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선수에겐 허락된 적 없는 말 “출산휴가 다녀오겠습니다”
출산·육아휴직 규정 존재하는데도
임신 7개월 구단서 ‘계약해지’ 통보
실업급여로 버티다 출산 뒤 재계약
2017년 5월, 임신테스트기에 선명하게 두 줄이 떴다. 임신 6주차라고 했다.
여자축구 국가대표 출신 수비수 황보람(36) 선수는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만 같았다. 2년 전 그라운드에서 애인에게 ‘공개 프러포즈’를 받고 결혼을 앞두고 있었지만, 임신을 마냥 기뻐할 순 없었다.
여자축구(WK)리그 2017 시즌이 한창이었던 때다. 황 선수는 당시 더블유케이리그에서 한창 상승세를 타고 있던 화천케이스포(KSPO)의 주전이자, 국가대표팀 수비수였다. “정말 막막했어요. ‘(임신중지) 수술을 해야 하나’ 생각까지 했어요.”
임신 사실 알린 직후 훈련서 제외
황 선수는 지난 8일 <한겨레>와 한 인터뷰에서 당시 상황을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아이를 낳고 그라운드로 돌아온 ‘선배’는 홍경숙 전 부탄 여자축구 감독 한 사람뿐이었다. 홍 전 감독은 ‘부상 재활’이라는 명분으로 임신·출산 기간 동안 훈련에서 빠져 있을 수 있었다. ‘선수 생활을 계속할 순 있을까’ 걱정이 앞섰다. 하지만 “꼭 낳아라, 돌아올 수 있다”는 팀 닥터와 코치의 응원에 힘입어 아이를 낳기로 결심했다.
구단에 임신 사실을 알린 뒤 바로 훈련에서 제외됐다. 동료들에게는 그저 “몸이 아파서 좀 쉬려고 한다”고만 했다. 현역 선수의 임신은 그때나 지금이나 흔치 않은 일이다. “경기에 나서는 선수들이 동요할까 봐” 숨겼지만 이따금 “왜 숨겨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에 서글펐다. 동료들이 훈련장과 경기장으로 떠난 사이, 텅 빈 숙소에 혼자 남아 자주 울었다.
임신 사실을 알린 지 두달 만인 7월께, 구단은 황 선수에게 “우선 집에 가 있으라”고 ‘통보’했다. 숙소를 떠나는 것 말고 결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주전 수비수에, 성적도 좋았다. ‘출산한 뒤 회복만 잘하면 복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애써 마음을 다스리며 짐을 쌌다. 황 선수의 복잡한 심경을 아는지, 동료들도 온 마음으로 축하하지 못하는 듯했다.
숙소를 나와 며칠 뒤, 구단 관계자로부터 전화가 왔다. ‘임신한 탓에 경기를 뛸 수 없으니, 계약을 해지하겠다’는 통보였다. 청천벽력 같았다. 계약 만료는 2018년 12월, 아직 16개월 이상 남아 있었다. ‘출산을 택한 대가로 선수 생명이 끝나는구나’ 싶었다.
그렇게 은퇴하고 싶진 않았다. “‘임신했다고 계약을 해지하는 게 맞냐’고 구단에 묻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어요.” 구단과의 관계에서 선수는 전적으로 ‘을’이었다. 복귀 가능성을 열어두기 위해서는 구단과의 관계를 나쁘게 만들 수 없었다.
임신 7개월, 계약이 해지되고 월급이 사라졌다. 실업급여를 받으며 6개월가량을 버텼다. 2018년 2월, 엄마의 불안 속에서도 건강하고 예쁜 딸이 태어났다. 구단 관계자들이 축하를 전해왔다. 하지만 여전히 ‘복귀’에 대한 확답은 주지 않았다. ‘다시는 그라운드에서 공을 찰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시간이 이어졌다.
출산했다고 그 실력이 어디 가?
“몸 만들고 있어라, 곧 테스트 하자”는 구단의 연락이 온 건, 출산한 지 5개월이 지났을 때였다. 황 선수는 같은 해 11월 구단과 재계약하며 그라운드에 복귀했다. 황 선수는 이후 2019년 여자축구 사상 처음으로 ‘엄마’ 국가대표로 선발됐다. 이후 세종스포츠토토로 이적해, 지난해 12월 더블유케이리그 시상식에서 베스트 수비수상을 받는 등 여전히 축구선수로 맹활약하고 있다.
5년여가 흐른 뒤 알게 된 건, 황 선수가 당시 구단과 계약을 해지할 필요가 없었다는 점이다. <한겨레>가 유정주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을 통해 확인한 자료에 따르면, 황 선수가 당시 소속됐던 화천케이스포뿐만 아니라 더블유케이리그 8개 팀 모두 근로기준법에 따르거나 자체적인 출산휴가 규정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황 선수는 “당시 구단으로부터 출산휴가나 육아휴직 같은 얘긴 전혀 듣지 못했다”고 말했다.
화천케이스포 쪽은 황 선수가 임신 사실을 알린 직후부터 계약 해지 때까지 두어달 동안 ‘산전 출산휴가’ 대신 ‘병가’를 쓰게 했다고 해명했다. 최대 45일인 산전 출산휴가보다 조금 더 쉴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라는 취지다. 화천케이스포 관계자는 “당시 담당자가 관련 규정을 인지하고 있었는지 정확히 기억을 하지 못한다”며 “계약 해지에 황 선수가 서운했겠지만, 구단이 이후 황 선수가 복귀할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줬다”고 말했다.
황 선수는 “선수 활동을 하면서 임신과 출산을 한다는 것 자체가 도전이다. 아무래도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선수들도 회사원들처럼 출산 뒤 충분한 휴식을 갖는다면 다시 그라운드로 돌아올 수 있다”며 “연맹이나 협회 차원에서 (제도를 제대로 실천할 수 있도록) 큰 방향을 잡아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10여 년 전 제가 은퇴했을 때랑 달라진 게 하나도 없네요.”
2010년 광저우아시안 게임 당시 국가대표 골키퍼로 동메달을 목에 건 문소리(33·에프시서울 유소년 축구교실·아현중학교) 코치는 2012년 임신과 함께 소속 팀을 떠났다. 출산휴가 같은 건 생각도 못했고, 모든 구단은 의무 합숙을 요구하던 시절이었다.
문 코치는 지난 8일 <한겨레> 인터뷰에서 “복귀하지 못한 아쉬움은 지금도 갖고 있다”고 말했다.
문 코치를 당시 가장 힘들게 했던 건 “축구선수라는 직업과 엄마라는 역할, 둘 중에 하나만 선택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는 “(의무적인) 합숙 문화도 예전에 비해 많이 없어지고, 출산 휴가 규정도 생겼다지만, (황 선수 사례에서 보듯) 여전히 출산 휴가 제도를 사용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라며 “후배 선수들이 더 좋은 환경에서 출산 뒤에도 선수생활을 계속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인터뷰 뒤 문 코치는 기자에게 사진 하나를 보내왔다. 2008년 미국 여자 축구대표팀이 국제축구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인천국제공항에 입국하는 사진이었다.
사진 속 한 선수는 아이가 탄 유아차를 끌고 있었다. 문 코치는 “지소연 선수가 영국 첼시 위민에서 뛸 때 ‘영국에는 엄마 선수들이 많다. 아이가 아프다고 하면, 훈련에 참석하지 않아도 구단에서 허락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며 “언젠가 우리 나라에서도 유럽에서처럼 경기가 끝난 뒤 선수와 자녀가 팬들에게 함께 인사하는 장면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채윤태 기자 cha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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