서도 홍콩 민중을 억압하는 제도에 맞서 힘겨운 싸움을 이어나가고 있고, 이러한 노력이 전 세계의 인권운동가들과 민주사회를 염원하는 시민들에게 용기와 희망이 되고 있다"고 선정 사유를 밝혔습니다.
'광주인권상'은 5·18민주화운동 정신을 널리 선양하기 위해 2000년 제정됐습니다. 해마다 5월 18일 시상식을 엽니다. 훗날 동티모르의 대통령이 되는 사나나 구스마오가 2000년 첫 수상자가 된 이래 해외 인권운동가들이 역대 수상자의 절대 다수를 차지했습니다. 올해 '광주인권상'은 문희상 전 국회의장이 심사위원장을 맡았고 하태경 국민의힘 의원, 박진 국가인권위원회 사무처장 등이 심사위원으로 참여했습니다.
■ 중국 외교관, 5·18기념재단 방문해 '광주인권상' 사실상 철회 요구
지난 2일 수상자 발표 뒤 크게 주목받지 못하던 올해 '광주인권상'에 갑자기 관심이 쏠린 것은 중국과 홍콩 당국의 대응 때문입니다. 5·18기념재단 측에 사실상 초우항텅의 ‘광주인권상’ 수상 취소를 요구했습니다.
먼저 광주 주재 중국총영사 등 총영사관 관계자 3명은 지난 8일 광주 서구 5·18 기념재단 사무실을 찾아 “홍콩은 중국의 영토이고, 수상자로 선정된 인물은 폭력 시위로 구금된 사람”이라며 “재단이 결자해지 해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조진태 5·18 기념재단 상임이사는 중국 측이 '항의'는 아니고 '소통'을 하자며 방문했었다면서, 중국 측의 ‘결자해지’ 요구를 '광주인권상' 결정에 대한 재고와 취소로 인식했다고 밝혔습니다.
조 상임이사는 중국 측의 요구에 대해 “'광주인권상' 수상자를 중국을 반대하는 이데올로기 차원이 아니라 인간의 기본권 등을 고려해 결정한 만큼 중국이 대국답게 받아들이기 바란다,” “내부 논의는 하겠지만 재단은 정부 지시에 따르지 않고 독자적 심사 과정으로 수상자를 선정한다”고 설명했다고 전했습니다.
중국 정부에 이어 홍콩 당국도 나섰습니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10일 초우항텅의 '광주인권상' 수상에 대해 "불법 행위를 노골적으로 미화하거나 홍콩의 내정에 간섭하려는 외세의 조치에 강하게 반대한다"는 홍콩 당국의 입장을 보도했습니다. 홍콩 국가보안법 담당 부서인 국가안전처 대변인이 “홍콩은 법을 준수하고 범법자는 책임을 져야하는 법에 의해 통치되고 있는 곳”이라며 이같이 말했다고 SCMP는 전했습니다.
이처럼 중국과 홍콩 당국자가 '광주인권상' 선정에 적극 반발하고 외신으로 확산되며 자연스레 세간의 이목을 끌게 된 것입니다.
■ 5·18기념재단, '광주인권상' 철회 않기로...홍콩 현실 인식하는 계기돼
5·18기념재단은 중국 측 인사들이 재단을 방문한 뒤 '광주인권상' 심사위원 등과 상의를 했습니다. 이후 최종적으로 상을 취소하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사실 '광주인권상'이 철회된 사례가 한번 있었습니다. 2004년 수상자인 미얀마의 아웅산 수치가 그 대상입니다. 2015년 이후 미얀마에서 영향력 있는 정치적 지위를 가지고 있었지만 로힝야에 대한 인권 유린과 비인도적인 행위들을 방관했다는 이유로 2018년 상을 철회했습니다. 수상자가 민주주의와 인권을 기치로 하는 '광주인권상'의 취지를 훼손했기 때문이라고 5·18기념재단은 밝혔습니다. 아직 시상식조차 하지 않은 초우항텅의 경우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이번 '광주인권상' 철회 요구를 겪으며 한국인들은 지금의 홍콩이 과거 자신들이 알던 홍콩과는 많이 달라졌다는 사실을 거듭 확인했습니다.
실제 홍콩에서 열리던 천안문 민주화 시위 희생자 추모 집회는 홍콩 국가보안법 시행 후 사실상 사라졌습니다. 시위 진압을 지휘했던 공안 책임자가 홍콩의 행정 수반이 됐습니다. '애국자가 홍콩을 다스려야한다'는 중국 정부의 지침 이후 이른바 민주 진영은 홍콩 의회 진입 자체가 어려워졌습니다. 반정부 성향의 언론 매체는 문을 닫고 사주가 구속되기도 했습니다.
중국과 홍콩 당국의 '광주인권상' 선정 반발을 계기로 홍콩의 실정에 대해 좀 더 알게된 한 5·18 관련 단체 인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80년 한국 같네요."
조성원 기자 (sungwonc@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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