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소리꾼들의 작창 세계 들여다 보니…“세상에 없던 장단의 탄생”

2023. 5. 11.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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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로 숙련된 작업 ‘작창’
전문성 갖춘 소리꾼들의 작업
대본 분석이 작창이 첫 단계
장단 정한 뒤, 음계 결정
“조보다는 장단을 우선하고…
음의 색보다는 말의 색 강조”
판소리공장 바닥소리의 ‘해녀 탐정 홍설록’ [바닥소리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귀신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란 부관이 섬뜩한 불안감에 어찌할 바를 모른다. 손톱을 물어뜯다, 급기야 말까지 더듬는데…. “그, 그…그러니까…. 그, 그…그러니까….” 바닥소리의 창작 판소리 ‘해녀 탐정 홍설록’의 한 장면. 대본을 받아 들고, 치열한 고민은 시작됐다. 부관 역할을 연기하며 작창을 짠 판소리공장 바닥소리의 소리꾼 강나현은 “이 역할은 캐릭터가 너무나 분명해 어떤 장단을 입혀야 할지 고민을 많이 했다”고 말했다. 장단을 정하는 것은 ‘작창’의 첫 걸음이기 때문이다.

“보통 대본을 받은 뒤, 어떤 부분에 소리를 입힐지를 정해요. 그런 다음 장단을 정하는 것에서 작창은 시작되죠.” (바닥소리 대표 정지혜)

최근 서울남산국악당에서 열린 2023 남산소리극축제 네트워킹 ‘바닥소리 작품으로 만나는 판소리 작창의 세계’에선 판소리 단체 바닥소리의 작창 과정을 엿볼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됐다.

작창(作唱)은 ‘소리를 짓는다’는 뜻이다. 판소리에서 한국음악의 장단과 음계를 기반으로 극의 흐름에 맞게 새로운 소리를 짜는 작업이다. 이 땅의 모든 판소리는 ‘작창’을 필요로 한다.

바닥소리에선 소리꾼들이 모두 작창에 참여한다. 이 단체의 기본 정신이 “작창과 소리를 겸한 창작자로의 성장”이기 때문이다.

‘해녀 탐정 홍설록’의 작창 작업을 하며 강나현은 기존 판소리 다섯 바탕의 흐름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중모리, 중중모리, 자진모리, 휘모리, 엇모리 등 판소리 다섯 바탕이 즐겨쓰던 장단 안에 넣기엔 부관 캐릭터가 너무도 독특하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독창적인 역할이었던 만큼 익숙한 장단을 벗어나 각 지역마다 살아있는 무속 장단 발굴을 시작했다.

“무속 장단 중엔 엇박을 이용한 장단이 많았는데 그 중 도살풀이 장단을 찾았어요. ‘따따 따따따따, 따따 따따따따’라고 이어지는 부분이 말을 더듬는 대사와 접목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강나현)

예상은 적중했다. 말더듬이 부관과 만난 이 장단은 판소리의 한 장면을 ‘쇼미더머니’(케이블 채널 엠넷의 래퍼 경연 프로그램)로 뒤바꿨다. 랩을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일부러 버퍼링을 걸어놓은 것 같기도 한 이 장면은 부관의 약점을 재기발랄한 매력으로 뒤바꿨다. 소리꾼의 기발한 아이디어와 ‘작창의 묘미’가 기막힌 합을 이룬 장면이다.

판소리공장 바닥소리의 ‘체공녀 강주룡’ [바닥소리 제공]

■ 소리꾼들의 고도로 숙련된 작업 ‘작창’

‘소리를 짓는 일’은 오랜 고민과 기다림의 작업이다. 충분한 시간을 들이고, 대본 안에 녹아든 말의 의미, 그것을 넘어 행간의 의미까지 살려 ‘음악화’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다.

‘작창’은 ‘모두’에게 허락되지 않는다. 한 분야에서 오래도록 수련한 전문가들을 통해 이뤄지는 고도의 ‘숙련된 작업’이다. 전통의 음악세계에서 자신만의 ‘소릿길’을 닦아, 판소리의 음악세계를 꿰뚫고 그것의 문학세계를 간파한 소리꾼만이 할 수 있는 작업이다. ‘절묘한 킥’ 하나가 예술의 세계를 가른다. 설익은 접근은 작품의 품위를 떨어뜨리고 만다.

작창의 기본은 텍스트의 상황과 정서를 장단(리듬), 길(음계), 성음(악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작창은 작품에서 출발한다. 이미 나와 있는 대본에 소리로 표현할 대목들을 골라 곡조와 장단을 붙이는 것이니 ‘제약’이 많을 수밖에 없다.

바닥소리와 다수의 창작 판소리 작업을 해온 이기쁨 연출가는 “텍스트는 정해져 있으나, 작창 과정에서 핵심적인 내용이 바뀌거나, 작가가 의도하는 것에 해를 가하지 않는 선에서 장단에 맞춰 가사가 변형되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적확한 작창’을 위해 작창가들에겐 보다 많은 자율성이 부여된다. 작창 자체가 판소리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해녀 탐정 홍설록’ [바닥소리 제공]

■ 작창의 순서…대본 분석 후 장단·음계 정하는 순서

정해진 공식은 없지만, 소리꾼들의 ‘작창 첫 단계’는 대본 분석이다. 그런 다음 대본의 의미를 담아 잘 표현할 수 있는 장단을 정하고, 멜로디를 입히는 순서로 작창을 이어간다.

바닥소리 소리꾼 이승우는 “장단을 결정할 땐 장면의 역동성을 많이 따진다”며 “하지만 역동적인 장면이라고 빠른 장단을 쓰는 단순한 접근을 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역동적이어도 느린 장단을 쓰고, 평평한 장면에도 빠른 장단을 활용”해 다양한 재미를 살린다. 온전히 소리꾼의 감각과 해석이 작창의 방향성을 결정하는 셈이다.

“작창의 매력이 바로 거기에 있어요. 한 장면을 보고도 사람마다 느껴지는 바가 다른 거죠. 재밌는 장면을 봐도 누군가는 덤덤하게 들을 수 있지만, 누군가는 에너지 넘치게 풀어낼 수도 있어요.” (강나현)

바닥소리의 최근작인 ‘체공녀 강주룡’의 장단을 선택한 기준은 독특하다. 장지혜는 “강주룡의 삶을 거꾸로 돌려 재배치하는 장면으로, 반복되는 음가를 넣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때문에 빠른 장단에서 느린 장단으로의 변화를 줘 강주룡의 삶을 ‘되감기’했다. 이승우는 “자진모리로 시작해 엇모리, 중중모리, 중모리, 진양으로 점점 느려지도록 조합했다”고 말했다.

바닥소리에선 익숙한 장단을 찾기도 하고, 조금은 낯선 장단을 발굴하기도 한다. 보다 다채롭고 풍성한 판소리를 위해 장단을 새로 만드는 작업도 이어간다. 이승민은 “1800년대 당시에도 유명 소리꾼이 진양조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조선 창극 역사에 남아있다”며 “200년 전에도 장단을 만들어 소리를 했는데 지금의 우리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해 새 장단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장단을 정한 뒤에는 음계(조)를 결정한다. 두 가지 작업은 보통 동시에 이뤄진다고 한다. 이승우는 “요즘 현대 판소리에선 우조와 계면조의 경계는 확실하나, 우조와 나머지 조들은 불확실하고 모호하다”며 “대체로 우조가 아니면 계면조 언저리에서 음계를 정한다”고 말했다. 다만 “조보다는 장단, 음의 색보다는 말의 색깔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가장 밑바닥’의 사람들의 ‘일상의 이야기’를 들여다보는 바닥소리의의 작창 특징은 “인물이 성격과 작품의 특징에 집중한다”는 점이다. 장지혜는 “대본 안의 말, 단어가 풍기는 냄새와 색깔을 끄집어내기 위해 고민하고, 넓은 음역을 활용한다”고 말했다. ‘넓은 음역대’를 활용, 한 곡 안에서 최대 2~3개의 옥타브를 넘나들면 곡의 다이내믹이 살아난다. 이기쁨 연출가는 “그래서인지 바닥소리의 작창은 역동적이다. 이들 작품을 듣다 다른 작품을 들으면 심심하고, 지루하다고 느껴질 수 있다”고 말했다.

판소리공장 바닥소리의 ‘체공녀 강주룡’ [바닥소리 제공]

■ 미래의 작창가 필요…“장단 어플 활용해 작창 시도” 조언

판소리와 창극이 동시대성을 입고, 새로운 이야기로 나아가며 작창가는 ‘요즘의 전통’이 요구하는 새로운 직업군이 되고 있다. 이날 네트워킹에도 전통예술에 관심을 가진 신진 예술가부터 일반 대중까지 10여명이 참석, 작창의 세계에 관심을 보였다. 바닥소리 멤버들도 현실적인 조언을 나눴다.

장지혜는 ‘작창 꿈나무’들을 위해 ‘장단 메트로놈 어플’을 활용, 작창에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고 귀띔했다. ‘체공녀 강주룡’ 중 “진동하는 악취, 진동하는 악취, 좁다, 더웁다, 바깥의 계절은 무엇이냐”라는 노랫말의 ‘옥’이라는 곡을 만들 당시, 이 어플을 통해 장단을 찾았다. 장지혜는 “어둡고 끈적끈적한 감옥의 느낌을 표현하고 싶어 ‘어랑타령’이라는 장단을 사용했다”며 “이 안에 모든 국악 장단이 다 들어있어 텍스트에 어울리는 장단을 찾아가며 작창을 시도해볼 수 있다”고 조언했다.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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