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 민사 패소한 트럼프, '차원이 다른 타격' 받을까
[김효진 기자(hjkim@pressian.com)]
도널드 트럼프 미국 전 대통령이 27년 전 저지른 성폭력 관련 민사 소송에서 패소해 피해 여성에게 500만 달러(약 66억 원)를 배상하게 됐다. 차기 대선 출마를 선언한 트럼프 전 대통령은 지난 3월 미국 전·현직 대통령 중 처음으로 형사 기소된 뒤에도 굳건한 지지율을 유지했지만 사안의 성격상 이번 평결의 영향력은 차원이 다를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뉴욕타임스>(NYT)를 보면 9일(현지시각) 뉴욕남부연방지방법원 배심원단은 작가 E. 진 캐럴(79)이 1996년 뉴욕 맨해튼 버그도프 굿맨 백화점에서 트럼프 전 대통령에게 성폭력을 당했다며 지난해 제기한 민사 소송에서 캐럴이 당시 트럼프에게 성적 학대를 당했고 이를 폭로한 뒤 명예훼손을 당한 사실이 입증됐다고 평결했다. 배심원단은 이에 트럼프 전 대통령이 캐럴에게 500만 달러의 배상금을 지급하라고 명령했다.
배심원단은 트럼프 전 대통령이 캐럴을 성적으로 학대하고 그 행위로 인해 캐럴을 다치게 했다고 인정해 이에 대해 2백만 달러의 배상금을 지급해야 한다고 봤다. 다만 배심원단은 캐럴이 이번 소송에서 트럼프로부터 강간 당했다는 주장은 입증하지 못한 것으로 판단해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뉴욕주는 동의 없는 성적 접촉을 성적 학대로 본다.
나머지 3백만 달러의 배상금은 주로 캐럴이 2019년 성폭력 피해를 폭로한 뒤 트럼프 전 대통령이 이를 부인하는 과정에서 소셜미디어(SNS) 등을 통해 캐럴의 명예를 훼손한 것과 관련돼 있다. 이번 소송은 형사가 아닌 민사로 패소했다고 해서 트럼프 대통령이 형사상 유죄로 확정된 것은 아니며 이로 인해 감옥에 가거나 성범죄자로 등록되지도 않는다.
캐럴은 법정에서 1996년 버그도프 굿맨 백화점에서 우연히 마주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여성 친구를 위한 선물을 함께 골라달라고 부탁해 이를 돕던 중 속옷 매장 탈의실에서 강간당했다고 증언했다. 그는 당시 "극도의 고통"을 느꼈고 사건으로 인해 다시는 "낭만적 삶"으로 되돌아갈 수 없게 됐다고 말했다. 캐럴은 공소시효가 만료된 뒤에도 성폭력 피해자가 한시적으로 관련 민사 소송을 제기할 수 있도록 한 뉴욕의 성인 생존자법(Adult Survivors Act)에 따라 소를 제기할 수 있었다. 해당 법은 1년의 기한을 두고 지난해 11월24일 발효됐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캐럴이 "누구인지도 모른다"며 캐럴의 주장을 전면 부인해 왔다. 트럼프 쪽 변호사는 캐럴이 회고록을 팔기 위해 이번 소송을 일으켰다고 주장하며 법정에서 사건 당시 "왜 비명을 지르지 않았냐"고 캐럴을 압박해 빈축을 사기도 했다.
캐럴은 "나는 원래 비명을 잘 지르지 않는 사람이고 당시 싸우는 중이었다"며 "내가 비명을 질렀든 아니든 그는 나를 강간했다"고 말했다. 캐럴은 많은 여성들이 '왜 비명을 지르지 않았냐'는 질문에 맞닥뜨리기 때문에 성폭력을 당한 뒤에도 입을 다물게 된다고 꼬집었다.
미국 반성폭력단체 레인(rainn)은 성명을 내 이번 평결이 "얼마나 큰 권력을 가졌든 모든 가해자들이 책임을 질 수 있고, 지게 될 것이라는 것을 보여줬다"며 환영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평결 뒤 소셜미디어를 통해 "항소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나는 그 여성이 누군지 전혀 모른다"는 기존 주장을 반복하며 "재판이 매우 불공정했다"고 비난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혼외 성관계에 대한 입막음 돈 지급을 위해 사업 장부를 조작했다는 혐의로 3월 형사 기소 됐고 2021년 1월6일 의사당 폭동 선동 혐의, 2020년 대선에서 조지아주 선거 결과에 개입하려 한 혐의 등 수많은 법적 조사에 직면해 있지만 지지율은 탄탄하게 유지됐다. 여론조사에서 당내 경쟁자인 론 디샌티스 플로리다 주지사를 멀찌감치 따돌리며 확고한 1위를 굳힌 상태다.
그러나 이번 평결은 앞선 혐의들과는 차원이 다른 파장을 미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워싱턴포스트>(WP)는 "사건의 추악함" 자체가 문제라고 지적했다. 매체는 이 사안이 트럼프 전 대통령이 받고 있는 혐의인 "금융 범죄·선거 개입·의사당 폭동 선동과 다르다"며 "여성에 대한 성적 학대는 매우 민감한 문제"라고 짚었다.
2017년 미 퀴니피악대 설문조사를 보면 당시 제기된 다수의 성추행 폭로가 사실로 판명될 경우 61%의 응답자가 재임 중인 트럼프 대통령이 탄핵돼 자리에서 물러나야 한다고 답했다. 캐럴 외에도 10명이 넘는 여성이 트럼프 전 대통령의 성폭력 가해를 폭로한 바 있다.
법무부 조사나 검찰이 주도하는 형사 소송과는 달리 이번 소송은 민사로 진행돼 9명의 평범한 시민들이 평결을 내렸다는 점도 트럼프 전 대통령 쪽엔 타격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트럼프 전 대통령 쪽이 주장해 온 정치 공세나 "마녀 사냥"과 연관시킬 수 있는 여지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영국 BBC 방송은 "평범한 미국 시민들이 증거에 기반해 트럼프 전 대통령이 잘못을 저질렀다는 점을 발견했다"며 이는 범죄 수사와는 다른 방식으로 트럼프 전 대통령에게 타격을 입힌다고 지적했다.
미 NBC 방송은 이번 평결 뒤 공화당 소속 상원의원들 사이에서 트럼프 전 대통령에 대한 불안이 커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마이크 라운즈 상원의원은 민사 소송을 통해 성적 학대 이력이 인정된 이를 대통령 후보로 지지할 수 있겠냐는 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그렇게 하기 어렵다"고 답했다. 존 코닌 상원의원은 트럼프 전 대통령이 "대선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미트 롬니 상원의원은 "미국인들도 도널드 트럼프에 대해 (뉴욕 배심원단과) 같은 결론에 도달하기 바란다"고 비꽜다.
다만 <뉴욕타임스>는 트럼프 쪽 변호사 조 태커피나가 이번 패소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대선 가도에서 탈선하게 될 수도 있냐는 질문에 "아니다"라고 단언했다고 전했다.
[김효진 기자(hjkim@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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