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서진 사람들 손잡는 마음으로 쓸게요"
삶 뒤틀려 표류하는 예술가
암투병 후 떠난 오랜 친구
작별과 마주하는 인생 담아
지나고 보면, 다음은 없어
삶의 동반자들 항상 확인해야
서울 평창동 작업실 책상에서 그의 작은 연필깎이가 부서져 버렸다. 아무리 애를 써도 조립에 실패했다. 고장 난 연필깎이 하나에도 서운함을 말끔히 털지 못하는 건 10년을 함께했던 익숙한 사물과의 결별보다도, 갈수록 무언가 헤어지는 일이 부쩍 잦아졌다는 이상한 감정 때문에서다.
"시간이 지날수록 작별하는 일이 제게 파도처럼 밀려오는 것 같습니다. 매일 작별을 마주하는 게 인생의 시간인가 봐요."
신경숙 작가가 소설집 '작별 곁에서'를 출간했다. 현대사에 휘말려 귀국길이 막힌 유엔 외교관과 시를 쓰는 그의 아내, 타국에서 세상을 떠나 영영 '먼 집'으로 떠난 오랜 친구 등 '세상에 내던져진' 사람에 관한 이야기다. 지난 9일 서울 종로구 창의문 근처 카페에서 신 작가를 만났다.
"2014년 발표됐던 소설과 코로나19를 겪으며 쓴 단편을 모으니 키워드가 '작별'이었어요. 삶의 방향이 뒤틀려 낯설게 표류하는 사람, 그래서 모국어를 더 갈구하는 예술가 이야기예요."
첫 단편 '봉인된 시간'은 1979년 봄 뉴욕 맨해튼으로 발령을 받은 유엔 외교관 부부의 이야기다.
그해 10월, 모두가 알다시피 서울에서 한 발의 총성이 울린다. '암살자'의 전 비서실장 출신인 남편은 순식간에 조국에서 버림받은 유배자가 된다. 부임 6개월 만에 불법체류자로 전락한 최고위층 외교관 부부는 밑바닥부터 시작해 도넛 가게를 꾸리며 삶을 모색한다. 실존 인물 K시인의 생을 소설화했다.
"비자가 끊겼지만 12·12쿠데타로 돌아갈 길이 완전히 막혀버려요. 시를 쓰는 '나'는 모국어의 간절함을 더 갈구하게 됩니다. 그리워만 하면서 일생을 살 수밖에 없던 K시인을 자주 생각해요. 차갑고 부서진 자리에서 모국어는 더 절실한 것이니까요. 예술가에게 모국어는 뺨 밑에 흐르는 실핏줄, 아니 실핏줄 속에 흐르는 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해요."
다른 단편 '배에 실린 것을 강은 알지 못한다'는 고대 근동을 공부하러 독일로 떠난 오랜 친구의 암 투병 소식을 들은 '나'의 이야기다. '나'는 친구가 보낸 작별 이메일을 보고 유럽으로 간다. 하지만 삶의 마지막 순간을 앞둔 친구는 '나'를 만나지 않는다. 소설 제목은 인도 설치미술가 수보드 굽타의 2012년 작품에서 왔다. 한 인간은 강 위에 떠 있는 수많은 배 중에 하나로, 우리는 서로를 알지 못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시를 조금 들여다본 이들은 다 알겠지만 H시인 얘기다.
"애도하는 마음,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생사의 고통 앞에 선 친구와 끝까지 동행하지 못한 마음이었습니다. 유럽에 들를 때마다 친구를 만났습니다. 한번은 베를린이었는데 뮌스터에서 들고 온 씨앗을 주더라고요. 나중에 꽃피우니 금잔화였습니다. 아직도 매년 마당에 피는데 그때마다 떠난 친구가 제 이름을 불러주는 기분이에요."
인생을 살다보면 모두가 알게 된다. 우리들 사이에 '다음'은 없었다는 것을. 신 작가는 "지나고 보면, 다음은 없다"고 확언한다.
"얼마간의 게으름, 얼마간의 바쁨, 그래서 '다음에 하자' 했던 것들이 지나고 나면 작별 전에 이뤄지지 못했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됩니다. 삶이라는 배에 우리가 함께 타고 있음을 항상 확인해야 하는 건 그 때문일 거예요."
소설가 신경숙에게 글쓰기는 무엇일까. 신 작가는 무거운 표정으로, 그러나 분명하게, "글쓰기는 나의 숨, 호흡(呼吸)과 같은 것"이라고 털어놓는다. "글쓰기는 제가 하고 안 하고 선택할 수 있는 무엇이 아니에요. 삶이 진행되는 동안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표지도 찢어지고 낡아 읽을 수 없고 작가나 출판사 이름도 해지고 지워진 책이 좁은 골목 구석에서 발견되어도, 주워서 몇 장 읽고 '이건 신경숙이 쓴 거네' 하고 느낄 수 있는 글을 쓰고 싶습니다."
신 작가는 이번 소설의 표제작 '작별 곁에서'에 등장하는 유정을 기억해달라고 당부했다.
제주에 사는 유정은 인생이 한순간에 무너진 작별을 겪고 제주를 찾은 '나'에게 친밀하게 다가간다. 유정과 함께 4·3 비극의 흔적을 본 '나'는 깨닫는다. 내 숨이 내 것인 것만이 아니며, 다 살지 못한 사람들 몫까지 내가 함께 살고 있다고.
"유정은 부서지려고 하는 사람들을 손잡아주고 일으켜주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유정만이 이번 책에서 이름을 가져요. 작별만 남은 삶이지만 우리 안에 모두가 유정을 하나씩 품자는 마음이었어요. 유정처럼 다가가는 소설을 쓰고 싶습니다."
[김유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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