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칼럼] 신뢰받지 못하는 사람들의 통치

기자 2023. 5. 11.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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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년 전, 스웨덴의 어느 대학교에 방문교수로 있을 때였다. 연구실을 배정받고 방 열쇠를 받았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 열쇠로 내 방뿐만 아니라 그 층의 대부분 방들을 열 수 있었다. 그 사회에서는 그만큼 내부자들 사이에 신뢰가 형성돼 있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었다. 신뢰는 소통, 연대, 협력과 함께 인간이 살아가기 위한 기본 전제이다. 사회적 자본은 경제적 자본과 함께한 사회의 미래를 좌우하는 양 날개이다.

한숭희 서울대 교육학과 교수

여기 한 가지 흥미로운 통계가 있다. 지난 3월 한국경제연구원이 영국의 레가툼 번영지수 보고서를 인용해 공개한 자료를 보면, 한국의 번영지수는 전체 167개 국가 가운데 29위로 그리 나쁘지 않았다. 이 가운데 교육 부문과 건강 부문이 각각 3위에 올라 있었고, 경제의 질 부문에서는 9위를 기록하고 있었다. 반면 유독 사회적 자본 지수에서만 107위라는 극단값을 보여줬다.

또한 이 보고서의 거버넌스 지수에서 한국은 30위 정도로 나름 상위권이지만, 그 하위 요소인 공적 기관 신뢰지수는 무려 100위에 머물면서 전체적으로 거버넌스 지수를 끌어내렸다. 그중에서 경찰 신뢰도는 10년 전 124위에서 현재 63위로, 금융 및 은행기관은 121위에서 33위로 제법 많은 개선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사법체계와 법원에 대한 신뢰도는 전체 167개국 가운데 155위로 거의 바닥을 찍었다. 게다가 10년 전 146위에서 순위가 더욱 내려왔다. 참고로 2016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도 한국 사법시스템의 사회적 신뢰도는 35개국 가운데 34위를 기록했다. 요컨대 법 체계는 전통적으로 한국에서 가장 신뢰받지 못한 부문이었던 셈이다.

이런 불신에도 한국은 법조인들이 점령하는 국가가 돼 가고 있다. 21대 국회에는 법조인 46명이 입성했으며, 지난해에는 최초로 검사 출신 대통령이 탄생했다. 그에 따라 행정부 전체에 장차관, 혹은 비서관 등의 이름으로 검사·변호사 출신들이 다수 전면 배치되었다. 이뿐 아니라 기업과 민간 부문에도 검사·변호사 출신들이 깊숙이 진입해 있다. 송사가 난무하는 사회에서 법무 검토는 이제 모든 기관과 조직의 필수가 되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방송과 대중매체에 자주 출연하는 시사평론가들도 주로 변호사들이다. 한국은 이제 법조인들이 지배하는 사회가 된 것이다.

나는 이런 현상 속에서 세 가지 염려를 하게 된다. 첫째, 수십 년 동안 ‘가장 신뢰받지 못하는 집단’이 국가의 ‘가장 강력한 권력’을 점유해가는 현상은 우려할 만한 일이다. 자신의 전문 영역을 떠나 정치의 영역으로 나갈 자격을 가지려면 우선 자신이 몸담았던 사법체계를 개혁하고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 굳이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를 외칠 필요도 없이 자명한 일이다. 윤석열 정부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은 다른 게 아니라 자신이 몸담았던 사법체계로 인해 실추된 사회적 신뢰와 국가 가치를 스스로의 개혁을 통해 회복하는 일이다.

둘째, 윤 정부 출범 이후 가장 자주 등장하는 말이 ‘법치주의’이다. 대통령이나 장관들의 입에서 자주 ‘법대로 한다’는 말이 나온다. 하지만 중국 춘추시대에 유가와 법가의 통치이념 비교를 통해 배울 수 있는 것처럼, 예와 덕이 빠진 ‘법치주의’는 사회를 피폐하게 할 뿐이다. 사람을 존중하지 못하고 소통하지 못하면서 법만 외치는 사회는 법이 인간 위에 군림하는 사회이다. 법만으로는 결코 인간끼리의 신뢰를 회복할 수 없다. 법이 삶의 구석구석을 장악해가는 사회에서 인간 대 인간끼리의 사회적 신뢰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 송사가 만사가 되고, 사회적 신뢰를 비웃듯이 뇌물, 횡령, 사기, 무고 등과 같은 사건들이 폭증한다. 이럴 경우, 미국 서부시대처럼 ‘법’이라는 총을 서로 쏴대는 사회가 도래할 것이고, 누구나 총 한 자루쯤 갖고 있어야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사회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셋째, 법의 가장 큰 맹점은 법 없이도 살 만한 선한 사람들을 법이 앞장서서 보호해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법은 언제나 스스로를 보호할 능력이 있는 사람들의 편이며, 법에 접근할 수 없는 사람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보듬어주지 않는다. 특히 ‘못 배운 사람들’에게 법은 비정할 정도로 차갑고 냉정하다. 공공의 정의가 무너진 사회에서 법은 그 시스템의 맨 끝단에 위치한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몬다. 법으로는 양극화된 사회를 치유할 수 없다.

윤석열 정부의 국정 지지도가 회복되지 않는 것은 단지 외교적 말실수나 불통의 이미지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자신들을 배출한 법가를 ‘제가(齊家)’하지 못한 원죄가 크다.

한숭희 서울대 교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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