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에게 ‘작품 수정하라’는 독자의 탄생, ‘PC’인가 ‘검열’인가
이미 고인이 된 작가의 문학작품이 수정되고 있다. 지난 3월 영국 일간지 〈텔레그래프〉에 따르면, 영미권 최대 출판 그룹인 하퍼콜린스가 1920년에서 1976년 사이 발표된 애거사 크리스티의 작품 일부 표현을 삭제하거나 수정했다. 이제 독자들은 명탐정 ‘에르퀼 푸아로’와 ‘미스 마플’ 시리즈 일부 개정판에서 원작과 달라진 표현을 접하게 된다. 수정 대상은 ‘현대 독자들이 불쾌감을 느낄 수 있는 표현’이다. 주로 인종차별적 표현이 이에 해당한다.
대표적으로 여성 캐릭터의 상반신을 ‘검은 대리석’에 빗댄 표현이나 흑인을 비하하는 용어(N-word)를 지웠다. 1964년에 발표된 〈카리브해의 미스터리〉에서 미소짓는 호텔 직원의 치아에 대해 '사랑스러운 하얀 치아'라고 표현한 부분도 삭제했다. 성난 인도인 판사를 가리켜 ‘인도인의 기질’이라 칭한 부분을 ‘그의 기질’로 바꾸었고 '원주민'이라는 단어도 '현지인'이라는 단어로 대체했다. 부정적인 뉘앙스로 유대인을 지칭했던 부분을 수정하고 ‘집시’라는 표현도 뺐다.
영국 소설가 로알드 달의 작품에 대한 수정 논란이 인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지난 2월 영국 출판사 퍼핀과 로알드 달의 유산을 관리하는 ‘로알드 달 스토리컴퍼니’가 로알드 달의 작품에서 외모나 체격, 인종 등 편견을 가진 표현 수백 군데를 수정한 사실이 알려졌다. 〈찰리와 초콜릿 공장〉에 등장하는 인물에 대한 묘사 중 '뚱뚱한’을 '거대한'이라는 표현으로 바꾼 게 대표적이다. 〈더 트위츠〉에서 ‘못생기고 끔찍한’이라는 인물 묘사 중 ‘못생긴’이란 단어를 삭제했다. 소인족 움파룸파를 수식하는 형용사는 ‘아주 작은(tiny)’에서 ‘작은(small)’으로 바뀌었다. 또한 이언 플레밍 출판사는 007 시리즈 첫 작품인 〈카지노 로열〉 출간 70주년을 맞아 시리즈의 개정판을 출간하며 인종차별적 표현을 삭제하거나 수정한다고 밝혔다. 수정은 아니지만 최근 소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도입부에 출판사의 경고 문구가 실렸다. '인종차별적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는 내용이다.
잇단 원작의 수정을 두고 비판이 일었다. 먼저 작가들이 나섰다. 작품에서 이슬람 창시자를 불경스럽게 다뤘다는 이유로 암살 위협에 시달리다 피습되었던 영국 작가 살만 루슈디는 SNS에 "로알드 달이 천사는 아니었지만 이것은 터무니없는 검열이다"라는 글을 올렸다. 판타지 소설을 써온 영국 작가 필립 풀먼 역시 언론 인터뷰에서 “저자의 동의 없이 (원작을) 변경하는 것보다 절판이 낫다”라고 말했다. 영국 총리까지 비판에 가세하며 논란이 커지자 퍼핀은 '개정 버전'과 '원작 버전' 두 가지를 같이 출간하기로 했다.
시대의 감수성에 맞게 원작을 수정하려는 흐름을 두고 표현의 자유를 강조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비영리단체 ‘펜 아메리카’의 수잰 노셀 대표는 “여러분과 다른 성향이나 이념을 가진 사람이 펜을 들고 (단어를) 지우기 시작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생각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지금 기준으로 수용하기 어려운 표현들이 빚어내는 의외의 효과를 환기시키는 목소리도 있다. 캐나다 일간지 〈내셔널 포스트〉의 바버라 케이 칼럼니스트는 1936년에 발표된 애거사 크리스티의 푸아로 시리즈에서 한 등장인물이 “나는 흑인 얼굴이라도 절대 잊지 못한다”라고 한 말을 예로 들었다. “이 말은 분명 인종차별적이지만, 백인이 아닌 사람을 ‘보이지 않는 존재’로 여겼던 제국주의적 사고방식과 사회적 분열을 잘 보여준다. 크리스티의 책을 당시의 편견에 대한 시금석으로 삼아 우리가 그 암울한 시대에서 얼마나 멀리 왔는지 보여주는 것이 훨씬 낫지 않을까?”
새로운 세대의 독자에게 닿으려면
차별적 표현으로 논란이 되었던 고전은 예전부터 있었다. 미국 근대문학을 상징하는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이 대표적이다. 노예제가 시행되던 1830~1840년대를 그린 소설이고 흑인 비하 표현이 200번 넘게 쓰였다고 알려져 있다. 2015년 미국 일부 고등학교에서는 이 작품을 수업에서 다루지 않겠다고 결정하기도 했다. 역시 마크 트웨인의 소설 〈톰 소여의 모험〉을 번역한 송경아 번역가는 번역 당시의 경험을 인상적으로 기억한다. 악역으로 나오는 ‘인디언 조’가 왜 하필 ‘인디언’ 조일까 의아했다. “당시에는 (차별적 표현 논란이) 수면으로 떠오르는 이슈가 아니라 원작 그대로 번역했지만 문제라고 생각했던 표현 중 하나다. 배경이 된 시대의 인종적 편견이 그대로 드러난 인물 조형이었던 것 같다.”
그는 이번에 수정된 애거사 크리스티의 〈카리브해의 미스터리〉를 번역하기도 했다. “오래전 번역이라 기억이 잘 나진 않지만 원작자가 읽는 사람의 마음에 상처가 줄 의도가 아니었다면 시대에 맞게 수정하는 게 맞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당시에는 의도가 없는 표현이었을지 모르지만 상처받는 독자들이 있다. 특히 애거사 크리스티는 대중과 함께 호흡한 대표적 작가다. 작품의 생명력을 계속해서 갖고 가는 데 방해가 되는 표현을 고치는 것 정도는 고인도 양해하지 않을까. 게다가 원작에는 언제든 접근할 수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작가의 후손들은 원작자의 의도를 보존하면서도 작품이 계속해서 반향을 일으키고 독자와 만날 수 있는 방법을 고심한다. 애거사 크리스티 재단의 회장이자 작가의 증손자인 제임스 프리처드는 언론 인터뷰에서 “새로운 독자가 시장에 등장했고 이들은 전통적인 책 독자가 아닐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조금 더 많은 수정이 이루어졌다”라고 말했다. 또 ‘사후 개정판’의 가치에 대해 언급하기도 했다. 크리스티의 작품 〈열 명의 흑인 소년〉은 노골적인 흑인 비하 표현 때문에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로 바뀌었다. 프리처드는 제목에 변화를 주지 않았다면 출판이 불가능했을 거라고 확신했다.
SF 작가 어설라 르 귄의 아들 테오 다운스 르 귄 역시 지난 3월 미국의 문학 사이트 ‘리터러리 허브’ 기고글에서 후손으로서의 고민을 전했다. 그는 어머니 어설라 르 귄이 어린이를 위해 쓴 ‘캣윙스’ 시리즈의 수정을 허락해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절름발이, 바보’ 등의 표현이 문제였다. 그는 자신의 역할이 어머니의 작품을 새로운 세대의 독자에게 전달하는 것이지 수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 때문에 처음에는 부정적이었다. “어머니가 내게 단서를 남겼다. 책상에 남긴 메모를 통해서였다. ‘사실인가? 꼭 필요한 일인가, 아니면 최소한 유용한 일인가? 자비로운가, 아니면 최소한 해롭지 않은가’ 이렇게 적힌 메모를 보고 바꾸는 쪽으로 방향을 잡고 원래 의미의 완급을 유지할 수 있는 대체어를 찾았다.”
원작 수정을 검토한다는 건 그만큼 현 시대에도 소구력 있는 작품이라는 의미다. 애거사 크리스티는 1976년 사망했지만 〈오리엔트 특급 살인〉 〈나일강의 죽음〉 등은 최근까지도 규모 있는 영화로 제작되고 있다. 넷플릭스는 2021년 로알드 달 스토리컴퍼니를 인수한 뒤 ‘로알드 달의 뮤지컬 마틸다’를 공개하기도 했다. 변정수 출판평론가는 “어쨌든 해당 작품의 독자가 꾸준히 있다는 뜻이다. 원작 수정이 옛날에는 없었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 〈걸리버 여행기〉가 동화 형태의 다이제스트로 나왔듯이 원전도 시대 상황에 맞게 계속해서 변형되어왔다”라고 말했다.
‘감수성 독자’의 출현이 미친 영향
누군가에겐 원작 수정이 검열이지만 또 누군가에겐 환영할 만한 ‘업데이트’ 과정이다. 특히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PC)에 대한 첨예한 논쟁 속에 최근 출판계에 등장한 ‘감수성 독자(sensitivity readers, 이야기 검수자)’는 후자의 분위기를 반영한다. 〈가디언〉에 따르면, 감수성 독자는 최근 몇 년 동안 뜨거운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들은 책이 출간되기 전 내용을 검토해 불쾌하거나 부정확한 표현을 거르는 일을 한다. 주로 출판사나 작가들이 고용하는 프리랜서 형태의 편집자다. 예를 들어, 저자가 흑인 헤어스타일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에 대해 부정확한 설명을 썼을 경우 피드백을 주면 저자가 이를 참고해 수정 여부를 결정한다. 작품의 포용성과 접근성을 높이기 위한 목적일 수도 있지만 책 출간 이후 부적절한 표현 때문에 논란의 중심에 서는 걸 예방하는 효과도 있다.
이번 사안은 대중문화계 'PC 논쟁'의 연장선에 놓여 있기도 하다. 디즈니가 인어공주 역에 흑인 배우를 캐스팅하면서 PC주의를 지나치게 의식했다는 비판을 받았듯 고인이 된 작가의 작품을 현대적 기준에 맞게 수정한 데 대해 과도하다는 반응이 나온다. 작가와 독자의 관계가 재설정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미디어문화를 연구해온 한송희 세종대학교 문화산업경영융합전공 초빙교수는 문화예술에 대한 PC의 요구 기저에는 '작가(문화 생산자)'와 '독자(문화 수용자)'라는 개념 사이의 충돌이 있다고 설명했다. “그간의 이론이나 비평은 작가를 특권적인 존재로 여겨왔다. 위대한 작품을 세상에 내놓은 '아버지'로 작가를 상상해왔다. 그렇게 되면 작가는 언제나 작품에 선행하는 존재이고, 작품은 작가의 종속물이 되어버린다. 그런데 PC에 대한 요구는 작가라는 존재를 흐릿하게 만들면서 독자의 탄생을 조명한다. '작가가 어떤 생각으로 그런 표현을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텍스트에는 이런 게 있고 나는 그게 불편해. 그건 나를 해하는 표현이니까'라는 식으로 자신의 감각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어떤 식으로든 책임을 지라는 적극적인 요청인 셈이다.”
과거의 모든 작품을 현대적 기준에 맞춰 재단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낡은 관습을 덮어두고 수용하기도 곤란하다. 질문은 남는다. “문화예술에 대한 평가가 '동시대성'을 누락한 '낡은 기준'에 근거하여 이뤄진다면 과연 그런 평가가 어떤 의미가 있는가?” 다만 한송희 교수는 PC에 대한 요구가 구체적인 행위로 이어질 때 그게 이전의 잘못을 '지우는' 방식으로 이뤄지는 게 건설적인 대안인지 의문을 던진다. “'뚱뚱한(fat)'이라는 단어를 '거대한(enormous)'으로 고치고, 인종차별을 떠올리게 하는 '검은(black)' '하얀(white)' 등의 수식어를 지우고, 주인공이 즐겨 읽는 책을 남성 작가의 책에서 여성 작가의 책으로 바꾸는 게 '올바름'을 추구하는 행위라고 볼 수 있을까? 도리어 인류의 역사가 숱한 차별과 억압으로 이뤄졌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여전히 현실에 뿌리 깊게 박혀 있는 혐오를 '없는 일'로 치부해버리는 하나의 표백 행위이지는 않을까?”
국내 작가들의 경우 개정판을 낼 때 더러 혐오 표현을 손보기는 하지만 눈에 띄는 수준은 아니다. 세계문학전집을 내는 민음사의 경우 번역 문구를 다듬는다. 민음사 관계자는 “1990년대 출간된 작품 중 그 시기 통용되던 한국어 어휘 중 차별적인 표현들이 있다. 번역을 손보면서 시대착오적인 부분을 수정했다. 남자 등장인물이 평어를 쓸 때 여자는 경어를 쓴다든지, 작품 해설에서 사용하는 ‘처녀작’이라는 표현이 그 예다”라고 말했다. 제임스 프리처드의 말처럼 독자도, 시대도 달라졌다. 그 눈높이를 맞추기 위한 작가와 출판사의 노력도 각별해질 수밖에 없다.
임지영 기자 tot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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