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품이 꺼질 때의 풍경 [편집국에서]

김경락 2023. 5. 10.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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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게티이미지뱅크

김경락 | 경제산업부장

두해 전 공기업에서 일하는 한 친구가 찾아왔다. 오랜만에 만나 지난 시절 이야기를 나누다, 어느새 화제는 앞으로의 삶으로 넘어갔다. 직장 생활이 길어야 10년 남짓밖에 안 남은 또래 모임에서 빠질 수 없는 주제가 등장한 셈인데, 그의 말이 뜻밖이었다. “5년쯤 더 일한 다음 전업투자자로 나서려고 해.”

누구나 부러워하는 번듯한 직장에서, 심지어 잘나가는 친구가 조기 퇴사할 마음을 먹고 있는 점이 의아했지만, 그보다 전업투자자를 꿈꾸고 있는 게 신기했다. 누구보다 저축밖에 모를 듯한 착실하고 착실한 성품의 그였기 때문이다. 좀더 이야기를 들어봤다. “연간 20~30% 수익은 내가 확실히 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쪽에 재능이 있다는 확신이 있어.” 투자는커녕 경제와도 담을 쌓고 살던 친구는 나름의 계획을 세워두고 있었다. “여윳돈이 좀 있거든, 연 20% 수익이면 연봉만큼은 아니지만 세 식구 먹고사는 데는 문제가 없을 거 같아. 어떤 거 같아?”

한달쯤 뒤엔 민간기업에서 일하는 친구네와 남해안으로 낚시 여행을 갔다. 이동 중에 아이들이 잠들자 친구는 뜬금없이 주식 이야기를 꺼냈다. “테마주가 제일이더라고. 주식이라는 게 공부한다고 되는 게 아니야. 테마 잘 보고 들어가고 또 빠질 때 미련 없이 빠지는 게 능력이야.” ‘정치인 테마주’ 투자로 1년치 연봉을 벌고 난 뒤 미련이 남을까 봐 주식 계좌를 모두 없앴다면서도 친구는 ‘정보 없느냐’고 은근히 물어왔다. 언론사에서 경제 기자 짬밥을 좀 먹었으니 돌아다니는 쏠쏠한 투자 정보 한두개쯤은 알고 있지 않겠냐는 짐작 속에 던진 질문이었다.

앞선 친구에겐 세계적 투자가 워런 버핏의 연평균 수익률이 약 20% 정도란 사실을 알려줬고, 두번째 친구에겐 테마주에 빠져 수시로 회사 화장실에서 주식 창 열어 보며 살고 싶냐고 타박했던 기억이 난다. 친구들은 샌님 같은 내 말에 마뜩잖아하는 게 역력했지만 더 해줄 이야기는 ‘정말’ 없었다. 다만 며칠 뒤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보내줬다.

“친구가 부자가 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큼 사람들의 안락과 판단력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일은 없다.” 금융위기의 역사를 다룬 고전 <광기, 패닉, 붕괴: 금융위기의 역사>(찰스 킨들버거)에 나오는 한 토막이다. 평범하디평범한 친구들이 주식에 흠뻑 빠져 인생 항로까지 수정하려는 데는 분명 코로나19가 만든 대세 상승장에서 큰돈을 만진 지인이 있으리라 생각됐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네이버증권’ 메인 화면의 왼쪽 하단을 차지하고 있는 금융 상품 목록이 눈에 들어왔다. 거래량순으로 구성된 이 목록의 윗자리에는 기초자산 변동분의 두배 내지 세배의 수익을 추구하는 파생상품이 차지하고 있었다. 조금 더 살펴보니 미국 투자에 나선 ‘서학 개미’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상품이 미국의 특정 지수나 상품을 기초자산으로 삼는 파생상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른바 ‘×2’, ‘×3’ ‘인버스’란 수식이 상품명에 들어 있는 금융상품이다. 과연 그 수많은 개미가 상품의 위험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겠느냔 의문이 들었지만, 계속 올라가는 지수(혹은 가격)를 보면서 샌님 노릇 하다 좋은 세월을 흘려보내고 마는 거 아닌가란 자괴감과 불안감이 나 역시 들었다. 킨들버거의 묘사는 나에게도 해당하는 얘기였던 셈이다.

옛 기억이 떠오른 건 올해 들어 잇따라 터지고 있는 경제 사고(혹은 사건)를 마주하면서다. 저금리 환경 속에 풀린 유동성이 밀어올린 자산 가격이 글로벌 긴축 시대를 맞아 하나둘 파열음을 내고 있다. 여러명 목숨을 앗아간 전세사기도 부동산 급등기 속 만연했던 갭투자(기)가 뿌리에 있으며, 소시에테제네랄(SG)증권발 주가 폭락과 그 뒤에 숨어 있는 주가조작도 대세 상승기에 올라타고 싶은 이들의 심리를 교묘하게 꾀어낸 것으로 볼 수 있다. 김남국 의원(더불어민주당)의 코인 투자를 둘러싼 논란도 유동성 파열음의 한 단면으로 볼 수 있겠다. 과잉 유동성이란 폭풍우가 휩쓸고 지나간 자산시장엔 그 잔해들이 곳곳에 널려 있으며, 그 안에 비명이 가득하다. 인간 본성에 기반을 둔 한때의 희열과 현재의 고통을 우리 사회는 어떻게 보듬으며 나아가야 할까.

sp96@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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