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현실] 일본 민중운동의 이면

기자 2023. 5. 11.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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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메이지 정권은 수립 후 중대한 도전에 직면해 있었다. 메이지 유신을 주도했던 사무라이층은 특권을 주장하며 반란을 일으켰고, 헌정 실시를 요구하는 자유민권운동은 권력 분점을 요구했다. 도전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민중의 반발도 위협적이었다. 농민을 비롯한 민중은 정부의 근대화정책에 격렬하게 반발했다. 이른바 ‘신정반대 잇키(新政反對一揆)’다. 잇키는 농민 소요쯤으로 번역할 수 있겠다. 장구한 세월 동안 음력 절기에 맞춰 농사일을 하던 이들에게 양력 실시는 뜬금없는 일이었다. 전통적인 축일(祝日)을 무시하고 제정된 기원절(紀元節·초대 천황 진무의 즉위일), 천장절(天長節·천황 생일) 같은 국경일은 생경했다. 농사일과 집안일을 도와야 할 아이들이 갑자기 학교라는 곳에 의무적으로 가야 한다고 하니, 기막힐 노릇이었다. 1870년대에 전체 학교의 10분의 1인 2000개가 민중에 의해 파괴됐다. 취학률은 지역에 따라 25~50%에 그쳤다. 더구나 소요 과정에서 농민들이 자기들보다 더 아래 신분인 천민(부락민)들을 탄압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많은 민중사가들이 메이지 정부가 아니라 민중에게 ‘근대성’ 혹은 ‘근대를 넘어서는 어떤 전망’을 찾으려 했지만, 민중은 ‘도쿠가와 사마(德川樣)’ 시절이 좋았다며 무기를 들었다.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신정반대 잇키’보다 민중사가들의 가슴을 더 설레게 한 것은 1880년대 벌어진 ‘격화사건(激化事件)’들이었다. 격화사건이란 아키타 사건(1881), 후쿠시마 사건(1882), 지치부 사건(1884), 오사카 사건(1885) 등 자유민권운동과 농민 소요가 연동되어 일어난 일련의 봉기를 말한다. 이 중 규모가 가장 컸던 것이 지치부(秩父) 사건으로, 1만명에 달하는 농민들이 곤민당(困民黨)을 결성하여 주로 고리대를 규탄하며 일어났다. 메이지 시대 최대의 농민 봉기다. 봉기의 공격 타깃이 된 것도 주로 고리대업자들이었다. 고리대에 시달린 ‘고단한 민중(困民)’을 메이지 정부는 가혹하게 진압하여, 무려 6400명을 재판에 넘겼다.

그러나 실증연구는 이 사건의 다른 측면을 알려준다. 지치부 지역의 농민들이 주로 양잠제사업(養蠶製絲業)에 종사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당시 이 업종은 쌀, 보리 같은 작물에 비해 적으면 3배, 많을 때는 30배의 고수익을 냈다. 여기에는 많은 노동과 자본을 투입해야 했다. 그러니 양잠제사업 농민들에게 융자는 절실한 것이었다. 개항 이후 일본의 생사(生絲)와 직물은 인기 수출 상품이었으므로 리스크는 낮은 것으로 인식됐다. 부채는 메꿀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기에 농민들은 고리대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1880년대 초 정부가 강력한 긴축정책(마쓰가타 디플레이션)을 펴자 생사 가격은 곤두박질쳤다. 양잠농민들은 ‘가타즈케(片付け)’를 요구했다. 도쿠가와 시대 촌락에서는 한 농민이 파산하면 그 토지를 외부인이 구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촌락 유력자가 빚을 대신 갚아주는 관례가 있었다. 근대경제 체제를 도입하고 있던 메이지 정부가 이를 들어줄 수 없었다. 민중은 도쿠가와 시대의 ‘덕정(德政)’ ‘인정(仁政)’을 요구하며 봉기했다.

인원 동원 방식도 아름답지만은 않았다. 주동자들은 농민들의 참여를 때로는 강요했다. 이른바 ‘가리다시(驅り出し:강제동원)’다. 정부 측 사료에 따르면 “폭도 두 사람이 칼로 협박하며 따라오지 않으면 자식들까지 죽이겠다”는 경우도 있었다. 정부 측 사료임을 감안해야겠지만, 도쿠가와 시대부터 농민 잇키에 이런 일은 흔하게 벌어졌다(佐藤政憲 <激化事件>).

민중운동을 너무 박하게만 말한 것 같지만 민중운동이라고 해서 늘 ‘정의의 사도’는 아니다. 역사를 추동하는 경우도 있는가 하면, 그 반대도 있을 수 있다.

아무리 민중운동에 개인적 호감이 있다 해도 사료가 전하는 바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 지난 세기 ‘민중운동사’는 이 점에 태만했다.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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