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수칼럼] ESG, 유행 아니다

김명수 기자(mskim@mk.co.kr) 2023. 5. 10.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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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진 각국 ESG표준 도입
국제 공급망 영향 커지고
기업 비용·수익에도 타격
수출기업, 친ESG사업으로
다 뜯어고쳐야 생존한다

2011년 '월가를 점령하라' 시위가 일어나자 미국 재계는 발칵 뒤집힌다. 시위대는 세계 금융위기 이후 미국 은행들은 혈세로 살아남았지만 일반 국민들은 실업자 신세가 되었다는 불만을 쏟아낸다. 시위는 미국에서만 벌어지지 않는다. 전 세계로 확산된다.

이러다 자본주의가 망한다는 걱정이 미국 재계에 번진다. 결국 미국 재계는 숙고에 들어간다. 미국 200대 기업 CEO들로 구성된 비즈니스라운드테이블은 월가 시위 다음 해인 2012년 긴급 진화에 나선다. '이해관계자 자본주의' 선언을 내놓는다.

신자유주의가 주류를 이루던 시대에 주주 이익만이 아니라 고객과 종업원, 협력사까지 이익이 되게 기업을 운영하겠다는 미국 대표 기업인들의 다짐은 엄청난 사건이다. 특히 선언문에는 고객, 종업원, 협력사 등이 주주보다 앞서 거론된다.

자본시장에서는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를 기초로 한 ESG(환경·책임·투명경영)가 제2충격을 준다.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 블랙록을 이끄는 래리 핑크 회장은 2016년 CEO 서한을 통해 "기업은 장기적 관점에서 성장을 목표로 해야 하며 지속가능한 이익을 위해서는 ESG에 집중해야 한다"는 투자원칙을 기업들에 통보한다. 핑크는 당시 기업인 친구에게 핀잔을 들었다. ESG라는 개념도 생소할 뿐만 아니라 좌파적 색채의 기업경영을 주문했다는 질타였다.

핑크는 지속가능성을 내세우지만 알고 보면 자본주의 체제 붕괴를 막아보자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자본주의 부작용 여파로 사회주의로 전환해야 한다는 주장이 득세하기 전에 ESG라는 인류 보편가치를 통해 자본주의 지속 가능성에 방점을 둔 셈이다.

미국 기업들은 주주인 블랙록의 '지시'에 맞춰 생각보다 빨리 ESG 도입에 나선다. 일부 기업들은 정치적 사안에 적극 개입하면서 '깨어 있는 척하는(woke) 자본주의'라는 정치적 공격을 받는다. 애플 월트디즈니 등 일부 기업들은 ESG에 반하는 미국 대법원 판결(낙태권 폐지)에 맞서거나 지방정부 입법(성 정체성 교육 금지)과정에 개입해 보수 정치인들의 역공을 당한 것. 전통적 에너지 기업들이 포진한 일부 주 정부는 블랙록에 맡긴 돈을 대거 빼내기도 한다. 펀드평가사 모닝스타에 따르면 지난해 전 세계 ESG 관련 펀드나 ETF(상장지수펀드)로의 자금 순유입은 1573억달러에 그친다. 전년 순유입액 6391억달러 대비 76%나 감소한다. 급기야 "기업 경영에만 한정해야 ESG도 지속가능하다"는 반성의 목소리가 커졌다(문화전쟁에서 ESG 구하기,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 2023년 2월).

우리 기업들은 미국 기업처럼 ESG 정치화에 동참하지 않길 바란다. 그러나 ESG를 도입하면 경영에 좋고, 도입하지 않아도 무난한 정도의 변수는 아니다. 공급망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다. 애플의 반도체 납품사인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가 앞으로 재생에너지를 많이 쓰겠다는 RE100 선언을 하는 것도 그 연장선상이다.

무엇보다 각국 정부의 제도나 표준규격 도입이 활발하다. 이 때문에 과거 비재무지표만 영향을 주는 정도가 아니라 재무적 요인, 즉 기업 수익이나 비용에도 영향을 줄 정도로 이미 경제 내에 상수로 자리 잡았다. 특히 유럽연합(EU) 역내 기업들은 2025년부터 순차적으로 ESG 정보를 공시해야 한다. 유럽에 수출하는 역외 기업들도 ESG 공시 의무가 부여된다. 수출로 먹고사는 우리 기업들엔 이제 ESG 정보 공시가 남의 일이 아니다.

유럽판 인플레이션감소법(IRA)이라 불리는 탄소국경조정제도(CBAM) 도입도 초읽기에 들어갔다. 철강 알루미늄 시멘트 수소 등 제품을 EU에 수출하는 국내 기업은 2026년부터는 제품 생산과정에서 EU 기준을 넘는 탄소배출량에 대해 배출권을 사야 한다. 사실상 추가 관세인 ‘탄소세’를 부과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탄소세는 그 자체로서 비용에 큰 영향을 주는 요인이다.

RE100, CBAM 등 새로운 ESG발 무역장벽이 생기면서 수출위주 우리 기업들에게 비상이 걸렸다. 특히 반도체, 철강 등 에너지 소비가 많은 기업들에게 국제 규제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우리 기업들은 이래저래 사업하기 힘들어졌다. 피하기 어렵다면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야 한다. 기존 사업을 ESG에 친화적인 사업으로 대전환할 때이다.

기업 자체 노력 못지않게 정부 정책도 시급하다. 기업이 ESG 무역장벽을 뛰어 넘을 수 있도록 정부는 친환경에너지 공급을 위한 전력인프라 투자에 적극 나서야 한다. 노동과 금융, 회계 이슈도 기업들에게는 또 다른 규제다. 우리 기업들이 ESG 국제표준 때문에 피해를 보지 않도록 지원하는 것은 정부의 의무다. 이제 ESG는 유행이 아니라 전 세계 경제에 구조화된 패러다임이다.

[김명수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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