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두리 바깥의 세상, 호주 뉴사우스웨일스주
시드니란 테두리를 벗어나니 대지가 열렸다.
새로운 경험의 땅, 호주 뉴사우스웨일스주를 탐험했다.
●여행의 역행
도전과 안주. 정반대의 두 단어는 여행 안에서 이상하리만치 공존했다. 가슴에 모험을 품고 비행기에 올라도, '인기 스폿'이 주는 안락함에 편승하곤 했으니. 랜드마크, 리뷰 많은 맛집, 별점 높은 카페 안에서 느끼는 안도감. 틀을 깨려 했지만 또다시 틀에 갇히게 되는 아이러니. 습관처럼 반복해 오던 여행이었다.
호주 여행은 시드니로 통하는 줄만 알았던 날들이 있었다. 시드니는 뉴사우스웨일스주의 주도, 호주 최초이자 최대도시, 그러니까 가장 보편적이고 안전한 선택지였으니까. 그러나 뉴사우스웨일스주에 시드니가 있을 순 있어도, 시드니가 뉴사우스웨일스주일 순 없었다. 그러기에 이 땅은 너무 크고, 넓고, 나이가 많았다. 시드니 바깥이 궁금해졌다.
호주 대륙에서 4시 방향, 뉴사우스웨일스주가 있다. 1770년대 초, 탐험가 제임스 쿡이 호주 동해안을 따라 항해하다 발견한 곳이자 호주 인구의 약 32%가 거주하는 땅. 도로를 달리면 창밖으로 숲이 바다처럼 흐르고 바다는 숲처럼 푸르다. 해안, 산맥, 평야, 사막 등 지형이 하도 다양해 게임으로 치면 온갖 재밌는 맵들을 한곳에 몰아넣은 수준. 카약을 타거나 서핑을 하거나. 아니면 뜻밖의 야생동물과 조우하거나. 체크해 나갈 퀘스트가 끝이 없다.
선크림과 수영복을 배낭에 욱여넣고 차에 올랐다. 편견은 경험에 의해 깨진다. 시드니란 울타리를 벗어나 모험할 시간. 관성을 거스르기로 했다. 여행의 역행이었다.
●Symbio Wildlife Park
와일드한 대륙의 숨결
귀여운 녀석인 줄만 알았는데, 가까이서 보니 눈빛이 터프하다. '누구세요?'보다 '거, 누구쇼?' 할 것 같은 느낌. 심비오 야생 공원(Symbio Wildlife Park)의 코알라는 잠에서 막 깼는지 부숭부숭한 얼굴이었다. 통성명 대신 그의 등에 손을 얹었다. 두 눈이 끔벅였다.
호주란 나라는 어딘가 와일드한 분위기가 있다. 내륙으로 갈수록 더 터프해진다. 남한 면적의 10배가 넘는, 국토의 약 40%를 차지하는 거대한 사막 지역 때문일까. 땅 전체가 '거 누구쇼'의 느낌을 풍긴다(억양도 좀 그렇다). 실로 오랜 세월 고립된 대륙이기도 했다. 뭐, 최근에 약 4,000년 전 인도에서 호주로 대규모 이주가 이뤄진 증거가 발견되면서 고립 기간에 대한 의견이 분분해지긴 했지만. 확실한 건 호주는 과거 타지역에 비해 인류의 발자취가 상대적으로 적었단 사실이다.
지구 끄트머리 같은 곳이니 구대륙 각국 간의 의도나 항쟁에 휩쓸리지도 않고, 거의 무풍지대에서 세월을 보냈다. 덕분에 오리너구리, 쿼카, 에뮤 등 온갖 특이한 생물 종이 독자적인 진화를 거듭하며 이 땅에서 살아왔다. 어른 주먹만 한 타란튤라가 베개 위로 뚝 떨어진다거나, 길가에서 우락부락한 몸짱 캥거루와 맞짱(?)을 뜬다거나 하는 기묘한 일화들도 전부 메이드 인 오스트레일리아다. 호주에 오래 살면 다들 점점 기묘해지는 걸까? 하여튼 '세계에서 가장 큰'의 수식어를 단 벌레나 동물 같은 것들이 우글거리는 땅이다.
아주 날것의 야생을 경험하려면 어디 아웃백(Outback, 호주 일대의 황무지) 한가운데서 오프로드 차로 질주라도 해야 할 텐데. 시간도, 면허도 없는 여행자는 심비오 야생 공원을 대안으로 삼는다. 치타, 태즈메이니아 데블 등 호주에서만 볼 수 있는 야생동물들이 지천이다.
프로그램도 여러 가지인데, 단연 캥거루 먹이 주기 체험이 인기다. 사료를 손에 쥐고 있으면 캥거루 떼가 오픈런하듯 줄을 선다. 다행히 식스팩 있는 녀석들은 아니고, 아기캥거루 또는 왈라비들이 대부분이다. 귀가 뾰족하고 뒷다리가 굵으면 캥거루, 동그란 귀에 키가 1m 이하로 작으면 왈라비라는데. 구분하긴 어렵고, 둘 다 몸집이 너무 자란 성격 좋은 쥐 같다.
캥거루의 축축한 혀가 손바닥에 들락날락한다. 콧김이 뜨끈하다. 와일드한 대륙의 숨결이 얌전한 형태로 축소되어 손안에 내려앉은 기분. 아주 오래전부터 네가 이 땅의 주인이었겠구나. 와삭와삭 사료 씹는 소리가 이어지는 동안, 잠시나마 대륙의 숨소리를 들은 듯했다.
●Jervis Bay Kayaking
저비스 베이였기에
기우뚱하는 순간 끝장이다. 목숨과도 같은 카메라를 품에 안고 카약에 올라탔을 때 든 생각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간도 크다 싶은데, 당시엔 차마 놓을 수 없었다. 눈앞의 풍경을 보면 누구라도 리스크를 감수할 용기가 생긴다. 다른 곳도 아닌, 저비스 베이(Jervis Bay)였기에.
저비스 베이는 발에 채는 게 해변인 뉴사우스웨일스주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해변 지역으로 손꼽히는 곳이다. 신이 단 하나의 만(bay)만 편애해서 각별히 신경 써 빚었다면 이런 곳이 아닐까. 투명한 물에 소금처럼 흰 모래사장. 비행하는 갈매기와 새하얀 여름 구름. '해변'이란 단어를 들으면 떠오르는 모든 요소를 다 가지고 있다. 베이 내부는 더없이 잔잔하다. 바다가 육지 쪽으로 들어와 있는 지형이라 바람이 거의 불지 않고 파도도 작다. 부상의 위험 없이 스쿠버 다이빙, 제트 스키, 요트 등 각종 수상 스포츠를 축복처럼 누릴 수 있단 얘기. 이곳 주민들에게 바다는 앞마당이다. 서핑은 걷는 것만큼 익숙하고, 카약을 자전거 타듯 탄다. 물론 한낱 관광객의 패들링 속도는 걸음마 뗀 아기보다 느리다.
요령 없는 팔은 욱신대는데, 배는 오뚝이가 됐다. 흔들거릴 뿐 나아가질 않는다. 손목이 한결 편안해진 건 패들을 꼭 물에 깊숙이 넣을 필요가 없다는 걸 알게 됐을 무렵부터였다. 배는 천천히 강을 지나 맹그로브 숲속으로 향했다. 이 뒤에 '발아래에선 가오리가 헤엄쳤고…,' 따위의 문장이 나오면 소설 같겠지만, 진짜였다. 저비스 베이는 국가 보호 구역으로 호주 정부에 의해 관리되고 있다. 개발이 제한돼 바닷물이 오염되지 않아 해양 생물들의 서식지로도 유명하다. 오직 가오리를 보기 위해 베이를 오는 사람들도 많다고. 물론 야생의 삶에 인간의 욕심이 반영될 리는 없다. 보고 싶다고 해서 볼 수 있는 건 아니고, 주로 얕은 바닷물에서 약간의 운이 첨가되면 볼 수 있다. 운 좋게 운이 따랐다.
그리하여 '발아래에선 가오리가 헤엄쳤고', 머리 위론 미풍이 불었다. 이런 날 카약에 몸을 맡기고 둥둥 떠 있으니, 어쩐지 메마른 땅에 서서히 물이 스며드는 기분이었다. 간만의 평화였다. 물론 진짜로 (배 안에) 물이 스며들고 있었다면 곤란했겠지만.
●Dolphin Cruise
돌고래가 행복한 나라에서
어느 맑은 토요일 오후. 저비스 베이 돌고래 크루즈 탑승객들은 걱정하기 시작했다. '목 빠지게 기다린다'는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이러다 진짜 목이 빠지겠군 싶을 정도로 몇십 분째 고개를 빼고 두리번거리던 중이었다. 최악의 상황이라 해 봤자 돌고래를 한 마리도 못 보고 돌아간다는 것뿐이지만, 그래도 '돌고래 크루즈'에서 돌고래가 빠진다면 대체 뭐가…. 그때, 난간에서 한 꼬마가 소리쳤다. "여기, 아래 좀 봐요!" 갑판 밑이 어둡다 했나. 먼 곳에만 머물던 시선들이 일제히 아래로 떨어졌다. 반짝이는 지느러미와 미끈한 회색 등. 반질반질한 머리. 돌고래였다.
이제 와 말하지만, 사실 저비스 베이 크루즈에서 돌고래를 못 볼 확률은 극히 낮다. 저비스 베이는 돌고래들의 먹이 맛집이다. 식물성 플랑크톤부터 오징어, 넙치, 해조류 등 먹을 게 끓어 넘친다. 바닷물의 수온과 염분 농도도 적절하고, 수심이 얕아 상어와 같은 포식자도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거대돌고래, 호주흰돌고래, 반달가슴돌고래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돌고래들이 이곳 바다를 놀이터 삼아 뛰놀 수 있는 이유.
여기서 잠시 샛길로 빠지자면, 호주는 동물애호가들의 나라다. 호주의 반려동물 수는 약 2,900만 마리로 호주 전체 인구수보다 많고, 정부 차원에서도 고도로 발달된 동물복지법을 시행한다. 오죽하면 새우를 고통스럽게 죽이지 않게 하는 법이 있을 정도. 농담 같지만 그들은 진지하다. 일부 지역에선 복주머니형 어항 사용도 금지돼 있다. 둥글게 생긴 어항은 물과 공기가 차단되는 구조라 물고기의 정신건강에 좋지 않다나.
새우 한 마리의 고통에도 마음을 쏟는 나라인데, 돌고래라고 다를까. 호주 정부 지침에 따르면, 모든 돌고래 관련 크루즈 선박은 최대 속도 6노트(약 11km/h) 이하로 유지, 돌고래와도 100m 이상 거리 두기가 필수다. 항구에서 떠날 때와 돌아올 때 모터 소음도 최소화해야 한다. 돌고래들에겐 귀가 눈이다. 그들은 쏘아 보낸 초음파가 물체에 부딪혀 돌아오는 소리를 통해 세상을 본다. 청각이 뛰어나니 약간의 소음에도 큰 스트레스를 받는다.
또 익히 알려진 대로 지능이 매우 높다. 인간으로 따지면 초등학생 수준의 아이큐. 만약 돌고래에게 인간의 손이 있었다면 바닷속에서 문명을 건설했을지도 모른다. 똑똑하니 작은 변화에도 민감하게 반응한다. 인간의 음성과 냄새, 진동조차도 섬세하게 감지할 수 있다고. 순둥한 외모지만 사실은 꽤나 '예민 보스'들이다.
그러니 멀리서 열심히 찾아볼밖에. 바다를 무대로 한 숨바꼭질이 시작됐다. 술래를 놀리는 아이처럼 돌고래는 수면 위로 불쑥 등을 보였다 사라졌다. 움직임이 빠르고 경쾌하다. 그에게 저비스 베이가 동물원이 아닌 놀이터일 수 있어 얼마나 흐뭇하던지. 진정한 행복에는 자유가 전제돼 있다고 믿는 사람으로서, 꼭꼭 숨은 돌고래를 찾아내는 동시에 그의 안녕을 진심으로 빌었다. 그날 우린 모두 행복한 술래였다.
●Mollymook Beach
몰리묵의 비치 라이프
새벽 6시. 서퍼는 눈곱만 겨우 떼고 일어나 옆구리에 보드를 끼고 마당에서 터벅터벅 걸어 나왔다. 마치 양치를 하고 면도를 하는 것처럼, 일상적인 일을 처리한다는 듯. 그를 보고 생각했다. 세상엔 '곱창순대국밥'처럼 지극히 한국적인 단어가 있는가 하면, '몰리묵 비치(Mollymook Beach)'처럼 이국에서 불어오는 바람 같은 단어도 있구나. 현관문을 열고 나서면 바로 바다인 삶이라니. 서울의 도시 라이프와 몰리묵의 비치 라이프 사이 간극이란 문 한 짝을 두고 벌어지는 것이었다.
뉴사우스웨일스주 남동쪽 해안. 2.5km의 몰리묵 비치는 서퍼들의 세상이다. 파도의 평균 높이는 1.5m에서 2m 사이. 모래 바닥이 평평하고 고르기 때문에 파도가 잘 굴러 오르는 데다, 해안선이 볼록한 형태라 파도가 여러 방향에서 충돌하면서 형성된다.
테이크오프(파도를 잡아 보드 위에 올라서는 행위)를 하기에도, 파도 라이딩을 하기에도 최적의 조건. 초보 서퍼들도 적응하기 쉬운 난이도지만, 그렇다고 심심하기만 한 해변은 결코 아니다. 때에 따라 남쪽에서부터 밀려오는 남극 해류의 영향을 받아 수십 미터에 이르는 높은 파도가 치기도 한다.
바다를 끼고 사는 사람들이 흔히 그렇듯, 이곳 주민들도 늘 머리가 약간씩 젖어 있다. 대부분은 셋 중 하나다. 서핑을 했거나, 서핑을 하고 있거나, 서핑을 할 예정이거나. 반대로 머리가 보송한 이들의 열에 아홉은 관광객이다.
수평선 너머로 해가 반쯤 떠올랐다. 눈곱을 뗀 서퍼는 패들링에 한창이다. 태양보다 붉은 그의 서핑 보드는 먼바다를 향해 있다. 적당한 파도가 올 때까지 서퍼는 기다린다.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그러면 이따금 바다는 거친 파도를 하나씩 내어 줘 서퍼의 기다림에 응답하는 것이다. 30분쯤 지났을까. 마침내 큰 물결이 다가왔다. 서퍼는 파도의 파동에 올라타 바다가 주는 곡선의 활력을 누렸다. 굴곡진 기쁨과 가라앉지 않을 감동. 테두리에서 벗어나 대지를 탐험하며 내가 찾아 헤맸던 건, 오직 그것뿐이었다.
▶하늘을 나는 캥거루, 콴타스항공
기체 꼬리에 새겨진 흰색 캥거루 마크만 봐도 알 수 있다. 콴타스항공은 호주를 대표하는 메이저 항공사다. 지난해 12월10일, 콴타스항공은 약 15년 만에 인천-시드니 직항 노선의 정기편 운항을 시작했다. 에어버스 A330 기종이 투입돼 주 4회 운항하고 있으며, 5월부터 10월까지는 주 3회 운항한다. 인천에서 10시간 반이면 비행기 창문 너머로 시드니 하버브릿지가 보인다.
글·사진 곽서희 기자
취재협조 뉴사우스웨일스주관광청, 콴타스항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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