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는 나의 숨··· 부서진 사람들 손잡는 마음으로 쓸게요” [신경숙 인터뷰]

김유태 기자(ink@mk.co.kr) 2023. 5. 10.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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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집 ‘작별 곁에서’ 출간 신경숙 인터뷰
서울 종로구 창의문 인근 카페에서 만나 소설가 신경숙. [이충우 기자]
평창동 작업실 책상에서 그의 작은 연필깎이가 부서져 버렸다. 아무리 애를 써도 조립에 실패했다. 고장난 연필깎이 하나에도 서운함을 말끔히 털지 못하는 건 10년을 함께 했던 익숙한 사물과의 결별보다도, 갈수록 무언가와 헤어지는 일이 부쩍 잦아졌다는 이상한 감정 때문에서다.

“시간이 지날수록 작별하는 일이 제게 파도처럼 밀려오는 것 같습니다. 매일 작별을 마주하는 게 인생의 시간인가 봐요.”

신경숙 작가가 소설집 ‘작별 곁에서’를 출간했다. 현대사에 휘말려 귀국길이 막힌 UN외교관과 시를 쓰는 그의 아내, 타국에서 세상을 떠나 영영 ‘먼 집’으로 떠난 오랜 친구 등 ‘세상에 내던져진’ 사람에 관한 이야기다. 지난 9일 서울 종로구 창의문 근처 카페에서 신 작가를 만났다.

삶 뒤틀려 표류하는 예술가 소설
‘타인과의 작별’을 마주하면서도
모국어 놓지 않는 위로의 이야기
“2014년 발표됐던 소설과 코로나19를 겪으며 쓴 단편을 모으니 키워드가 ‘작별’이었어요. 삶의 방향이 뒤틀려 낯설게 표류하는 사람, 그래서 모국어를 더 갈구하는 예술가 이야기예요.”

첫 단편 ‘봉인된 시간’은 1979년 봄 뉴욕 맨해튼으로 발령을 받은 UN외교관 부부의 이야기다. 그해 10월, 모두가 알다시피 서울에서 한발의 총성이 울린다. ‘암살자’의 전 비서실장 출신인 남편은 순식간에 조국에서 버림받은 유배자가 된다. 부임 6개월 만에 불법체류자로 전락한 최고위층 외교관 부부는 밑바닥부터 시작해 도넛가게로 꾸리며 삶을 모색한다. 실존 인물 K시인의 생을 소설화했다.

“비자가 끊겼지만 12·12쿠데타로 돌아갈 길이 완전히 막혀버려요. 시를 쓰는 ‘나’는 모국어의 간절함을 더 갈구하게 됩니다. 그리워만 하면서 일생을 살 수밖에 없던 K시인을 자주 생각해요. 차갑고 부서진 자리에서 모국어는 더 절실한 것이니까요. 예술가에게 모국어는 뺨 밑에 흐르는 실핏줄, 아니 실핏줄 속에 흐르는 피같은 것이라고 생각해요.”

서울 종로구 창의문 인근 카페에서 만난 소설가 신경숙. [이충우 기자]
‘봉인된 시간’에서 외교관이었던 남편은 ‘이등병’으로 강등되고 이후로도 복권되지 못했다. 소설에서 아내는 ‘나’는 그러나 말한다. “시인은 강등되지 못한다.” 문학을 하는 모든 인간은 온갖 이유로도 절대로 파괴되지 않을 어떤 절대성을 간직하고 있다는 작가의 은밀한 선언으로 들린다.

‘봉인된 시간’은 러시아 영화거장 안드레이 타르콥스키의 예술론을 집약한 책의 제목이기도 하다. 2005년 출간된 ‘봉인된 시간’은 최근 ‘시간의 각인’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기도 했다. 신 작가는 삶의 방향성이 뒤틀린 사람들의 삶을 봉인된 시간으로 이야기한다.

“타르콥스키의 ‘봉인된 시간’ 가운데 광활한 귀리밭에 관한 이야기가 선명하게 기억돼요. 그곳에 귀리밭이 있다고 생각한 타르콥스키가 도착해보니 귀리는 없고 전부 폐허로 변한 거예요. 그래서 타르콥스키가 귀리를 직접 키워서 기다렸다가 촬영을 했다고 해요. 자신의 기억과 달리 폐허가 된 마을에 씨앗을 뿌리고 다 자랄 때까지 기다렸다가 자신의 기억과 같은 풍경을 기다려 작업하는 모습은 굉장한 감동이었습니다.”

“인생 살면 ‘다음은 없다’ 알게 돼
삶이란 배에 함께 탔음을 느껴야”
다른 단편 ‘배에 실린 것은 강은 알지 못한다’는 고대 근동을 공부하러 독일로 떠난 오랜 친구의 암투병 소식을 들은 ‘나’의 이야기다. ‘나’는 친구가 보낸 작별 이메일을 보고 유럽으로 간다. 하지만 삶의 마지막 순간을 앞둔 친구는 ‘나’를 만나지 않는다. 소설 제목은 인도 설치미술가 수보드 굽타의 2012년 작품에서 왔다. 한 인간은 강 위에 떠 있는 수많은 배 중에 하나로, 우리는 서로를 알지 못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시를 조금 들여다본 이들은 다 알겠지만 H시인 얘기다.

“애도하는 마음,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생사의 고통 앞에 선 친구와 끝까지 동행하지 못한 마음이었습니다. 유럽에 들를 때마다 친구를 만났습니다. 한번은 베를린이었는데 뮌스터에서 들고 온 씨앗을 주더라고요. 나중에 꽃 피우니 금잔화였습니다. 아직도 매년 마당에 피는데 그대마다 떠난 친구가 제 이름을 불러주는 기분이에요.”

신경숙 소설집 ‘작별 곁에서’
인생을 살다보면 모두가 알게 된다. 우리들 사이에 ‘다음’은 없었다는 것을. 신 작가는 “지나고 보면, 다음은 없다”고 확언한다. “얼마간의 게으름, 얼마간의 바쁨, 그래서 ‘다음에 하자’ 했던 것들이 지나고 나면 작별 전에 이뤄지지 못했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됩니다. 삶이라는 배에 우리가 함께 타고 있음을 항상 확인해야 하는 건 그 때문일 거예요.”

이번 책에도 신경숙 특유의 비수같은 문장이 촘촘하다. 생이라는 연극에서 방백(傍白)을 하는 것만 같은 문장이 책 전체에 가득이다. ‘깊이 사랑한 것으로부터 버림받은 기억은 아문 후에도 마음에 폐허를 남기지.’(73쪽), ‘결핍으로 이루어진 존재들은 이유 없이 잡을 손이 필요했다’(112쪽) 등의 문장은 절절하다. 시인 파울 첼란의 고통을 복기하면서 “그의 시를 읽고 있으면 나의 고통들이 아주 하찮아지곤 했으니까”(27쪽)란 부분은 밑줄을 긋게 된다. 첼란은 부모를 살해한 나치의 언어(독일어)로 시를 쓰다 자살했다.

소설가 신경숙. [사진=창비]
소설가 신경숙에게 글쓰기는 무엇일까. 신 작가는 무거운 표정으로, 그러나 분명하게, “글쓰기는 나의 숨, 호흡(呼吸)과 같은 것”이라고 털어놓는다.

“글쓰기는 제가 하고 안 하고 선택할 수 있는 무엇이 아니에요. 삶이 진행되는 동안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표지도 찢어지고 낡아 읽을 수 없고 작가나 출판사 이름도 해지고 지워진 책이 좁은 골목 구석에서 발견되어도, 주워서 몇 장 읽고 ‘이건 신경숙이 쓴 거네’ 하고 느낄 수 있는 글을 쓰고 싶습니다.”

신 작가가 최근 읽는 책은 조지 손더스의 ‘작가는 어떻게 읽는가’다. 친한 소설가가 직접 보내준 책인데 “아무래도 읽다 보면 보내준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다”고 그는 말한다. 최근엔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 과거 불교방송국에서 일하던 시절 ‘아함경’ ‘금강경’을 주로 읽었는데 요즘엔 성경을 선물받아 읽고 있다. 오래 전, 셋째 오빠가 직접 새벽마다 써서 건네준 준 2권짜리 성경 필사본도 다시 펼쳐볼 계획이다.

신경숙 ‘아버지에게 갔었어’ 영어판.
신 작가는 이번 소설의 표제작 ‘작별 곁에서’에 등장하는 유정을 기억해달라고 당부했다. 제주에 사는 유정은 인생이 한순간에 무너진 작별을 겪고 제주를 찾은 ‘나’에게 친밀하게 다가간다. 유정과 함께 4·3 비극의 흔적을 본 ‘나’는 깨닫는다. 내 숨이 내 것인 것만이 아니며, 다 살지 못한 사람들 몫까지 내가 함께 살고 있다고. “유정은 부서지려고 하는 사람들을 손잡아주고 일으켜주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유정만이 이번 책에서 이름을 가져요. 작별만 남은 삶이지만 우리 안에 모두가 유정을 하나씩 품자는 마음이었어요. 유정처럼 다가가는 소설을 쓰고 싶습니다.”

신 작가는 이달 말 폴란드 초청으로 바르샤바대학에서 학생들을 만난다. 소설 ‘바이올렛’이 폴란드어로 최근 출간됐다. 지난달에는 ‘아버지에게 갔었어’ 영어판 출간을 기념해 3주간 미국에서 머물며 맥널리 잭슨 서점, 뉴욕 라이브러리, 프린스턴대 등에서 독자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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