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과 접촉 늘리는 재계… 완전 복구까진 시간 걸릴듯
화이트 리스트(수출심사우대국) 복구 등 한일 관계가 개선되는 가운데, 재계(財界)가 일본과의 접촉을 늘려가고 있다. 다만, 약 4년간 정부나 재계 모두 단교(斷交) 수준으로 관계가 악화하면서 소통 채널이나 인력, 협력 사업 등을 복구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전망이다.
11일 재계와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지난 4월 대(對)일본 수출액은 20억9700만 달러로 전년(26억2500만 달러) 대비 20.1% 감소했다. 일본 수출액은 지난 10월(-13.1%)부터 7개월 연속 감소세를 이어가고 있다. 같은 기간 무역수지는 19억3000만 달러 적자를 기록했다. 관세청이 수출입 통계를 작성한 2000년부터 일본과의 무역수지는 한 차례도 흑자를 기록한 적이 없다.
재계 관계자는 “한국은 일본에서 소재·부품·장비(소부장) 등 중간재를 수입해 완제품을 만든 뒤 수출하는 무역구조”라며 “반면 스마트폰, 자동차, 가전 등 한국의 주요 수출품은 일본에서 거의 소비되지 않고 있어 무역수지가 적자를 기록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미국, 유럽연합(EU) 등 전 세계 국가에서 일본 기업과 경쟁을 펼치고 있어 양국이 사업 협력을 하기는 어려운 환경”이라고 덧붙였다.
◇ 한일 관계 개선에 빨라지는 경제 협력 논의
하지만 최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한국을 12년 만에 방문하는 등 한일 관계가 급속도로 개선되면서 사업 협력을 추진하려는 재계의 움직임이 빨라지고 있다. 지난 8일 기시다 총리는 한국의 6개 경제단체장과 만나 양국 경제협력 확대 방안을 논의하면서 “한·일 간 협력 확대에 기업이 먼저 나서 달라”고 당부했다.
앞서 윤석열 대통령도 지난 3월 일본을 방문에 기시다 총리와 정상회담을 가졌다. 당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대한상공회의소 회장), 정의선 현대차 회장, 구광모 LG 회장 등 4대 그룹 총수도 경제사절단으로 참석했다.
이에 4대 그룹은 일본 시장에 대한 조사를 강화하는 등 협력 사업 발굴에 나서고 있다. 삼성전자는 지난 3월 일본 현지에서 판매되는 스마트폰과 태블릿 단말기 후면의 로고 각인을 기존 ‘Galaxy’(갤럭시)가 아닌 ‘SAMSUNG’으로 변경했다. 2015년 갤럭시S6에 삼성 로고를 제외한 지 8년 만에 다시 삼성 로고가 제품에 반영된 것이다. 또 삼성전자의 일본 공식 사이트 주소와 공식 SNS 계정도 ‘갤럭시 모바일’에서 ‘삼성’으로 바꿨다.
현대차는 작년 2월 일본 승용차 시장에 재진출한 이후 일본 시장 공략을 강화하고 있다. 현대차의 일본 진출은 2009년 철수 이후 12년 만이었다. 현대차는 일본 시장의 변화에 맞춰 친환경 모델인 아이오닉5와 넥쏘를 전면에 내세웠다.
SK는 2021년에 설립한 일본투자법인의 리서치 역할을 강화하고 있다. SK는 일본 소부장 기업 투자를 위한 펀드 조성을 준비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LG는 배터리 계열사 LG에너지솔루션이 일본 도요타와 미국 내 전기차 배터리 공급을 추진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LG에너지솔루션은 일본 완성차 업체인 혼다와 합작사(LH배터리)를 설립한 바 있다.
◇ 공급망, 에너지 등 B2B 협력 가능
일각에서는 한일 재계의 협력 성과가 체감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4년 이상 일본과의 교류가 끊기면서 정부나 재계 모두 소통 채널을 다시 복구해야 하기 때문이다. 대한상공회의소가 한일 기업인 간 사업협력 모델 발굴을 위해 ‘스터디모임’을 만든 것도 이러한 배경 때문이다.
일본의 위상이 떨어진 점도 협력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과거 일본은 ‘배워야 하는 국가’로 평가받으며, 창업·선대 회장들은 자주 일본을 찾아 경영을 논의하거나 신기술 등을 도입했다. 하지만 젊은 총수들은 일본 시장에 대한 특별한 애착이 없다. 고(故) 이건희 삼성 선대 회장은 경영 구상을 위해 자주 일본으로 출국했다. 2011년에는 일본으로 출국하면서 “(품질 등)일본을 따라가려면 아직 멀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선대 회장이 입원한 뒤 실질적인 총수가 된 이재용 회장은 2015년에 일본 법인의 주재원을 약 390명에서 160여명으로 줄였다. 이후 2019년 소부장 사태를 계기로 주재원을 조금씩 늘였지만, 예전의 명성은 찾지 못하고 있다.
과거 삼성 일본 법인은 오너가를 담당하는 삼성의 일급 직원들만 간다는 승진 코스였지만, 현재 삼성 최고경영자(CEO)급에서 일본 법인을 경험한 사람은 없다. 윤종용 전 삼성전자 부회장이 일본 법인 출신의 마지막 세대로 분류된다. 여기에 ‘외산의 무덤’으로 불리는 일본에서 휴대전화, 자동차, 가전 등 우리나라 주력 수출품의 실적이 부진한 것도 협력이 어려운 배경이다.
일본수입차협회에 따르면 현대차의 지난해 일본 시장 판매 대수는 526대(버스 8대 포함)에 그쳤다. 2021년(6대)에 비해 90배 이상 늘어난 수치지만, 1억2500만명의 인구를 가진 일본에서 526대 판매는 사실상 사업을 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스마트폰의 경우, 지난해 미국 애플이 56%의 점유율을 차지했다. 삼성의 점유율은 10%에 그쳤다. 가전 시장에서도 LG전자가 OLED TV에서 7% 수준의 점유율을 가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개인간거래(B2C) 사업 보다는 반도체, 배터리, 에너지 등 B2B(기업간거래) 분야에서의 협력이 가능할 것으로 보고 있다. 또 합작사를 만들어 해외 시장에 공동 진출하는 방법도 있다. 예를 들어 미래 친환경 에너지로 분류되는 수소 산업 확장을 위해, 한국과 일본이 공동 생태계를 구축하면 빠르게 수소 생태계를 고도화 할 수 있는 식이다.
정부 관계자는 “한일 관계 회복에 따라, 기업들이 다양한 협력을 고민하고 있다”며 “특히 반도체, 배터리, 에너지 분야에서 협력이 가능할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각 국이 자원을 무기화하는 상황에 대응하고 원자재 수급 안정을 위해 협력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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