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극’에 비친 ‘비극’과 마주하다···국립극단 ‘벚꽃 동산’
러시아 귀족 여성 라네프스카야는 6년 만에 고향에 돌아온다. 딸 아냐가 하인의 밥값을 걱정할 정도로 가세가 기울었다. 그의 영지인 벚꽃 동산의 아름다움은 백과사전에 실릴 정도로 유명했지만 지금은 경매에 넘겨질 위기에 처했다. 로파힌은 이 집안 농노의 자식으로 태어나 상인으로 성공한 부자이다. 로파힌이 벚꽃 동산을 별장용지로 임대해 빚을 갚자고 설득해도 라네프스카야는 딴청만 피운다. 경매 날짜인 8월22일이 목전인데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국립극단이 서울 중구 명동예술극장에서 이달 28일까지 공연하는 <벚꽃 동산>은 국립극단 단장이자 예술감독인 김광보가 연출 인생 30년 만에 처음 내놓은 안톤 체호프 작품이다. 그는 고전을 꼼꼼히 분석해 현대적 감각에 맞도록 차분하게 연출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인기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 출연한 배우 백지원이 주인공 라네프스카야 역을 맡았다. 티켓은 전 회차 전석 매진됐다.
김광보 연출은 10일 명동예술극장에서 기자간담회를 열어 “관객이 다양한 인물 군상에 자신의 삶을 투영해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벚꽃 동산>을 연출하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 “저는 지금까지 체호프를 잘 몰랐고 관심도 없었습니다. 서사가 분명하고 임팩트 있는 작품을 좋아해왔죠. 그런데 늙은 하인 피르스의 마지막 대사 ‘살긴 살았지만 도무지 산 것 같지 않아’에서 인생의 성찰을 느끼고 깊은 감명을 받았어요.”
기자가 첫 회차를 관람한 지난 4일 극장에 들어서자마자 거대한 투명 유리 구조물로 둘러싸인 무대가 눈에 들어왔다. 유명 무대 디자이너 박상봉의 작품이다. 라네프스카야의 몰락을 예정한 것처럼 공허하고 금방 부서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인다. 배우가 어디에 있든 관객 시선에 노출되는 구조의 무대이다. 김 연출은 “유리 세트는 배우의 뒷모습이 비치기 때문에 뒷모습까지 연기해야 한다”며 “배우에게는 큰 부담이지만 관객이 거울처럼 자신을 투영할 수 있다는 점에서 쌍수를 들어 환영했다”고 말했다.
김 연출은 직접 체호프의 대본을 윤색하면서 15차 버전까지 만들었다고 한다. 부랑인 같은 단역을 제외한 주요 배역이 12명이나 등장하는데도 각자의 캐릭터가 뚜렷하게 구분되는 편이다. 체호프는 생전에 <벚꽃 동산>을 비극이 아닌 희극으로 생각했지만 독특한 비감(悲感)이 느껴진다.
김 연출은 “저는 이 작품을 ‘희비극’으로 풀어가려고 했다”며 “희극적인 요소가 비극적으로 느껴지는 역설에 주안점을 뒀다”고 말했다. “여러 버전의 <벚꽃 동산>을 봤는데 라네프스카야의 허황된 모습이 많이 강조돼 있었어요. 감히 말씀드리자면 제가 대본을 읽은 느낌과는 달랐죠. 이 작품은 라네프스카야의 정서를 따라간다고 생각하고 천진난만한 외면 뒤에 아픔이 있는 인물로 표현하려고 했어요.”
연극을 이끌어가는 라네프스카야와 로파힌의 감정선은 이해하며 따라가기가 쉽지 않다. 라네프스카야는 벚꽃 동산이 경매에 넘어갈 위기를 분명히 알면서도 전혀 모르는 것처럼 행동한다. 어린 아들이 강에 빠져 죽은 과거를 이야기하며 울다가 콧수염 이야기로 웃음을 터뜨린다. 로파힌은 라네프스카야를 존경과 애정으로 대하다가 별안간 폭발적인 울분과 광기를 드러낸다.
라네프스카야를 연기한 백지원은 이날 “라네프스카야는 벚꽃 동산이 경매에 넘어가는 상황을 모두 알지만 받아들이기 어려운 현실에서 도망치는 인물”이라며 “웃으면서 이야기하지만 점점 깊어지는 불안감과 상실감이 관객에게 느껴지길 바라며 연기했다”고 말했다. 백지원은 <벚꽃 동산>으로 5년 만에 연극 무대에 복귀했다. 김 연출은 “백지원이 관객에게 신뢰감을 주는 호흡과 목소리를 가진 배우라고 생각해 바로 출연을 제안했다”고 전했다.
로파힌을 연기한 이승주는 “로파힌이 라네프스카야보다 현실적으로 보이지만 누구보다 자신의 과거에 얽매였다”며 “온전히 사랑을 받은 적이 없기 때문에 사랑을 줄 수도 없는 인물이라고 생각하며 연기했다”고 말했다.
<벚꽃 동산>의 시대적 배경은 러시아 귀족 사회가 몰락해가는 19세기다. 황제 알렉산드르 2세가 농노 해방령을 발표한 1861년 이후이다. 농노 해방은 토지 소유 구조를 변화시키고 상인(부르주아) 계급을 만들어 자본주의가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1차 러시아 혁명을 1년 앞둔 1904년 <벚꽃 동산>이 초연됐고, 체호프는 결핵으로 사망했다.
피르스의 2막 대사 중에 ‘줄 끊어지는 소리’를 농노 해방령 때 들었다는 대목이 있다. 체호프 원작의 마지막 장면은 이 소리가 다시 울려 퍼진다는 지시문으로 끝난다. 이 소리는 구시대가 물러가고 신시대가 다가오는 상징으로 풀이된다. 김 연출은 마지막 장면에서 ‘줄 끊어지는 소리’를 없애고, 저택에 혼자 남겨진 피르스 위로 꽃비가 조용히 내리도록 구성했다. 김 연출은 “불행을 암시하고 비극성을 강조하는 소리라고 판단해 없애고 피르스의 마지막을 더 강조했다”고 말했다.
허진무 기자 imagin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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