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아프리카인 유전정보 담은 ‘범유전체 지도’ 나왔다…“생명과학 패러다임 바뀔 것”

이병철 기자 2023. 5. 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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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 네이처 47개 인종 유전정보 담은 범유전체(판게놈) 지도 공개
관련 연구 논문 4편 동시 게재
인간 DNA 염기 알려진 것보다 1억여개 많아
최대 300만쌍 염기 읽는 분석법 활용해 정확도 높여
“인종 다양성 고려, 맞춤형 의료 활용 기대”

전 세계 47개 인종의 유전 정보를 담은 범유전체(판게놈) 지도가 공개됐다. 한 사람의 유전 정보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기존 유전체 지도와 다르게 인간이 가진 다양성을 담아냈다는 평가다. 범유전체의 최종 목표는 지구에 존재하는 350여개 인종의 모든 유전정보를 분석하는 것으로 인종에 따른 질병의 특성을 파악해 맞춤형 의료를 구현하는데 새로운 길잡이가 될 전망이다.

미국과 영국이 주도하는 인간범유전체참조컨소시엄(HPRC) 연구진은 11일 국제 학술지 ‘네이처’에 인간범유전체 지도의 초안을 공개했다. 이번에 공개된 지도는 47개 인종의 유전체를 바탕으로 만들어졌으며, 관련 연구 결과는 총 4편의 논문에 실려 이날 ‘네이처’ ‘네이처 바이오테크놀로지’에 나눠 소개됐다.

47개 인종의 유전적 다양성을 담은 범유전체(판게놈) 지도가 공개됐다. 이번 연구를 이끈 인간범유전체참조컨소시엄 연구진은 350여개 인종의 유전정보를 모두 담은 지도를 완성한다는 목표를 갖고 있다. /Darryl Leja, NHGRI

◇인간의 DNA, 알려진 것보다 1억개 이상 많아

모든 생명체는 디옥시리보핵산(DNA)의 4가지 염기 서열을 조합해 유전 정보를 저장하고 있다. 인간이 가진 DNA는 약 30억쌍의 염기로 이뤄져 있고, 이 중 일부에는 생명 활동을 조절하는 단백질 정보를 암호 형태로 담겨 있는 유전자가 있다. 유전자가 아닌 부분은 아무런 기능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일부는 유전자의 발현을 조절하는 역할을 한다.

유전정보는 세대를 거듭하면서 부모에게서 절반씩 물려받아 섞이는데, 이 과정에서 유전적 다양성이 나타난다. 문제는 80억명을 넘어선 전 세계 인구를 대변할 수 있는 유전체 지도가 없다는 것이다.

인간범유전체참조컨소시엄 연구진은 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시아에서 인종이 서로 다른 47명의 사람들의 유전체 정보를 분석해 범유전체 지도의 초안을 만들었다. 2003년 ‘인간게놈프로젝트’로 만들어진 유전체 지도가 백인 1명의 유전체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것과 달리 다양한 인종을 포함한 것이 특징이다.

범유전체 지도를 분석한 결과 인간의 DNA 염기쌍은 기존에 알려진 것보다 약 1억1900만개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또 같은 유전자가 여러 번 반복되는 ‘유전자 중복’ 지역도 1115개가 새롭게 발견됐다. 실제로 현재 활용되는 인간 유전체 지도(GRCh38)보다 구조적 변이도 4% 많아, 인류의 유전적 다양성이 지금까지 연구 결과보다 훨씬 클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했다.

박종화 울산과학기술원(UNIST) 바이오메디컬공학과 교수는 “이번에 발표된 범유전체 지도는 아직 초안이지만, 기존에 알고 있던 통념을 크게 흔들어 놨다”며 “범유전체 지도가 완성된 이후에는 더 많은 생명체의 비밀이 풀릴 것”이라고 설명했다.

염색체의 일부 부위들이 섞이면서 DNA의 교환이 일어나는 현상도 확인했다. DNA는 세포의 핵 속의 좁은 공간에서 ‘X’자 형태로 뭉쳐진 염색체 구조로 존재하는데, 4개의 팔 중 짧은 팔 사이에서 재조합이 일어난 증거가 확인됐다. 염색체 재조합은 유전적 다양성을 만드는 기본적인 원리 중 하나로, 이전까지는 길이가 긴 팔에서 일어나는 재조합만 관측됐었다.

유전적 다양성을 표현하는 방법으로 제시된 '미니그래프 캑터스'. 과학계에서는 단순한 표현법을 넘어서 유전학 연구에서 다양성이 중시되는 패러다임 변화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나온다. /Darryl Leja, NHGRI

유전적 다양성을 표현할 수 있는 새로운 방식도 제시됐다. ‘미니그래프 캑터스(Minigraph-Cactus)’라고 부르는 이 방식은 DNA 염기서열 중 인종에 따라 차이가 나타나는 부분을 그래프 형태로 표현할 수 있다. 어떤 유전자에서 다양성이 높고, 어떤 인종에서 차이가 나타나는지 한눈에 확인할 수 있는 방식이다.

박 교수는 “이번에 발표된 논문 중 가장 혁신적인 연구는 유전적 다양성을 표시하는 방법을 제안한 논문”이라며 “앞으로 유전적 다양성을 손쉽게 확인할 수 있게 된 만큼 유전체 연구에서 다양성을 중심으로 한 연구로 패러다임이 옮겨갈 수 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범유전체 지도로 맞춤형 의료 길 열릴까

인간범유전체참조컨소시엄은 2021년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해 약 2년만에 범유전체 지도를 완성했다. 인간게놈프로젝트(HGP)를 통해 2003년 처음 만들어진 유전체 지도가 13년의 연구 기간 동안 약 3조5000억원을 들인 것과 비교하면 시간과 비용이 크게 단축됐다.

범유전체 지도가 빠르게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은 3세대 염기서열 분석법인 ‘텔로미어 투 텔로미어(T2T)’ 기술 덕분이다. DNA의 양 끝단에 있는 부위인 텔로미어 사이의 DNA 염기 300만쌍을 한 번에 읽는 기술로, 유전체 분석 속도와 정확성을 동시에 끌어올릴 수 있다.

기존 유전체 연구에서는 DNA를 절단해 읽은 후 양 끝을 붙여 다시 하나로 만들어야 했다. DNA에는 특정 염기서열이 반복되는 구간이 있어 양 끝을 붙이다 보면 이 부분에서 오류가 발생할 확률이 크다. 또 기존 유전체 지도는 약 20명에서 수집한 유전 정보를 조합해 만들어졌고, 심지어 데이터의 70% 이상이 한 사람의 것인 만큼 정확도가 크게 떨어지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범유전체 지도는 350개 이상의 인종에서 1000명 이상의 유전 정보를 모두 분석해 완성될 예정이다. 범유전체 지도가 완성되면 인종에 따른 유전자의 차이를 한눈에 확인할 수 있을 전망이다. 특히 최근 주목받는 맞춤형 의료에서 활용 가치가 클 것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가령 대표적인 대사질환인 당뇨병은 동양인과 서양인에서 발병률·원인·증상이 크게 다른데, 범유전체 지도를 통해 그 원인을 밝힐 수 있다는 것이다.

멜리사 미국 샌디애고대 보건과학대 교수는 “인종마다 질병의 원인과 증상이 다른 이유를 유전자 수준에서 확인할 수 있게 될 것”이라며 “인류의 보건 증진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백인들을 대상으로 한 질병 연구를 한국인에게 적용하면 실패하는 경우가 잦을 정도로 인종 간 유전자의 차이는 질병 연구에 중요하다”며 “한국인을 대상으로 한 범유전체 연구도 이뤄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참고자료

Nature, DOI: https://doi.org/10.1038/s41586-023-05896-x

Nature, DOI: https://doi.org/10.1038/s41586-023-05895-y

Nature, DOI: https://doi.org/10.1038/s41586-023-05976-y

Nature Biotechnology, DOI: https://doi.org/10.1038/s41587-023-01793-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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