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 종착역 '피노 누아'… 생산지별 우열 가리기 힘드네 [김기정 컨슈머전문기자의 와인 이야기]

김기정 전문기자(kijungkim@mk.co.kr) 2023. 5. 10.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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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노 누아
레드와인 포도 피노 누아
佛 부르고뉴 최고라 하지만
美 캘리포니아·오리건서도
정상급 수준의 와인 생산돼
서로 비교하며 마셔본다면
와인 즐기는 재미 더 커져
WSA와인아카데미 시음회에 나온 피노 누아 와인들. 왼쪽부터 칼레라의 마운트 할란 젠슨 빈야드 2019, 도멘 장테 팡시오의 쥬브레 샹베르텡 2018, 라미의 러시안 리버 밸리 2017, 도멘 푸아조 페레 에 피스의 코르통 브레상드 2016, 더 힐트의 더 뱅가드 피노 누아 2017.

같은 포도 품종을 사용한 와인을 여러 지역별로 비교해 가며 마시는 것도 와인을 마시는 즐거움을 더할 수 있는 한 방법입니다. 와인이야기 15회에서 소노마 카운티 '센시스' 와인을 소개하면서 '샤르도네'라는 똑같은 품종의 포도로 와인을 만들어도 포도밭마다 각기 다른 맛의 4종류의 화이트와인이 나왔다고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이번엔 레드와인의 포도품종인 '피노 누아'를 비교해 보고자 합니다.

'피노 누아'는 섬세하지만 그 맛의 미세한 차이를 즐기기 전까지는 다소 심심하다고 여겨집니다. 아무래도 타닌이 강렬한 카베르네 소비뇽이나 살짝 달달한 시라, 아니면 강인한 말벡과 같은 개성이 도드라지는 와인들이 먼저 주목을 받습니다.

하지만 와인을 오래 계속 마시면 마실수록 와인의 끝판왕은 부르고뉴 피노 누아라는 의견이 많습니다. 어디까지나 와인은 개인 취향이기 때문에 누가 어떤 걸 좋아한다고 해서 전혀 이상할 일이 없지만 상당수 와인 애호가들이 부르고뉴 피노 누아를 와인의 종착역으로 삼고 있는 걸 보면 다소 신기하기까지 합니다.

지난해 한국을 방문한 도멘 장테 팡시오의 소유주인 파비앙 장테(오른쪽)가 매일경제신문 김기정 컨슈머 전문기자와 부르고뉴 와인에 대해 얘기를 나누고 있다.

'피노 누아' 하면 역시 떠오르는 영화가 '사이드웨이'입니다. 와인이야기 3회에서 보르도 우안(Right Bank)의 대표 와인인 슈발 블랑을 설명하면서 사이드웨이를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 마일스는 '피노 누아'를 예찬하면서 캘리포니아 샌타바버라의 와이너리들을 순례합니다.

실제로 캘리포니아 소노마 카운티의 러시안 리버 밸리, 샌타바버라, 오리건주의 피노 누아는 이미 정상급 수준에 올라와 있습니다. 부르고뉴라는 브랜드가 주는 '프리미엄'을 제외하고 그냥 와인만 놓고 블라인드로 테이스팅을 하면 미국 피노 누아가 더 높은 점수를 받을 것이란 평가도 나옵니다.

얼마 전 WSA와인아카데미에서 흥미로운 와인 시음 강좌를 열었습니다. 부르고뉴와 캘리포니아의 피노 누아를 비교 테이스팅하는 강좌였습니다. 저는 일부러 어떤 와인들이 나오는지를 살펴보지 않았습니다. 와인 이름을 먼저 보면 시음할 때 선입견이 생길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부르고뉴 피노 누아는 영 빈티지부터 올드 빈티지까지, 테이블와인 수준의 와인부터 그랑 크뤼 와인까지 폭넓게 마셔봤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맞힐 수 있을 것이란 자신감도 있었습니다.

시음에 앞서 제 나름대로 몇 가지 가정도 세워 봤습니다. 우선 숙성된 맛을 내는 올드 빈티지 피노 누아는 한국에서 구하는 것 자체가 어렵고 가격도 비싸기 때문에 시음회에 나올 수 있는 와인은 모두 영 빈티지일 것으로 추측했습니다. 부르고뉴 피노 누아는 영 빈티지의 경우 대부분 산도가 높고 숙성된 맛을 느끼기 힘듭니다. 반면 캘리포니아 피노 누아는 영 빈티지라도 어느 정도 숙성된 맛을 내는 와인들이 있습니다.

결론만 말하자면 부르고뉴 피노 누아와 캘리포니아 피노 누아를 잘 구분해내지 못했습니다. 5개 와인 중 3개를 맞혔는데 '숙성도'만 가지고 구분하기엔 무리가 있었습니다.

캘리포니아 와인 '더 힐트'의 와인 메이커인 맷 디즈.

'가정' 자체가 틀렸을 수도 있습니다. 시음에 나온 와인들의 빈티지가 모두 달랐던 점도 패착이었습니다.

결과를 보고 다시 한번 음미해 봤는데 캘리포니아 피노 누아는 이런 맛이다, 또는 부르고뉴 피노 누아는 저런 맛이다고 특징 짓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와이너리마다 피노 누아의 맛이 너무 다르지 않나 생각을 해봤습니다. 다행히 제가 마셔본 적이 있는 도멘 장테 팡시오(부르고뉴)와 더 힐트(캘리포니아)는 맞힐 수 있었습니다.

박수진 WSA와인아카데미 원장은 "일반적으로 부르고뉴 피노 누아가 높은 산도와 섬세한 과일향, 미국 캘리포니아를 비롯한 뉴월드의 피노 누아는 좀 더 보디감이 좋고 달콤한 과일 풍미라고 하지만 생산자와 빈티지마다 개성이 다 달라서 일반화하기는 어렵다"고 말했습니다.

시음회 참석자들로부터 가장 많은 인기를 얻었던 와인은 칼레라의 마운트 할란 젠슨 빈야드 2019입니다. 캘리포니아 몬터레이 베이에서 동쪽으로 40㎞ 떨어진 마운트 할란에서 생산되는 와인입니다. 1975년부터 피노 누아 재배를 시작해 1978년 처음 생산해 '캘리포니아 피노 누아의 선구자'로 불립니다. 캘리포니아에서 부르고뉴 스타일 피노 누아를 만들겠다는 목표로 와인 생산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저는 블라인드 테이스팅 때 부르고뉴 와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산도가 좋았고 신선한 과일향, 꽃향이 뛰어났습니다. 깔끔한 영 빈티지 부르고뉴 피노 누아라고 생각했는데 캘리포니아 피노 누아였습니다.

도멘 장테 팡시오의 쥬브레 샹베르텡 2018은 상대적으로 맞히기 쉬웠습니다.

지난해 도멘 장테 팡시오의 오너인 파비앙 장테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그를 직접 만나서 얘기도 나누고 함께 도멘 장테 팡시오 와인들을 마실 기회가 있었습니다. 당시에 마셨던 도멘 장테 팡시오 와인들 중에 피노 누아로 만든 건 부르고뉴 피노핀 2015, 샹볼 뮈지니 비에이 비뉴 2019, 쥬브레 샹베르텡 프리미에 크뤼 르 푸아스노 2020, 샤롬 샹베르텡 2020, 쥬브레 샹베르텡 엉 샹 2018 등입니다. 대부분 영 빈티지 피노 누아라 산도가 매우 높았는데 부르고뉴 피노 누아의 전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숙성되면서 날카로운 산미가 부드럽게 변하는 과정이 부르고뉴 피노 누아의 가장 큰 매력이라고 생각합니다. 파비앙 장테를 만났을 때는 급등하고 있는 부르고뉴의 와인 가격에 대한 얘기도 나눴습니다.

당시 파비앙 장테는 "엔트리 레벨 와인들은 와인을 처음 접하는 소비자들이 마실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더 신경 써서 만든다"고 말했던 기억이 납니다.

라미의 러시안 리버 밸리 2017 역시 참석자들로부터 인기가 많았습니다. 캘리포니아 러시안 리버 밸리 와인인데요. 꾸리꾸리한 향이 매력적이긴 했는데 저는 잘 모르겠지만 '캘리포니아 피노 누아 같다'고 테이스팅 노트에 남겨 놓았습니다. 와인, 커피 등 농업 쪽으로 유명한 UC데이비스를 졸업한 데이비드 라미는 보르도의 유명 와인 '페트루스'에서 양조기술을 배웠다고 합니다.

이날 시음했던 와인 중 제가 가장 좋아했던 와인은 도멘 푸아조 페레 에 피스의 코르통 브레상드 2016입니다. 숙성 잠재력이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와인 이름을 공개하고 보니 2016년 빈티지라 이날 시음한 다른 와인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병숙성한 기간이 꽤 긴 와인이었습니다. 스파이시한 허브향이 무척 매력적이어서 오히려 부르고뉴 피노 누아 와인이란 생각이 잘 안 들었습니다. 그래서 블라인드 테이스팅 때 캘리포니아 피노 누아라고 적었는데 보기 좋게 틀렸습니다.

마지막으로 더 힐트의 더 뱅가르드 피노 누아 2017도 비교적 쉽게 캘리포니아 피노 누아라고 맞힐 수 있었습니다. 더 힐트 와인은 '와인이야기' 13회에서 샌타바버라 와인을 소개하면서 언급한 와인입니다.

미국 컬트 와인의 대명사 '스크리밍 이글'을 보유한 스탠 크론키가 샌타바버라의 잠재력을 믿고 만든 와인이 '더 힐트'입니다. '더 힐트'의 와인메이커인 맷 디즈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에스테이트 레벨 피노 누아와 싱글 빈야드 '라디안'의 피노 누아를 비교 테이스팅한 적이 있습니다. 맷 디즈가 당시 인터뷰에서 "더 힐트의 피노 누아는 너무 달지 않게, 흙 맛이 나게 만들려고 노력했다"는 표현이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이날 시음회에 나온 5개 와인 중 2개는 비교적 최근에 마셔본 와인이라 '반타작'이라도 할 수 있었습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지요. 와인에 대해서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가늠하기 힘든 깊이에 한 발씩 빠지는 것 같습니다. 또 와인을 공부하는 데 있어 많이 마셔보는 것 이상의 방법은 없는 것 같습니다. 동시에 와인의 세계는 알면 알수록, 마시면 마실수록 더 어려운 것 같습니다. 그게 또 와인의 매력입니다.

[김기정 컨슈머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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