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호철의 스포트S라이트] 光속구시대에 그리운 느린볼의 요리사
‘160′. 올 프로야구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숫자다.
한화 문동주(20)가 국내 선수론 사상 처음으로 ‘마(魔)의 벽’ 시속 160㎞를 무너뜨렸고, 안우진(키움·24)과 김서현(19·한화)도 뒤질세라 이에 육박하는 공을 뿌려댄다. 그러나 야구에선 속도가 전부는 아니다. 제구력이 없다면 속도는 신기루에 불과하다. WBC(월드베이스볼클래식)에서 한국 투수들은 호주와 일본에 대량 실점하며 무너졌다. 공이 느려서가 아니라 자기 마음먹은 곳에 못 던졌기 때문이다.
2년 전 마운드를 떠난 투수 유희관(37)은 이런 시대 추세를 거스르고도 경기를 지배한 역행자(逆行者)다. 용을 써도 140㎞도 넘지 못하던 느린 공으로 타자들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통산 101승. 배짱과 날카로운 제구가 보호막 구실을 했다. 그는 은퇴한 뒤로는 야구 해설자, 방송인, 유튜버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150km조차 광속구로 명함도 못 내미는 시대를 보는 느낌이 남다를 것 같아요.
“WBC 한국 대표팀 응원단으로 일본 가서 정말 일본이 부러웠어요. 공도 빠르고 제구도 뛰어난 투수가 정말 많았어요. 한국에서도 저런 투수가 많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했죠. 올해 국내에서도 안우진 문동주 김서현 곽빈 등 빠른 볼 투수가 많이 눈에 띕니다. 이들이 한국 야구의 경쟁력을 높일 수 있지 않을까요.”
–좀 지난 얘기지만 한국 야구의 WBC 부진을 직접 본 느낌은?
“많이 아쉬웠죠. 특히 투수들이 좋은 공을 지니고도 스트라이크 못 던지고 볼을 던지는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봤어요. 모든 선수가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이 노력해야 합니다.”
–투수들은 뭐가 문제였을까요.
“공 스피드만 신경 쓰다 보면 망가질 수 있어요. 타자들은 160㎞를 막 던지기보다 150㎞를 원하는 곳에 던지는 투수를 더 어렵게 생각해요. 스트라이크 존을 구석구석 잘 이용하고, 변화구를 완벽하게 가다듬어 타자 타이밍을 빼앗는 게 중요하죠. 타자들 체격과 파워가 점점 좋아지는데 힘으로 타자를 제압하는 데는 한계가 있어요.”
–스피드보다는 제구란 얘기죠?
“스피드와 제구력 둘 다 갖추면 금상첨화죠. 제 최고 스피드가 아마 136, 137㎞였을 겁니다. 고교, 대학 때 동기들보다 공이 현저하게 느렸어요. 어떻게 살아남을까 고민하다가 제구력으로 승부를 걸어보겠다고 마음먹었어요. 만약 제가 구속 몇㎞ 늘리는 데 매달렸다면 제구마저 흔들렸을 겁니다. 각자 자기에게 맞는 거로 승부를 걸어야죠.”
–제구에 어려움을 겪는 투수들에게 조언한다면?
“중요한 건 자신감 아닐까요? 스피드가 빠르지 않으면 더 많이 얻어맞을 것이란 두려움이 문제예요. 전 스스로 ‘난 누구보다 강하다’고 생각했고, 내 공을 믿었습니다. 타자들도 다 똑같은 사람인데 맞더라도 과감하게 승부하자고 마음먹으니 도리어 편해지더군요.”
–제구를 가다듬는 노하우라도?
“정답은 없습니다. 각자 체형과 운동 능력에 맞는 폼을 먼저 찾아야 합니다. 구속을 애써 줄일 필요는 없다고 봐요. 스피드도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장점이니까요. 다만 구속을 유지하면서 거기에 맞는 폼을 찾아야죠. 끊임없이 새로운 걸 시도하고 노력해야겠죠.”
–WBC 대회 때 일본 오타니를 삼진 잡은 체코 투수도 공이 안 빨랐죠? 국가대표가 되지 못한 아쉬움은 없나요.
“느린 볼 때문에 ‘국제 무대에서는 안 통한다’는 편견이 너무 컸어요. 결국 안 뽑혔죠. 실망스러웠지만, 그냥 내가 부족하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했어요. 선수 생활을 마치면서 ‘제구 하면 유희관’이라는 색깔을 팬들 머릿속에 남긴 데 자부심을 갖고 있어요.”
–야구 해설자, 방송 출연, 유튜브 등 요즘 하는 일이 많던데요.
“선수 시절엔 선발투수로 5일마다 하루 바빴는데, 요즘엔 일주일에 5일 바빠요. FA(자유계약선수) 때도 영입 경쟁이 없었는데, 은퇴하고 나니 방송 3사에서 다 해설위원 제의가 들어왔어요. 방송은 원래 워낙 좋아하니 재미있게 하고 있어요. 현역 시절부터 ‘준비된 엔터테이너’란 말을 많이 들었잖아요. 유튜브도 사람 만나기 좋아하는 성격하고 맞아요.”
–은퇴 후에도 야구 예능 프로그램에서 맹활약하던데요.
“처음엔 즐기려 했는데 야구 글러브 끼니 승부욕이 생겨요. 은퇴했어도 고교, 대학, 프로 2군 팀에 망신당할 수는 없잖아요. 저뿐 아니라 다른 선수들도 운동 다시 시작했어요. 김성근 감독님이 팀 맡은 다음엔 일주일에 한 번 연습도 해요. 은퇴한 40대, 50대가 열심히 던지고, 때리고, 슬라이딩 하는 게 상대에게 자극제가 되고 팬들에게도 긍정적인 메시지를 주는 것 같아요. 예능이 아니라 진짜 야구 하고 있는 겁니다.”
– 김성근 감독이 ‘유희관 왜 은퇴했는지 모르겠다’고 안타까워했다던데요.
“제 야구가 예능을 통해 재평가받아 기쁘네요, 하하. 현실은 좀 달라요. 나이가 들면서 기량이 떨어지는 게 사실이죠. 후배들이 치고 올라서면서 팀이 예전만큼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느낌도 있고요. 그라운드에서 더 던지고 싶다, 이런 미련은 없는데 아쉬운 게 하나 있긴 하네요. 두산 최다승(현재 109승·장호연) 투수가 되지 못한 거요. 제 직구가 만약 140km가 넘으면 지금까지 뛰면서 깨지 않았을까요?”
–야구와 사회생활, 어떤 게 더 어려운가요?
“사회생활도 야구처럼 마음대로 되는 게 없어요. 컨디션 안 좋은 날 집중해서 던지면 잘되고, 컨디션 좋을 때는 다 되는구나 싶어서 마구 덤비다 얻어맞는 것처럼…. 유튜브도 처음엔 야구와 관계 없는 거로 잘할 자신 있었는데 잘 안 됐어요. 각 팀 홈구장과 응원 문화, 먹거리 등을 소개하는 걸 한번 다뤘는데 제 생각과는 다르게 호응이 정말 좋았어요. 역시 모든 게 정답이 없더라고요.”
–셋 중 하나만 선택한다면?
“다 포기 못 해요. 다 내가 좋아하는 일이고, 스트레스 받을 일도 없어요. 하지만 언젠가 그라운드로 돌아갈 때는 다 그만둘 겁니다. 가장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지만, 또 제가 가장 좋아하는 게 야구입니다.”
–지도자가 되고 싶다는 건가요?
“은퇴할 때 두산에서 코치 제의를 했는데 아직 준비가 안 된 것 같아 사양했어요. 잠시 그라운드를 떠나 있고 싶기도 했고요. 요즘 해설 준비하면서 열심히 야구 공부하고 있어요. 그라운드 밖에서 보니 달라 보여요. 현역 땐 나만 잘하면 됐는데, 해설할 땐 경기장 내 모든 움직임에서 한시도 눈을 뗄 수 없게 되더라고요.”
–감독 욕심도?.
“대한민국에서 오직 열 명밖에 할 수 없는 자리잖아요. 꿈은 크게 가져야죠. 제가 뛰었던 두산 베어스 감독 아니면 안 할 겁니다. 하하. 꼭 감독이 못 되더라도 코치로서 선수들에게 제 노하우를 전해주고 싶어요.”
–마지막으로 10년 후 자기 모습을 그려본다면?
“저도 지금 제가 운이 좋아 다른 은퇴 선수보다 행복하게 제2의 삶을 살고 있어요. 이런 걸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는 마음가짐을 끝까지 지키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뭘 하든 열심히 초심을 잃지 않고 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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