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의 풍경, 책 밖의 이야기] ‘저자 챗GPT’ 풍요의 역설
출판, 그중에서도 단행본은 글로 이루어지는 콘텐츠 가운데 가장 느리고 안정적이라고 이야기되지만, 특정 키워드가 화제를 모을 때 쏟아지는 책을 보면 정말 그런가 싶은 생각이 든다. 올해의 키워드로 기록될 ‘챗GPT’도 마찬가지다. 온라인 서점에서 해당 키워드로 검색을 하면 무려 113종의 도서가 나오는데, 챗GPT 관련 첫 책이 올 1월에 나왔으니 하루에 한 권꼴로 출간되는 상황이다. 5월이 열흘 남짓 지나고 있는데 이달에만 20종 이상이 나왔으니, 이 정도면 챗GPT의 발전 속도에 부응하는 게 아닐까 싶다. 문뜩 그간 스쳐가거나 지속되고 있는 몇몇 키워드가 떠오르는데, 4차 산업혁명, 메타버스, 대체불가토큰(NFT) 관련 도서가 얼마나 단기간에 다수 출간되었고, 지금 상황이 어떠한지를 짚어보면 짐작과 대응이 가능할 수도 있겠다.
속도뿐 아니라 범위와 내용도 다양한데, 연관성과 활용도 등 비중이 가장 큰 경제·경영 분야가 3분의 2를 차지하고, 기술 관련 내용이니 과학 분야가 두 자릿수 비율을 보이는 건 쉽게 수긍된다. 그런데 요리와 어린이 분야에서 이미 출간된 도서가 있다는 건 놀랍고도 궁금한 상황이겠다. 요리 분야에서 나온 책은 <챗GPT가 추천하는 술과 안주>로, 저자는 챗GPT다. 맥주, 소주, 와인, 위스키 등 주종별로 어울리는 안주 레시피를 소개하는데, 안주를 결정하지 못해 고민하는 이들에게는 큰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
어린이 분야에서는 두 종의 도서가 나왔는데, 뇌과학자 김대식 교수가 함께 쓴 <어린이를 위한 인공지능>과 빅아이 인공지능 연구소가 지은 <대화형 인공지능 천재가 되다>로, 전자의 부제는 ‘메타버스부터 챗GPT까지’이고, 후자의 부제는 ‘공부가 재미있어지는 챗GPT 활용법’이다. 외국어 분야에서도 <챗GPT 영어명언 필사 200> <챗GPT 영어공부법> 등이 발 빠르게 흐름에 대응하고 있다. 현재까지 양상을 보면 기존과는 전혀 다른 국면이라는 걸 확인할 수 있는데, 저자 챗GPT의 등장이다. 기존에는 해당 키워드의 내용과 전망이 중심이었으니 기획의 확장과 실현에 제약이 따랐다. 하지만 이제 그 자체가 저자로서 활용되고, 아니 활약하고 있으니 마음만 먹는다면, 그리고 성공만 확신할 수 있다면 단기간에 많은 도서를 쏟아낼 수도 있는 상황이다.
번역을 맡길 수도 있고, 주제나 상황을 넣어 결과를 묶을 수도 있을 테고, 읽는 사람의 상황에 따라 같은 내용을 다르게 보여줄 수도 있을 테고, 재미 여부는 확인해야겠으나 창작에 가까운 쓰기도 가능할 테니, 그야말로 모든 분야에서 어떤 책이든 써내고 펴낼 수 있는 상황이라 하겠다. 결과와 무관하게 이 자체를 막을 수는 없으니, 읽는 사람(독자)은 늘지 않는데 쓰는 사람(저자)은 늘어나는 현상, 출간 종수는 크게 늘었는데 시장 규모는 현상 유지라 종당 판매부수가 줄어드는 현실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떠오르면서, 한 명(?)의 쓰는 사람(?)이 엄청나게 많은 책을 펴내는 현실을 어떻게 이해하고 판단해야 할지 시야가 흐릿해진다.
그간 새로운 기술이 관심을 끌면 얼마나 앞서 관련 도서를 출간할 수 있을지, 그리고 앞선 책과 얼마나 다른 내용으로 구성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경쟁하다가, 세상의 관심이 줄어들면 그에 따라 자연스레 출간이 멎으며 다음으로 넘어가곤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다른 국면이 펼쳐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다른 국면이라면 대응도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신기루처럼 사라진 4차 산업혁명, 메타버스, NFT를 돌아보면 더욱 그렇다. 끊임없이 이어질 기술 변화에 호응할 출판계의 전면적 대응이 필요한 때다.
박태근 위즈덤하우스 편집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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