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의 눈] 최고의 시대에 최악의 시절을 지나며

구혜영 기자 2023. 5. 11.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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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 전후 폭풍전야와 혼돈의 새벽을 다룬 찰스 디킨스의 소설 <두 도시 이야기>는 문학사를 통틀어 가장 강력한 서문으로 시작된다. “최고의 시대이자 최악의 시절이었고, 지혜의 시대이자 어리석음의 시대였다.” 서문은 “빛의 계절이자 어둠의 계절이었다. 희망의 봄이면서 절망의 겨울이었다”는 말로 이어진다. 윤석열 대통령 취임 1년이 되는 10일 <두 도시 이야기>의 첫 문장을 생각한다. 최고의 시대에 만난 최악의 시절….

구혜영 논설위원

미래에 희망이 있고, 그 희망이 아름다울 때 꿈이라 부를 수 있다. 사람에게 꿈이 있듯 나라에도 꿈이 있다는 걸 알게 되고, 나라의 꿈이 나의 꿈이 되는 때는 최고의 시대라 할 수 있다. 문화국가론을 외쳤던 백범 김구의 꿈, 흑인해방을 넘어 미국의 자유와 평등을 말했던 마틴 루서 킹의 꿈을 당시 국민들이 받아들인 것처럼. 대한민국 시민들은 탄핵과 촛불집회를 거치며 헌법 제1조를 체화했다. 태극기부대조차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또, ‘보이지 않는 적’ 코로나19와 싸웠던 3년은 불평등이라는 상처가 드러난 시간이지만 성찰과 공존을 깨닫게 된 치유의 시간이기도 했다. 조금은 더딜지라도 나와 나라의 꿈이 만나는 최고의 시대를 열어가는 중이었다. 적어도 윤석열 정부를 겪기 전까진.

지난 1년은 퇴행의 연속이었다. 소통 부재, 검찰공화국, 민주주의 퇴행 등 얼핏 드는 생각만도 차고 넘친다. 지난 대선 자체가 역주행의 서막이었을까. 대선은 거대한 갈등의 장이면서 한 사회가 합의할 수 있는 가장 진일보한 정책이 경쟁하는 무대이다. 2022년 대선은 역대급 ‘비호감 대선’으로 불렸다. 진보진영의 사적 복수와 보수진영의 공적 복수가 경쟁한 탓에 그간 조금씩 진전해온 사회적 합의는 바닥으로 내리꽂혔다. 여성 입장에서 돌아보면 군대 안 가는 여성에게 4분의 3 권리만 주자는 말을 비롯해 여성가족부 폐지, 이대남·이대녀 논란에서 비호감 대선의 실체를 절감했다.

취임 후 윤 대통령의 일성은 공정과 상식의 복원이었다. 그러나 공정과 상식은 집권 시작부터 비정상의 일상화로 치달았다. 통상 임기 초엔 대통령 주도의 갈등형 의제가 많은 편이다. 노무현 정부의 4대 악법 폐지, 이명박 정부의 정부조직 축소, 문재인 정부의 적폐청산 등을 들 수 있다. 다만 갈등형 의제를 통치 수단으로 삼으려면 전제가 있다. 대통령 인기가 높거나 야당이 협조적인 경우다. 윤 대통령은 어느 경우에도 해당되지 않는다. 여소야대 정국임에도 야당 대표와 단 한번도 회동하지 않았고 국정 난맥 원인을 ‘거대 야당의 발목잡기’ 탓으로 돌리는 데 급급했다. 독선이 지배하는 일방주의 정치는 정책의 공감대 형성을 막고 수용성을 떨어뜨리는 요인이다. 1년 가까이 뭘 하겠다는 국정 슬로건조차 없다가 연금·노동·교육 개혁을 제시했지만 3대 국정과제는 얼마나 곤궁한 처지인가.

외교안보 분야도 자화자찬이 무색할 지경이다. 미국 편향 외교는 신냉전 구도를 불렀고, 중국이라는 큰 시장을 잃어가고 있다. 대일 외교는 퍼주기로 일관했지만 번번이 뒤통수를 맞았다. 엄중한 국제정세에서 바늘 끝처럼 서로 맞대고 바라봐야 할 북한과는 최악의 관계가 됐다. 독재정권에서도 겪지 않았던 전쟁위기론이 일상까지 스며들었다. 0.73%포인트 차 승리는 통합 대통령이 되라는 경고였다. 윤 대통령이 그 의미를 엄중하게 성찰했다면 루스벨트 충고대로 ‘(진영 대표선수로 약속했던) 대선 공약부터 잊어야’ 했다. 전당대회 돈봉투 파문에 60억 코인 보유 사건에도 국민 눈치를 보지 않는 더불어민주당 현실도 따지고 보면 대통령의 나쁜 정치에서 비롯됐다. 여권 스스로 추락하는 마당에 야당도 반성하고 쇄신하려 하겠는가. 그 불행은 고스란히 우리의 몫이다. 최고의 시대에서 최악의 시절과 대면해야 하는 고통 말이다.

헨리 키신저의 말을 변용하면 ‘정치인(대통령)의 일은 그의 이상과 국가가 놓인 현실 사이에 다리를 놓는 것’이다. 최고의 시대로 다시 정주행하는 튼튼한 다리를 만들어야 한다. 걱정부터 앞서는 게 솔직한 심경이다. 소포모어 증후군이 우려되는 집권 2년차 아닌가. 통치술의 끝은 자기 통치임을 잊지 말아달라. 우리가 만든 최고의 시대를 대통령이 가로막으면 안 된다는 절박한 당부를 <두 도시 이야기>의 못다 한 서문으로 대신한다. “우리는 모두 천국으로 가고자 했지만 우리는 엉뚱한 방향으로 나아갔다.”

구혜영 논설위원 kooh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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