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의사 아닌 의료종사자 35%나 “약 처방·시술 내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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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광역시 민간 병원에서 일하는 경력 3년차 간호사 김예현(가명·26)씨는 처방전 작성을 위해 의사들만 접속하는 업무시스템에 언제든 접근이 가능하다.환자가 퇴원할 때마다 의사를 대신해 약을 처방하기 위해서다. 대개 의사가 환자에게 쓸 약 종류를 일러주면 김씨가 의약품명 및 투여 횟수가 포함된 처방전을 쓰는데, 진통제처럼 부작용 위험이 상대적으로 낮은 약은 의사 지시 없이 스스로 처방 여부를 판단한다. 이처럼 의사가 아닌 간호사가 환자들의 약을 처방하는 건 불법 의료행위다. 김씨는 10일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의사 손이 모자라 병원에서 약 처방을 나한테 시키고 있다”고 말했다.
전국 대학병원, 지방의료원, 민간 중소병원 등 의료기관 126곳에서 일하는 보건의료 종사자(의사 제외) 10명 가운데 3명은의사가 해야 할 시술이나 약 처방을 대신하고 있다는 설문조사 결과가 나왔다. 간호사 절반가량은 의사를 대신해 약 처방 등 법적 권한 없는 의료행위를 부담하고 있으며, 사무·행정 직원까지 의사 대신 상처 소독 등 간단한 시술(처치)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민주노총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보건의료노조)이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에 의뢰해 지난 1~2월 자기기입식으로 진행한 ‘보건의료노동자 실태조사’ 결과(신뢰수준 95%, 표본오차 ±0.32%포인트)를 보면, 응답자 4만5193명 가운데 78.8%(3만5611명)가 일하는 기관에 의사가 부족하다(매우 부족 25.6%, 다소 부족 53.2%)고 답했다. 특히 의사 부족으로 인해 △의사 대신 처방(매우 그렇다 11.2%, 그렇다 24.7%) △의사 대신 시술(상처 소독 등) 또는 상처 부위 보호를 위한 드레싱(매우 그렇다 7.8%, 그렇다 28.1%)을 한다는 응답자는 각각 35.9%에 달했다. 보건의료노조는 1998년부터 해마다 비슷한 조사를 해 정책 제언에 활용한다. 이번 조사엔 간호사·간호조무사와 방사선사나 임상병리사 같은 보건직, 사무·행정직 등 8개 직군이 참여했다.
병원 규모별로 보면, 사립대병원(82.8%)·국립대병원(81.2%)에서 의사가 부족하다는 응답 비율이 비교적 높았다. 직역별로는 간호직(82.6%), 사무·행정직(74.0%), 기능·운영지원직(74.0%), 간호조무직(71.9%) 순서로 의사 부족 문제를 심각하게 여겼다. 이주호 보건의료노조 정책연구원장은 “환자 중증도가 높고 병상·병동 수가 많은 대형병원일수록 의료인 부족을 심각하게 체감하고 있다. 의사 수는 늘지 않는 상태에서 최근 대형병원이 병상을 늘리는 추세”라며 “외래·입원 환자를 대면하는 시간이 가장 긴 간호사를 중심으로 업무 부담이 쏠리는 것으로 풀이된다”고 말했다.
병원의 의사 부족은 결국 환자 피해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의사가 부족해 생기는 의료기관 운영의 문제점’ 관련 질문에 응답자 73.5%가 “진료 대기시간이 길어진다”는 항목에 동의했다. ‘의사 업무가 과중해진다’(65.8%), ‘대면 진료 시간이 짧아진다’(63.2%), ‘의사 설명 시간이 부족하다’(61.3%)에 공감하는 응답자도 절반이 넘었다. 의사 한 명이 지나치게 많은 환자를 맡아 환자마다 신경 써줄 여력이 줄어든다는 얘기다.
의사가 모자라 생긴 업무 공백은 간호사·간호조무사 등 다른 보건의료인들이 부담하고 있다. 응답자의 39.7%는 “의사 업무를 대신하느라 내 업무가 늘었다”고 했다. 특히 간호사 응답자 44.9%가 의사 대신 응급 상황에서 피검사(채혈) 등 시술과 드레싱을 한다고 했으며, 43.5%는 의사 대신 처방을 한 경험이 있었다. 심지어 사무·행정직 응답자 9.7%도 “의사 대신 시술·드레싱을 한다”고 답했다.
현행 의료법상 의료행위를 할 수 있는 이는 원칙적으로 의사·치과의사·한의사뿐이다. 이들만 처방전과 진단서를 작성해 환자에게 줄 수 있다. 의사가 아닌 이가 의료행위를 하면 최대 5년 징역이나 5천만원의 벌금형을 받는다. 비용 절감을 목적으로 의사를 충분히 고용하지 않는 작은 병원에선 상처 소독 같은 간단한 처치를 원무과 직원에게 맡기기도 한다는 게 현장 의료인들의 설명이다.
불법 의료행위를 하다 사고가 나면, 의사 지시가 있었다 하더라도 법적 책임을 공동으로 지게 될 가능성이 크다. 이런 관행은 업무 부담도 가중시킨다. 응답자의 40.7%는 “내 권한과 책임을 벗어난 타 직종 업무를 수행해야 한다”고 답했다.
이번 설문조사에 참여한 40대 간호사는 “종합병원에 미치지 못하는 작은 병원에서는 원장(의사)이 고용주인 곳이 많고, 이들이 부당한 업무 지시를 해도 거부하기 어렵다”며 “일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간호사들이 환자를 돌보는 데 집중할 수 없는 환경에 실망하는 경우가 많다”고 전했다.
이런 노동 환경은 전문성을 쌓아야 할 의료인들의 이른 은퇴로도 이어진다. 간호사 74.1%, 간호조무사의 52.1%는 “최근 3개월 동안 이직을 고려한 적이 있다”고 답했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2020년 기준 간호사 면허를 가진 39만1493명 가운데 병원 안팎에서 일하는 사람은 72.8%이며 나머지 27.2%는 의료 현장을 떠났다.
천호성 기자 rieux@hani.co.kr
인구 1천명당 의사 2명뿐…“의대 증원 시급”
보건의료계 격무 관행과 잦은 이직의 배경에는 의사 등 의료인력 부족 문제가 깔려 있다. 의사 수를 늘리고, 간호사 1명당 16명가량인 환자 수를 선진국 수준인 5명으로 낮추는 방향의 법 기준을 만들자는 목소리가 나온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요양기관 현황 등을 10일 보면, 2021년 말 기준 국내 인구 1000명당 활동 의사 수(한의사 제외)는 2.1명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3.7명)의 56.8%에 그쳤다. 서울(3.4명)을 뺀 나머지 지역은 1.8명이다. 고령화로 의료 이용 빈도가 늘면서 의료 현장의 ‘의사 품귀’는 더욱 심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보건의료계는 의사 증원을 간호사 등 보건의료인 근무 여건 개선의 핵심 과제로 꼽는다. 2006년부터 올해까지 18년째 3058명으로 묶인 전국 의대 신입생 정원을 늘려, 일손 부족으로 의사 업무가 다른 직군에 떠넘겨지는 일을 줄이자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의료계에선 정부가 의사 증원 관련 논의를 대한의사협회와만 하지 말고 다른 의료 직역도 참여하는 보건의료인력정책심의위원회에서 해야 한다는 제안도 나온다.
의료기관에서 활동하는 간호사 수를 늘리는 것 역시 숙제다. 지난해 한국의 인구 1000명당 활동 간호사 수는 4.9명으로 오이시디(2020년 기준) 평균인 8.0명의 61.3%에 그쳤다. 중증 환자 비중이 비교적 큰 상급종합병원에서도 간호사 1명이 돌보는 평균 환자 수는 16.3명(2017년)으로, 일본(7.0명)·미국(5.3명)의 2∼3배에 이르렀다. 이는 간호사 업무를 과중하게 해 의료 현장을 일찍 떠나게 하는 악순환을 만든다.
실제로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이 1∼2월 간호사 조합원 3만1672명을 설문한 결과를 보면, ‘최근 3개월간 이직을 고려한 적 있다’는 응답자(2만2490명) 가운데 43.2%가 ‘열악한 근무조건, 과한 노동강도’를 가장 큰 이유로 꼽았다. 보건복지부는 지난달 ‘간호인력 지원 종합대책’을 발표하며 간호사 1명당 환자 수를 5명으로 줄이겠다는 목표를 세운 바 있다. 간호계는 환자 1명당 간호사 수를 의료법 등에 넣고, 위반 때 제재를 강화하자고 주장한다. 천호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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