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 급구" 암환자 왜 직접 뛰나 했더니…국민 '생명줄' 끊어질 위기

이창섭 기자 2023. 5. 11. 07:24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MT리포트]혈액 절벽이 온다 (上)
[편집자주] 대한민국이 '피 부족 국가'로 진입한다. 10·20 수혈이 지속적으로 줄어 10년 전 대비 반토막 났다. 베이비부머 세대의 피로 지금까지 버텨냈지만, 곧 임계점이라는 우울한 전망이 나온다. 당장 올해 혈액 공급이 소요량에 못미치는 위기 단계가 올 수 있다. 인구절벽과 맞물려 도래할 '혈액 절벽'은 국민 생명줄의 위기이기도 하다. 헌혈 공급을 늘리기 어렵다면 혈액 '수요'를 조절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발등의 불인 혈액 위기상황을 점검하고 대책을 모색해본다.

학생·군인도 더는 못 쥐어짜…'피 부족 국가' 위기 닥쳤다


105만8704건(2013년)→46만2186건(2022년)

10년 새 절반 이상 줄어든 이 수치는 16~19세 고등학생의 헌혈 건수다. 고등학생들은 2013년 우리나라 전체 헌혈 실적의 36%를 담당했다. 10년이 지난 지금 약 17%로 줄었다. 대한민국 혈액 공급 삼 분의 일을 책임지던 기둥이 무너져 내리고 있다. 저출생으로 인한 인구 절벽이 곧 '혈액 절벽'까지 불러올 것은 자명하다.

피 뽑을 사람이 점점 줄어든다. 캠페인을 통해 헌혈률을 올리는 방법으론 혈액 절벽을 막을 순 없다. 혈액 '공급' 관리를 넘어 '수요'에서 근본적인 대책이 마련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무분별한 수혈로 인한 혈액 낭비를 막는 등 의료현장에서의 변화가 필요하다. 아직 의료현장에 뿌리내리지 못한 '환자혈액관리' 개념의 정착을 서둘러야 한다. 수혈 의존을 줄일 약제 사용의 확대와 헌혈을 대체할 인공 혈액 개발 등 다양한 대안도 활발하게 모색되고 있다.

◆학생·군인 혈액 짜내던 대한민국… 이제 더는 어렵다

"막말로 대한민국 헌혈 정책은 60만 군인의 피 쥐어짜 내는 것 아닙니까."

김태엽 대한환자혈액관리학회 회장(건국대병원 마취통증의학과 교수)는 우리나라 헌혈 실태를 이렇게 지적했다. 그의 지적대로 10~20대 젊은 층은 한때 대한민국 혈액 공급의 80%를 담당했었다.

2013년 16~19세(10대)의 헌혈 실적은 105만8704건이었다. 그해 전체 헌혈 실적의 36.3%를 차지했다. 20~29세(20대) 헌혈 실적은 같은 해 123만1995건으로 42.3% 비율을 차지했다.

그러나 이들 연령대 헌혈 실적은 10년 새 꾸준하게 줄었다. 특히 10대의 감소 폭이 가팔랐다. 2016년 16~19세 헌혈 실적은 92만2574건을 기록해 100만건대가 깨졌다. 2018년에는 전체 헌혈 실적에서 이들 연령대가 차지하는 비중이 29.6%로 집계돼 30%대 벽이 무너졌다. 2013년부터 정확히 10년이 지난 지난해 헌혈 실적은 46만2186건(17.4%)이다. 2005년 통계 작성 시작 이후 역대 최저치다.

같은 기간 20대 헌혈실적도 지난해 97만120건을 기록, 10년 새 21% 줄었다. 20대 헌혈 실적이 차지하는 비중도 42.3%에서 36.3%로 감소했다. 젊은 층 기여가 줄면서 2013년 291만4483건이었던 전체 헌혈 실적은 2022년 264만9007건까지 감소한다.

감소한 헌혈 실적을 50~60대 고령층이 채우면서 그나마 혈액 공급을 유지할 수 있었다. 50~59세 헌혈 실적은 2013년 6만5933건(2.3%)에서 지난해 26만2920건(9.9%)으로 늘었다. 60세 이상 헌혈 실적은 같은 기간 9142건(0.3%)에서 5만820건(1.9%)으로 5배 이상 급증했다.

◆혈액수급 '심각' 우려, 해결 단서는 '환자혈액관리'

혈액 공급 부족은 앞으로 더 심각해질 전망이다. 저출생 현상으로 혈액 공급을 떠받치던 인구가 계속 줄기 때문이다. 장래 인구 추계에 따르면, 저출생·고령화로 우리나라 헌혈 가능 인구(16~69세)는 올해 3917만명에서 지속적으로 감소해 오는 2050년 2758만명(약 30% 감소)에 이를 전망이다. 반면 고령화 가속으로 의료 수요가 늘면서 적혈구제제 사용량은 증가하고 있다. 2015년 189만유닛(Unit)이었던 적혈구제제 사용량은 2019년 200만유닛으로 늘었다.

당장 올해부터 혈액 수급 '심각' 단계가 닥칠 수 있다. 대한적십자사의 헌혈 인구 추계에 따르면, 올해 헌혈 인구 수는 197만3650명으로 추산된다. 이를 통해 일평균 5407유닛 혈액이 헌혈로 공급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이는 올해 기준 일평균 혈액 소요량 예상치인 5482유닛보다 적다. 혈액 수급 위기 단계 중 '심각'(1일분 미만)에 해당하는 수치다.

김태엽 교수는 "헌혈로는 더는 혈액 공급 부족을 피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의료 현장에서의 혈액 사용량을 극적으로 줄여야 한다고 지적했다. 혈액 '공급'보다 '수요' 관리에 초점을 맞춘 정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대한민국 슬관절(무릎) 수술 수혈률은 78%다. 미국(8%)이나 호주(14%)와 비교하면 압도적으로 높다. 심장 수술 수혈률도 76~95%에 달한다. 미국에서는 29%에 불과하다.

수술 시 얼마나 혈액이 사용되는지, 수혈을 피하기 위한 사전 조치는 취해졌는지, 부적절한 수혈 관행이 이뤄지는지 평가·감시하는 체계의 도입은 진작에 논의됐다. 이 모든 걸 아우르는 개념이 '환자혈액관리'(Patient Blood Management·PBM)다.

PBM 개념은 2019년 혈액관리법 개정으로 의료기관에 '수혈관리위원회' 설치가 의무화되면서 국내에 도입됐다. 그러나 여전히 일선 의료 현장에서는 PBM이 제대로 정착하지 않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김 교수는 "수혈관리위원회가 혈액 공급이나 폐기율 관리에만 신경 쓴다. 적정한 혈액 사용 감시에는 소홀하다"며 "PBM 설립 취지와 목적에 맞게 수혈관리위원회 이름을 '환자혈액관리위원회'로 바꾸고, 의료 현장에서 혈액 사용과 관련한 세분화된 자료를 정부가 확보해야 한다"고 말했다.

◆인공 혈액·신약 사용 확대… 혈액 절벽 막아줄 대안들

혈액 절벽을 막기 위해 다양한 장·단기적 대안이 제시된다. 의료 현장에서 수혈 빈도를 줄여줄 약제의 환자 접근성을 개선하는 게 대표적으로 거론된다.

빈혈 환자가 수술 전 고용량 철분제나 스스로 적혈구를 만들게 하는 조혈제를 맞으면 수혈을 피할 수 있다. 하지만 이들 약제는 건강보험 적용이 아직 안 되거나, 실제 의료현장에서 사용 시 수가가 삭감되는 이슈가 있다. 의료진이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싶어도 사용하기 어려운 환경이다.

이정재 순천향대병원 병원장은 "정맥 철분제가 건강보험 적용이 안 돼 환자 부담이 너무 크다'며 "조혈제 사용도 수혈을 대체하기에는 가격이 비싸다. 혈액 한 팩이 보험 적용으로 8만원이 채 안 되는데 조혈제 주사를 한 번 맞으면 15만~30만원이다. 환자 입장에서도 차라리 수혈하는 게 부담이 적고, 의료진도 쉽게 수혈을 선택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혈액암 환자의 수혈을 줄이는 신약 '레블로질'도 대안으로 언급된다. 레블로질은 골수이형성증후군(MDS) 치료제로 지난해 국내 허가를 받은 뒤 지난달에야 출시됐다. MDS 환자는 3~4주 간격마다 수시로 수혈받아야 하는데 이 때문에 삶의 질 저하가 크다. 6~7년째 지속적으로 수혈받는 환자도 있다. 레블로질은 환자의 수혈 빈도를 줄일 수 있어 출시 전부터 주목받았지만 현재 건강보험 미적용으로 널리 사용되지 못하고 있다.

장기적인 대안으로는 '인공혈액' 연구·개발(R&D)이 있다. 정부는 올해부터 2027년까지 471억원을 들여 '세포 기반 인공혈액' 기술 개발에 나선다. 2032년부터 인공 적혈구·혈소판제제를 대량 생산하는 체제를 구축한다. 2037년에는 인공혈액을 실제로 사용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살고 싶으면 피 구해오라니 참 잔인하다"…'지정헌혈' 암환자 피눈물


#A씨의 어머니는 지난해 1월 급성골수성백혈병을 진단받았다. 그해 2월 혈액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병원은 혈소판과 전혈을 지정헌혈로 구해오라고 했다. A씨는 지인 40명에게 연락해 겨우 피를 구했지만 전혈만 받고 혈소판이 없어 다시 지정헌혈자를 구해야 했다. 헌혈자에게 감사 표시로 5000원~1만원 커피 쿠폰을 보내니 어느덧 10만원이나 넘게 썼다.

A씨는 "지정헌혈을 요청하며 구하러 다닐 때마다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 가는 건 경험해 본 사람만이 알 것"이라며 "백혈병 투병으로 심리적·금전적인 어려움을 겪는 환자 가족의 입장에서 지정헌혈을 찾으러 다닐 때 심리적인 괴로움과 그 이후 사례로 인한 금전적인 부담이 따를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혈액 절벽의 가장 큰 피해자는 혈액암 환자와 그 가족이다. 혈액암 투병 중인 환자는 주로 '혈소판'이라는 특정 성분의 혈액을 수혈받다. 혈소판을 구하기 위해 환자가 직접 수혈자를 지정하는 '지정헌혈'이 4년간 7배나 증가했다. 병원에서 일러준 기한 내 헌혈자를 찾지 못하면 환자는 사망할 수도 있다. 심리적 고통에 허덕이는 환자와 그 가족은 지금도 인터넷과 SNS에서 "지정헌혈을 구한다"는 간절한 호소를 남긴다.
지정헌혈 4년간 7.3배 증가… 2007년 사라진 후 부활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최혜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보건복지부로부터 제출받은 헌혈 현황에 따르면, 지정헌혈량은 2018년 1만9344유닛(Unit)에서 2021년 14만2355유닛으로 4년간 7.3배 늘었다. 같은 기간 일반헌혈량은 285만7115유닛에서 246만279유닛으로 해마다 꾸준하게 감소했다.

지정헌혈이란 의료기관이 환자나 보호자에게 직접 수술에 필요한 혈액을 구해오라고 요청해 지정된 지원자에게서 헌혈을 받는 것이다. 혈액암 환자는 항암치료와 조혈모세포 이식을 받는데 이때 혈소판 수치가 떨어져 심각한 출혈 위험을 겪는다. 혈소판 수혈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환자는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

혈소판제제는 채혈하는 데 1시간 30분이나 걸리는 데다가 유효기간도 5일밖에 안 돼 많은 양을 구비하기가 힘들다. 보유한 혈소판제제가 부족하니 병원이 환자와 가족에게 직접 구해오라고 시키는 것이다. 일부 병원은 자신들이 보유한 혈액량을 아끼기 위해 환자에게 지정헌혈을 권장하기도 한다.

백혈병 환자의 지정헌혈 관행은 2007년 '혈소판 사전예약제'가 도입된 이후 한동안 사라졌었다. 당시 환자 단체가 "백혈병 환자가 직접 피를 구하지 않게 해 달라"고 14일간 농성한 끝에 이룬 성과였다. 그러나 15년 전 사라졌던 지정헌혈 관행이 최근 헌혈량 감소로 최근 부활하게 됐다.

"살고 싶으면 피 구해오라니 참 잔인하다"

혈소판 성분헌혈 현황에 따르면, 2018년 지정헌혈로 공급된 혈소판제제는 4437유닛이다. 전체 혈소판 성분헌혈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1.9%에 불과했다. 그러나 지정헌혈이 차지하는 비율이 점차 늘더니 2021년에는 3만711유닛에 달했다. 그해 공급된 혈소판 성분 헌혈(23만1739유닛)의 11.7%가 환자가 직접 뛰어다니며 구한 지정헌혈자에게서 나왔다.

지난해 국정감사에 출석해 지정헌혈의 어려움을 토로했던 백혈병 환자 장연호(21) 씨는 "투병할 당시에도 22살 소방관을 꿈꾸던 환자 한 분이 혈소판 수혈을 기다리다가 뇌출혈로 돌아가신 적이 있었다"며 "또한 조혈모세포 이식을 받으면서 죽음과 싸우는 17살 소년이 저에게까지 연락해 지정헌혈을 알아봐 달라고 부탁하는 일이 있었다"고 말했다.

장 씨는 "(조혈모세포)이식 치료를 받으면서 아무것도 먹지 못했음에도 계속 구토가 나와 피를 토한 적도 있었다"며 "매일마다 다른 부작용에 시달리며 휴대폰을 잠깐 보는 것도 어려웠었는데 이런 환자에게 '살고 싶으면 네가 가서 피를 구해 와' 하는 꼴이라니, 참 잔인하지 않느냐"고 따졌다.

◆채혈장비 확대·확보 시급… 혈소판제제 규격 다양화도 방안


혈소판 지정헌혈 문제를 해결할 방안으로 △성분채혈 혈소판 채혈장비 신규 설치 △헌혈의집·카페 운영시간 연장 △혈소판 성분헌혈 참여 권유 등이 있다.

특히 채혈장비 확보가 중요하게 거론된다. 혈소판 성분헌혈을 위해서는 그에 맞는 채혈장비가 필요하다. 이를 갖추지 못하거나 장비가 부족해 수요만큼 채혈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다. 지난해 기준 전국 170개 헌혈의집·헌혈카페에서 성분채혈 혈소판 채혈장비가 설치된 곳은 141개다. 29개 기관에서는 혈소판을 채혈할 장비를 아직도 갖추지 못했다.

한국백혈병환우회는 "채혈장비가 설치돼 있지 않은 29개 헌혈의집·헌혈카페에 채혈장비를 1대씩 29대를 설치하고, 채혈장비 1대당 하루 혈소판 성분헌혈을 3건만 해도 혈소판 지정헌혈은 필요하지 않다"며 "이는 정부의 재정 투입으로 신속한 해결이 가능한 방안이다"고 강조했다.

또 다른 방안은 혈소판 함량 규격을 다양화하는 것이다. 현재 혈소판제제 공급 기준은 한 단위당 3x10¹¹개의 혈소판을 함유해야 한다. 해당 기준에 살짝 미치지 못한 혈소판제제라도 응급 수술에서는 사용할 수 있다는 의견이 있다. 또한 이 기준을 채우기 위해 채혈 시간이 과도하게 길어지거나 연장돼 헌혈자 부담이 가중된다는 단점도 있다.

김태엽 대한환자혈액관리학회 회장(건국대병원 마취통증의학과 교수)는 " 외국처럼 성분채혈 혈소판이 다양한 함유량 규격으로 공급된다면 혈소판 공급도 더 원활해지고 적응증에 따른 적정 선택 사용도 가능하다"며 "일부에서는 이런 제품을 '함량 미달'이나 '불량품'으로 간주해 터부시하는 경향도 있지만, 60% 혈소판 함량도 정말 급할 때는 사용할 수 있다. 수술 시 당장 피가 없을 때는 그런 제품이라도 받고 싶다"고 말했다.

이창섭 기자 thrivingfire21@mt.co.kr

Copyright © 머니투데이 & mt.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이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