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내 의지로 어쩔 수 없는 죽음 말이다

구영기 전 생명그물 대표 2023. 5. 11.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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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영기 전 생명그물 대표

며칠 심하게 앓았다. 몸이 어지간히 아파도 병원에 가거나 약을 잘 먹지 않는다. 신음 않고 그 아픔을 온몸으로 다 받고 견딘다. 내심 참회의 시간이기도 하다. 그 과정을 지나면 다시 살아난다. 만일 이 방식이 잘못되었다면 지금의 나는 벌써 죽었어야 마땅하다. 아파도 아프다는 표현 못 하고 자란 어린 시절을 겪으며 스스로 체득한 치유법이다.

전문 의료인 입장에서는 미련한 짓거리로 보이겠지만 내 몸 상태는 내가 제일 잘 안다. 어디가 어찌 아픈가를 찬찬히 느낀다. 증세를 살펴 과거 치유 경험을 되짚는다. 아하 되게 체했구나. 약을 먹고 한 이틀 섭식을 조절해야지. 또는 감기가 찾아왔구나. 어제의 건방진 방심을 뉘우치며 뜨끈한 생강차를 마시고 정기를 돋우다 보면 한고비 넘기거나 혹 지게 되더라도 한 이틀 앓고 거뜬하게 턴다. 그리 살았다. 내가 직접 들은 건 아니지만 히포크라테스는 식이요법으로 질병을 치료하는 것이 첫 번째이고, 약물치료는 두 번째이며, 수술은 최후의 수단이라 했다.

나이가 찰수록 허점이 도드라지고 탈이 느는 건 어쩔 수 없다손 치더라도, 매사 회복력에서 현저한 하강 곡선을 긋는 느낌이 확연하다. 갈수록 잘 안 낫는다. 오래 써 낡았으니 그러려니 할 수밖에. 언제든지 가볍게 떠날 생각을 한 지도 오래되었다. 어쩜 암이 생겼다 하더라도 굳이 처치 받을 맘은 없다. 돌아가야 한다는 통지니까 순순히 응할 작정이다. 이만큼 산 것만 해도 무지 장하다.

그런데 이번에는 조짐이 여느 때랑 달랐다. 약을 먹고 하루나 이틀쯤 조리하면 대개 체기가 풀렸는데 어라? 통증에 전혀 차도가 없다. 어디 달리 심각한 탈 아닌가 하는 불안이 덜컥 덮쳐왔다. 너무 아프니까 잠을 이룰 수 없어 몸을 웅크리고 겨우 버텼다. 긴긴 며칠 낮밤을 접었다 펼쳤다하면서 오만 생각을 다 했다.

언제 죽든 괜찮다. 마치 누구나 가야 할 군대를 미뤘다 가거나 아니면 아니꼬운 꼴 당하지 않으려 어린 나이에 서둘러 가듯, 죽는 일도 매한가지다. 먼저 가거나 나중 갈 뿐 죽음에서 비켜나 있는 생명은 없다. 종종 아까운 분 죽었다고들 안타까워하는데 몇 날 더 사느냐 마느냐는 그리 대수 아니다. 낼모레면 내 차례 아닌가.

다만 어찌 죽느냐가 관건이다. 최고의 축복은 사망할 때까지 별다른 질병에 휘둘리지 않고 살다 여느 날처럼 잠들었다가 깨지 않는 식으로 숨지는 것이다. 어느 고승인가 기억나지 않지만, 저녁 공양 후 바람 쐰다고 마당에 나가 나무를 붙잡고 서 계셨는데 너무 오래여서 모시러 갔더니 그대로 입적하셨더라는 글을 읽은 적 있다. 멋지다. 심장마비도 순간 고통은 크겠지만 깔끔함에서는 꽤 괜찮은 죽음이라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내가 고이 떠날 때, 고맙지만 심폐소생술은 사양한다. 저승사자의 점잖은 공무집행을 방해하면 안 된다.

통증에 차도가 없자 어쨌건 한 방에 깔끔하게 가야 한다는 일념으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행여 뜻대로 안 되고 질질 끌면 큰일이다. 물론 내가 몸져누우면 이제 내 보호자가 되어버린 아이들이 팔을 걷고 나서겠지만, 그들은 그들대로 빠듯한 삶 아닌가. 제 몸 하나 제대로 간수하지 못하는 사람을 덜렁 끼워 안기는 어렵다. 나로 인해 전혀 예상하지 않던 혼란이 일파만파 번져갈 상황이 뻔하지 않은가. 누구든 피곤하게 만들고 싶지 않다. 오직 상큼한 아버지로만 기억해다오.

홀로 버티다 상태가 나빠져 언제건 휙 떠나도 좋다. 막판에 누군가 내 임종을 지켜주는 일도 바라지 않는다. 다만 빠른 뒤처리가 필요한 게 또한 걱정이다. 나를 찾다 응답이 없자 당황한 사람들이 문 걸쇠를 부수고 들어와 수습해야 하는 일련의 상황들이 너무 얄궂다. 공교롭게도 시간이 지나 시신이 부패한 지 오래면 치우는 사람 처지에서도 흉측한 일 아닌가.


예전에 대가족이 일가를 이루고 살 때는 노인의 자리가 있었지만, 지금은 모두 최소단위로 분해되어 각자도생이다. 내 죽을 때를 모르는 것이 문제다. 안 그래도 바쁜 아이들에게 아침마다 ‘아버지, 아직 살아있다’고 알리는 짓도 얄궂지 않은가. 그렇다고 노인들만 모여 지내는 집단시설에서 허송하는 건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급변하는 세상에서 상큼하게 살다 가기가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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