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경영자는 인권도 없나"…욕설 난무하는 구태 시위·집회
광화문 KT 사옥 앞에는 '범죄경영진 구속처벌' 등의 명예훼손성 문구가 적힌 수개의 현수막이 걸려 있다. 강남역 삼성 서초사옥 주변 현수막에는 정돈되지 않은 빨간색 글씨체로 '갑질하고 직무 유기하는 XX' 등의 자극적 문구가 적혀 있고, 양재동 현대자동차그룹 본사 인근에는 기업은 물론 관할 구청까지 비방하는 '대기업 X개 노릇 XX구청' 등의 현수막이 설치돼 있다.
현대차그룹 본사 앞에서 10년 이상 시위를 이어오고 있는 A씨는 혐오 표현 사용 등 무분별한 시위 방법에 대해 법원으로부터 제재를 받았지만, 현재까지도 시위를 멈추지 않고 있다.
법원은 A씨에 대해 기아가 진행한 소송에서 '세계적 XX 기업, 고소고발 남발한 OO기업, Global company Kia Motors is a corrupt and inhumane company' 등의 문구와 장송곡 등의 사용을 금지한다고 판결했다. 하지만 A씨는 문구만 조금 수정해 지금까지 여전히 자극적인 현수막을 내걸고 있다.
명예훼손과 인격모독성 비방·욕설 등도 여전하다. 출퇴근 시간에는 장송곡을 대신한 운동가요가 고성능 스피커에 흘러나오면서 직원들은 물론 인근 주민들까지 피해를 당하고 있다.
10일 재계에 따르면 앞서 사례처럼 서울 도심에 위치한 국내 대기업 사옥 주변에서는 기업과 경영진 등을 비방하는 혐오스러운 표현의 현수막과 띠줄, 피켓, 배너, 천막 등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해외 거래처 외국인 관계자들의 방문이 잦은 글로벌 기업 사옥이라는 점을 노려 상대방을 비방하는 내용을 영문으로 작성한 현수막과 특정인의 이름이나 사진을 노출시킨 설치물 등도 목격된다.
출퇴근 무렵에는 고성능 스피커와 확성기를 통해 흘러나오는 비방, 욕설 등 소음이 거리를 메우고, 혐오 표현·허위 사실 등이 담긴 시위 모습은 인터넷으로 생중계되거나 동영상 형태로 온라인 상에서 빠르게 확산되는 상황이다.
이는 여론과 이미지에 상대적으로 민감한 대기업을 협상장으로 끌어내고, 협상 과정에서 유리한 결과를 얻기 위한 목적으로 풀이된다. 헌법이 보장한 집회·시위의 자유를 정당한 자기표현의 수단이 아닌, 사적 이익 추구를 위해 상대를 적대시하는 수단으로 악용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법조계에서는 이런 현상이 유튜브 등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까지 광범위하게 유포되고 있어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집시법) 개정의 필요성이 높아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수년째 시위에 시달라고 있는 한 대기업 관계자는 "대기업 사옥 주변 시위는 이미 시시비비가 가려진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허위 주장을 근거로 '기업이 책임져야 한다'고 생떼를 쓰는 경우가 많다"며 "현행법 상에서 기업은 마땅한 대응책 없이 고스란히 피해를 감당해야만 한다"고 토로했다.
기업들은 허위 사실, 모욕, 명예훼손 등에 대해 법적 대응에 나서기도 하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소요 시간이 길고, 승소하더라도 시위 자체를 막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시위자들은 패소하더라도 법원이 금지한 표현만 수정한 현수막을 새로 제작해 시위를 재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시위 현장의 비방과 욕설 등은 현실적으로 제재가 어렵고 법적 집회 소음 기준은 유명무실하다.
이에 업계에서는 집회·시위의 목적과 성격, 방식 등이 달라진 만큼 그에 걸맞은 집시법 개정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정치권에서는 집회 시위 현장의 혐오 표현 등을 규제하는 다수 집시법 개정안을 발의했지만 국회에서 논의조차 되지 못한 채 사실상 방치된 상태다.
법조계 관계자는 "과거와 달리 현재는 개인적인 사유 또는 여러 이해관계가 얽힌 다양한 성격의 집회 시위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열리고 있다"며 "과거 정치적 집회와 시위 등을 규제하기 위해 만들었던 집시법을 이제는 현실을 반영해 종합적으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장우진기자 jwj17@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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