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연실의 고수와 장수] “쿠폰 세 장 준다… 살다가 내가 필요한 일 있으면 꼭 연락해”

이연실 이야기장수 대표 2023. 5. 11.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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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사가 김이나편

※이연실의 ‘고수와 장수’를 시작합니다. 책 편집자인 ‘이야기장수’ 이연실 대표가 업계 ‘고수’가 된 인물들의 ‘장수’ 비결을 소개합니다.

김이나 작사가에게 첫 책 작업을 제안하러 갈 때, 나는 한껏 들떠 있었다. 대한민국 작사 저작권료 1위를 기록한 스타 작사가. 조용필, 이선희, 이효리, 아이유 등 시대를 넘나드는 인기 뮤지션들의 노랫말을 쓴 K팝의 최전선에 있는 작사가. 나는 그의 작사에 대한 노하우와 생각을 담은 책을 만들어 꿩 먹고 알 먹고, 도랑 치고 가재 잡고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대차게 팔아볼 작정이었다.

“작사가님 책이 나오면 다양한 사람들이 열광할 거예요. 작사가 지망생은 물론이고, K팝 팬덤, 팔리는 글쓰기가 궁금한 사람, 그리고 싱어송라이터들….” 꿈에 부풀어 ‘고객’을 늘려가는 나에게 김이나 작사가는 단호하게 정정했다.

/일러스트=이철원

“아니요. 사람들은 노랫말 작사가 대개 비슷할 거라 생각하지만, 사실 싱어송라이터와 직업 작사가의 작사법은 태생부터 완전히 달라요. 싱어송라이터는 제 안에서 터져나오는 이야기를 잘 듣고 표현하는 사람이에요. 하지만 직업 작사가는 자기 얘기가 목적지인 사람이 아니에요. 오히려 기꺼이 ‘남’이 될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하죠. 이 노래를 부를 가수가 어떤 캐릭터인지, 팬들은 그에게 어떤 서사를 기대하는지 연구해서 그들에게 어울리는 이야기를 쓰는 게 프로 작사가예요. 그래서 제 일은 예술가라기보다는 일꾼이나 기술자에 가깝다고 생각해요. 제가 쓸 수 있는 원고는 ‘나’를 토로하는 글쓰기가 아니라 ‘나’보다는 ‘남’을 향하는 글쓰기인 것 같아요. 그러다 내가 남이 되기도 하고, 남이 나 자신에게 불쑥 들어오기도 하는 글쓰기요.”

작사가 그저 콩나물 닮은 음표에 맞춰 내가 가진 아름다운 단어들을 펼쳐놓는 것쯤으로 생각했던 편집자는 얼굴이 붉어졌다. 그 후 함께 일한 시간만큼 친밀해지고 ‘김이나의 작사법’이 점차 완성되어갈 무렵, 또다시 나를 흔든 김이나 작사가의 말이 있다. 책 출간일이 다가오면서 책에 언급된 다른 아티스트들에게 허락을 구하거나 도움을 청할 일이 왕왕 있었는데, 그때 그가 내게 당부한 것이 있다.

“알지? 누군가를 섭외하거나 일을 의뢰할 때는 ‘이 일을 네가 받아야 너도 좋고 나도 좋으니깐 해달라’고 말하면 절대로 안 된다는 거. 설사 상대가 이 일을 수락했을 때 객관적으로 확실히 그 사람에게 유리한 면이 있어 보인다 하더라도, 그걸 일을 의뢰하는 쪽에서 섣불리 말해선 안 돼. 나는 그저 일에 따르는 조건들을 최선을 다해 준비해서 정직하고 성실하게 전하고, 그 일을 받을지 말지 유불리(有不利)는 상대가 판단하는 거지.”

그는 ‘알지?’ 하면서 넌지시 입을 뗐지만, 사실 난 몰랐다. 돌아보면 얼마나 많은 일들을 이런 식으로 해왔던가. ‘내가 지금 당신에게 제안하는 게 최상의 조건이에요. 당신에게도 썩 괜찮은 일일 텐데요.’ 이 일을 받지 않으면 당신한테도 더없이 아까운 일이고 손해라는 식의 상냥한 압박과 무례를 우리는 일하면서 얼마나 많이 범하는가. 나의 필요와 간절함에 눈이 멀어 남에게 일을 부탁하면서도 내 기준으로 재고 판단해버리는 것이다.

김이나 작사가는 중요한 프로젝트를 끝낸 후에도 다시 ‘남’을 생각한다. 함께 일했던 스태프에게 그는 일을 마치면서 가상의 쿠폰을 건넨다. “살다가 내가 필요한 일이 생기면 꼭 연락해. 그게 뭐든 언제든 내가 힘닿는 한 꼭 한다. 쿠폰 세 장이다!”

그의 첫 책 편집자인 나도 그 쿠폰을 받았는데, 사실 나는 그가 준 쿠폰들을 이런저런 일로 이미 다 써버렸다. 하지만 그래도 그의 능력과 도움을 청해야 하는 순간은 내 인생과 일에서 끝나지 않는다. 나는 자꾸 그에게 말을 걸고, 그는 내가 이미 써버린 쿠폰은 잊었다는 듯이 무슨 일이냐고 새롭게 묻는다.

한 시절을 함께 일한 소중한 동료와 스태프에게 그는 무심한 듯 ‘김이나 쿠폰’을 건네며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그동안 네가 나를 주인공으로 만들어주었으니, 훗날엔 기꺼이 내가 너의 조연이 되어줄게. 그의 쿠폰 세 장은 정말로 인생에서 딱 세 번만 도와주겠다는 조건부 사인이 아니라, 인생의 어느 어려운 날이나 기쁜 날에도 너에겐 ‘김이나 찬스’가 있으니 기탄없이 말해달라는 약속 같다. 시간이 흘러 우리가 조금 떨어져 일할 때도 어려워하지 말고 자신에게 기꺼이 말을 걸어달라는 다정한 인사 같다. 일하기 전에도, 일하는 중에도, 일하고 난 다음에도 그는 끊임없이 ‘남’과 함께 일하는 것의 귀함을 알게 하는 사람이었다. 세상에 나만 생각해서 되는 일, 철저히 혼자서 되는 일은 별로 없다. 언제나 ‘남’과 더불어 이루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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