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m 진압봉으로 무차별 폭행… 5·18의 상처는 아물지 않았다
이형주 기자 2023. 5. 11. 03:06
5·18 흔적 찾기〈1〉
1980년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
살상력 높은 진압봉 지급받아 사용
시위 무관한 장애인에 휘두르기도
1980년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
살상력 높은 진압봉 지급받아 사용
시위 무관한 장애인에 휘두르기도
《5·18민주화운동이 일어난 지 43년이 흘렀다. 신군부 군홧발에 짓밟혔던 광주 시민들은 항상 5월이 되면 뭔가 가슴이 얹힌 듯 답답하다. 일부에서는 “43년이 흘렀다”며 진상 규명을 소홀히 하려하지만 시민 대부분은 여전히 5월 진실 찾기가 마음속 숙제다. 평범한 시민들은 5·18의 상처가 담긴 곤봉, 군복, 면티를 소중하게 간직했다. 곤봉은 신군부의 잔혹한 폭력, 군복은 시민군의 항쟁, 면티는 5·18의 민주·세계화의 흔적이 남겨져 있다. 기록물들을 통해 5월 진상 규명 목마름과 필요성에 대해 살펴본다. 〈편집자 주〉》
5·18민주화운동 첫 번째 사망자인 김경철 씨(당시 28세)는 잔혹한 곤봉(진압봉)에 희생됐다.
계엄군은 광주에 투입되기 하루 전에 살상무기인 1m 길이 진압봉을 지급받았다. 청각장애인이던 김 씨는 1980년 5월 18일 오후 3시경 광주 동구 충장파출소 인근에서 계엄군이 휘두른 진압봉에 맞아 숨을 거뒀다.
김 씨는 딸 백일잔치가 끝난 후 처남이 전남 영암으로 귀가한다고 하자 당시 광주 동구 대인동 공용버스터미널로 배웅을 해줬다. 이후 장애인 친구 2명을 만나 충장로에서 식사를 한 뒤 충장파출소 인근을 지나다 계엄군들에게 붙잡혔다.
계엄군인 7공수여단은 이날 오전부터 충장파출소에서 5km가량 떨어진 전남대 정문에서 학생이나 시민들까지 무차별로 군홧발로 차고 곤봉으로 두들겨 패 끌고 갔다. 계엄군은 이날 오후 흩어진 학생들이 시내로 진출해 군인들의 잔혹한 진압 사실을 알리며 저항하자 금남로에 투입됐다.
계엄군들은 금남로와 충장로에서도 살육 작전을 이어갔다. 점심을 마치고 귀가하려던 김 씨는 살육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그는 광주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뒤 서울에서 7년 동안 구두를 만드는 기술을 배웠다. 광주에 내려와 양화점에서 일하다 자신의 가게도 차렸다. 1977년부터 전남청각장애자복지회에서 일을 도왔다.
김 씨는 계엄군이 붙잡자 전남청각장애자복지회원 신분증을 보여주며 미소를 건넸다. 그러자 계엄군은 “웃는다”며 진압봉으로 그를 마구 때렸다. 장애인이던 김 씨는 무자비한 폭력에도 말 한마디 하지 못했다. 뒤통수가 깨지고 오른팔, 왼쪽 어깨가 부서지고 엉덩이, 허벅지가 으깨졌다.
숨진 김 씨는 당시 광주 서구 화정동 국군통합병원 인근 사격장에 암매장됐다가 한 달 뒤 광주 북구 망월동 묘역에 안장됐다. 1997년 6월 망월동 묘역에서 국립5·18민주묘지로 이장됐다. 고인은 현재 국립5·18민주묘지 1묘역 1번으로 안장돼 있다.
어머니 임근단 씨(91)는 10일 “이장할 때 아들 유골 머리를 보니 금이 길게 나 있었다. 계엄군에게 얼마나 두들겨 맞았는지”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어 “5·18 때 자식을 잃은 5월 어머니들은 옛 망월동 묘역에 묻히는 것이 소원”이라고 강조했다.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는 조만간 5·18 사망자 인원과 사인을 공개할 예정이다. 5·18민주화운동 사망자 160여 명 가운데 상당수는 진압봉에 맞아 숨졌다. 공수부대의 첫 번째 살상무기인 진압봉은 종류가 두 가지다.
당시 7공수부대원 A 씨는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1979년 10월부터 진압을 위한 충정훈련을 받았는데 훈련에 사용된 것은 길이 50cm짜리 포졸 방망이였다”고 증언했다. 또 “매일 고된 충정훈련을 반복했는데 1980년 4월부터 간부들은 퇴근을 못 하고 사병들은 외박·휴가가 금지돼 신경이 곤두섰다”고 덧붙였다.
공수부대는 5·18 당시 광주에 투입되기 직전에 살상력이 큰 1m 길이 진압봉을 지급받았다. 이 진압봉은 국방부 지급품이 아니라 공수부대별로 각자 제작한 것이다. 진압봉은 박달나무, 포플러 나무 등으로 재질도 다른 것으로 추정된다.
A 씨는 “신군부는 1979년 10월 부산, 경남 마산 등에서 일어난 부마민주항쟁 당시 공수부대원들이 1m 길이 진압봉을 무자비하게 휘둘러 효과를 봤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이어 “진압봉으로 시민 허리 밑 부위를 가격하라고 훈련받았지만 5·18 당시 첫날부터 진압봉으로 광주 시민들 머리를 그대로 가격했다”고 설명했다.
광주 시민들은 잔혹한 진압봉에도 항쟁을 멈추지 않았고 신군부는 대검, 집단 발포, 헬기 사격 등으로 폭력 수위를 높였다. 설치예술가이자 건축가인 김현송 씨(63)는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각종 무기를 모으고 있다. 그는 2020년 5·18민주화운동기록관에 5·18 당시 계엄군이 사용한 군복, 방탄모 등 10여 점을 기증했다.
그는 현재 공수부대가 5·18 당시 썼던 50cm, 1m 길이 진압봉 5개를 비롯해 계엄군 물품 100여 점을 소장하고 있다. 5·18 당시 서울에서 대학교를 다니고 있었는데 항상 광주에 빚을 진 마음이 있어 계엄군 물품을 모으고 있다.
김 씨는 “1m 길이 진압봉 자체가 살상무기인데 5·18 당시 진압봉 끝에 못을 박은 것도 있다는 말이 나돌았다. 5월 진실을 찾는 데 작은 보탬이 되고자 계엄군 폭력 증거를 찾고 있다”고 말했다.
5·18민주화운동 첫 번째 사망자인 김경철 씨(당시 28세)는 잔혹한 곤봉(진압봉)에 희생됐다.
계엄군은 광주에 투입되기 하루 전에 살상무기인 1m 길이 진압봉을 지급받았다. 청각장애인이던 김 씨는 1980년 5월 18일 오후 3시경 광주 동구 충장파출소 인근에서 계엄군이 휘두른 진압봉에 맞아 숨을 거뒀다.
김 씨는 딸 백일잔치가 끝난 후 처남이 전남 영암으로 귀가한다고 하자 당시 광주 동구 대인동 공용버스터미널로 배웅을 해줬다. 이후 장애인 친구 2명을 만나 충장로에서 식사를 한 뒤 충장파출소 인근을 지나다 계엄군들에게 붙잡혔다.
계엄군인 7공수여단은 이날 오전부터 충장파출소에서 5km가량 떨어진 전남대 정문에서 학생이나 시민들까지 무차별로 군홧발로 차고 곤봉으로 두들겨 패 끌고 갔다. 계엄군은 이날 오후 흩어진 학생들이 시내로 진출해 군인들의 잔혹한 진압 사실을 알리며 저항하자 금남로에 투입됐다.
계엄군들은 금남로와 충장로에서도 살육 작전을 이어갔다. 점심을 마치고 귀가하려던 김 씨는 살육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그는 광주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뒤 서울에서 7년 동안 구두를 만드는 기술을 배웠다. 광주에 내려와 양화점에서 일하다 자신의 가게도 차렸다. 1977년부터 전남청각장애자복지회에서 일을 도왔다.
김 씨는 계엄군이 붙잡자 전남청각장애자복지회원 신분증을 보여주며 미소를 건넸다. 그러자 계엄군은 “웃는다”며 진압봉으로 그를 마구 때렸다. 장애인이던 김 씨는 무자비한 폭력에도 말 한마디 하지 못했다. 뒤통수가 깨지고 오른팔, 왼쪽 어깨가 부서지고 엉덩이, 허벅지가 으깨졌다.
숨진 김 씨는 당시 광주 서구 화정동 국군통합병원 인근 사격장에 암매장됐다가 한 달 뒤 광주 북구 망월동 묘역에 안장됐다. 1997년 6월 망월동 묘역에서 국립5·18민주묘지로 이장됐다. 고인은 현재 국립5·18민주묘지 1묘역 1번으로 안장돼 있다.
어머니 임근단 씨(91)는 10일 “이장할 때 아들 유골 머리를 보니 금이 길게 나 있었다. 계엄군에게 얼마나 두들겨 맞았는지”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어 “5·18 때 자식을 잃은 5월 어머니들은 옛 망월동 묘역에 묻히는 것이 소원”이라고 강조했다.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는 조만간 5·18 사망자 인원과 사인을 공개할 예정이다. 5·18민주화운동 사망자 160여 명 가운데 상당수는 진압봉에 맞아 숨졌다. 공수부대의 첫 번째 살상무기인 진압봉은 종류가 두 가지다.
당시 7공수부대원 A 씨는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1979년 10월부터 진압을 위한 충정훈련을 받았는데 훈련에 사용된 것은 길이 50cm짜리 포졸 방망이였다”고 증언했다. 또 “매일 고된 충정훈련을 반복했는데 1980년 4월부터 간부들은 퇴근을 못 하고 사병들은 외박·휴가가 금지돼 신경이 곤두섰다”고 덧붙였다.
공수부대는 5·18 당시 광주에 투입되기 직전에 살상력이 큰 1m 길이 진압봉을 지급받았다. 이 진압봉은 국방부 지급품이 아니라 공수부대별로 각자 제작한 것이다. 진압봉은 박달나무, 포플러 나무 등으로 재질도 다른 것으로 추정된다.
A 씨는 “신군부는 1979년 10월 부산, 경남 마산 등에서 일어난 부마민주항쟁 당시 공수부대원들이 1m 길이 진압봉을 무자비하게 휘둘러 효과를 봤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이어 “진압봉으로 시민 허리 밑 부위를 가격하라고 훈련받았지만 5·18 당시 첫날부터 진압봉으로 광주 시민들 머리를 그대로 가격했다”고 설명했다.
광주 시민들은 잔혹한 진압봉에도 항쟁을 멈추지 않았고 신군부는 대검, 집단 발포, 헬기 사격 등으로 폭력 수위를 높였다. 설치예술가이자 건축가인 김현송 씨(63)는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각종 무기를 모으고 있다. 그는 2020년 5·18민주화운동기록관에 5·18 당시 계엄군이 사용한 군복, 방탄모 등 10여 점을 기증했다.
그는 현재 공수부대가 5·18 당시 썼던 50cm, 1m 길이 진압봉 5개를 비롯해 계엄군 물품 100여 점을 소장하고 있다. 5·18 당시 서울에서 대학교를 다니고 있었는데 항상 광주에 빚을 진 마음이 있어 계엄군 물품을 모으고 있다.
김 씨는 “1m 길이 진압봉 자체가 살상무기인데 5·18 당시 진압봉 끝에 못을 박은 것도 있다는 말이 나돌았다. 5월 진실을 찾는 데 작은 보탬이 되고자 계엄군 폭력 증거를 찾고 있다”고 말했다.
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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