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한일 정상, 히로시마를 넘어 제암리로

정재정 서울시립대 명예교수 2023. 5. 11.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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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 원폭 위령비’ 동반 참배… 재일 한국인 울분 씻어줄 수 있어
3·1운동기념관 동반 참배한다면 양국 역사 화해에 성큼 다가설 것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지난 7일 공동 기자회견에서 오는 19∼21일 일본 히로시마에서 열리는 선진 7국(G7) 정상회의 기간에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에 있는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를 함께 참배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한일 역사 문제를 오래 지켜본 필자는 동반 참배를 잘 살리면 세 가지 점에서 역사 화해의 물꼬를 틀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첫째, 일본이 홀대하고 한국이 무시한 ‘위령비’를 제대로 대접함으로써 재일 한국인의 원한을 풀어줄 수 있다.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 히로시마 본부는 일본에서 차별받다 억울하게 원폭을 맞고 숨진 동포의 넋을 기리기 위해 1970년 4월 평화공원 밖에 위령비를 건립했다. 일본의 지원을 받지 못해 병마와 생활고에 시달리던 피폭자도 뜻과 돈을 모았다. 역대 한국 대통령은 아무도 눈물 어린 위령비를 참배하지 않았다.

히로시마 원폭 피해 한국인은 5만명으로 추정한다. 그중 사망자가 3만명, 생존자가 2만명(귀국자 1만5000명, 잔류자 5000명)이다. 그런데도 히로시마시는 한국인만 특별 대우할 수 없다며 위령비를 평화공원 안에 세우는 것을 막았다. ‘민단’은 일본인과 연대해 위령비 이전 설치 운동을 벌여 1999년 5월 마침내 공원 안으로 옮겼다. 동반 참배는 한국인 원폭 피해자의 넋을 위로하고 재일 한국인의 울분을 씻어주는 행사가 될 수 있다.

둘째, 일본, 특히 히로시마에서 벌어지는 피해 의식의 확산과 가해 의식의 축소에 제동을 걸 수 있다. 평화공원에 있는 히로시마 평화기념자료관은 1955년 개관 이래 전시를 세 번 대대적으로 개편했다. 개관 이후 30년은 오로지 피해 전시에 초점을 맞췄다. 이 때문에 중학생 관람자조차 아시아 침략의 거점이었던 히로시마의 가해 사실도 전시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가와모토 관장은 “침략자는 도쿄에 있다. 자료관의 유일한 목적은 1945년 8월 6일에 일어난 일을 보여주는 것”이라며 일축했다.

1991년 히라오카가 히로시마 시장에 취임했다. 그는 경성중학과 경성제국대학에서 공부했는데, 일본 정부보다 먼저 아시아 침략과 식민지 지배를 사죄했다. 히로시마 평화기념자료관은 동관(東館)을 신축해 히로시마가 청일전쟁부터 태평양전쟁까지 군도(軍都)로서 기능한 내력을 전시했다. 여기에는 한국인 강제 동원과 원폭 피해도 들어 있었다.

그런데 아베 정권 아래 역사수정주의가 득세하자 평화기념자료관은 2017년과 2019년에 전시 내용을 크게 바꿨다. 피폭자의 시점에서 원폭의 비참함을 전한다는 방침 아래 피해자의 유품과 사진 등을 대폭 늘렸다. 반면 히로시마가 피폭에 이르는 과정, 곧 침략 전쟁과 식민지 지배에 관련된 내용은 훨씬 줄였다. 게다가 한국인 원폭 피해 상황을 독일인 신부 등 소수 외국인과 한 묶음으로 간략히 다뤘다. 한일 정상의 동반 참배는 한국인의 피해를 생생하게 증언하는 위령비를 부각시킴으로써 히로시마 시민뿐만 아니라 일본인이 가해 의식에 눈뜨도록 자극할 것이다.

셋째, 동반 참배는 일본 총리의 사죄를 행동으로 보여주는 상징이다. 독일 브란트 총리가 1970년 유대인 희생자 위령탑 앞에서 무릎을 꿇은 것과 차원은 다르지만,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그에 버금가는 효과를 거둘 수 있다.

한일 정상의 동반 참배가 앞으로 제암리 3·1운동순국기념관 등으로 이어지면 양국은 역사 화해에 성큼 다가서게 된다. 윤 대통령과 기시다 총리가 그 길을 닦은 인물로 역사에 기록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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