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리업] 천재라 불리던 개발자가 100억짜리 실패를 겪고 알게 된 것
“나에게 세상은 곧 문제풀이 놀이터”
“죽도록 괴로워야 깨지지”…커리어 바닥에서 그를 일으켜 세워준 것
편집자주
'현대인의 일'을 탐구하는 콘텐츠 실험실 커리업이 시즌2를 시작합니다. 시즌2에서 커리업은 지난해 연재한 '일잼원정대'를 잇는 새로운 인터뷰 시리즈 '맨땅브레이커'를 내놓습니다. 자신만의 궤도를 맨땅에 헤딩하며 개척한 퍼스트 펭귄의 커리어 이야기를 다룹니다.
이토록 달콤 쌉싸름한 업(業)생
'천재 개발자’라 불린 이가 있습니다. 18세, 대한민국 국민 중 절반이 쓰게 될 채팅 프로그램(세이클럽)을 한 달 만에 만들었습니다. 27세엔 구글의 대항마로 만든 검색 엔진(첫눈)을 350억 원에 매각했습니다. 34세, 전 세계 5억 명이 쓰는 셀카앱(B612)을 내놔 모바일 세상으로 갈아타더니, 이듬해 돌연 10년 다닌 회사(네이버)를 때려치웠습니다. 방구석 은둔자로 코딩만 하며 살아보니, 세상에 컴퓨터와 나 이렇게 딱 둘만 남아도 살 수 있을 것 같더군요. 그 길로, 모바일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 ‘인공지능(AI)’과 ‘딥러닝’에 투신합니다. 그런데 웬걸, 이번엔 창업과 동시에 100억 원짜리 투자 사기를 당합니다. ‘아뿔싸, 인생이란 거 참 마음대로 안 되는구나’ 머리 깎고 산에나 들어가려 했다죠. 인공지능 스타트업 ‘보이저엑스’ 대표 남세동씨의 이야기입니다. 영화로 만들기라도 하면 ‘설정 과다’라 손가락질받을 법한, 기막히게 파란만장한 커리어입니다.
그의 달콤 쌉싸름한 업(業)생사를 그래프 위에 그려달라 했더니, 고점은 하늘을 뚫고 저점은 바닥을 뚫는 엄청난 낙차의 파도가 넘실거렸습니다. 매일 1억 원을 현금으로 쓸어 모으던 시절을 거쳐, 하루아침에 100억 원의 투자금을 날린 날 사이에 놓인 시간은 15년. 천재개발자로만 세간에 알려진 그의 커리어 인생에 어떤 곡절과 기복이, 또 어떤 도전과 모험이 놓여 있었는지 궁금해졌습니다. 자신만의 궤도를 맨땅에 헤딩하며 개척한 퍼스트 펭귄의 커리어 이야기, ‘맨땅 브레이커’의 1호 인터뷰이는 보이저엑스의 남세동(44) 대표입니다.
2017년 출발한 보이저엑스는 인공지능 기술을 활용한 모바일 스캐너 앱 ‘브이플랫’(vFlat), 자동으로 영상 자막을 달아주는 서비스 ‘브루’(vrew), 저렴한 가격에 손글씨를 폰트로 만들어 주는 ‘온글잎’을 서비스하고 있다. 브이플랫의 월간활성이용자수(MAU)는 200만 명 이상이며, 온글잎의 폰트 제작 건수는 3만 건에 달한다.
Chapter 1. 열아홉에 친 메가히트급 홈런
#1986년 _ 잊을 수 없는 처음
누구에게든 잊을 수 없는 처음의 순간이 있다. 남세동의 인생에서 가장 강렬한 ‘처음’이 발생한 때는 1986년, 주인집 거실 한편에 놓여 있는 ‘그것’을 봤을 때였다. 평생을 사랑하고 증오하며 지독하게 엮일 운명의 상대, 컴퓨터를 만난 순간. 열을 내뿜는 모니터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일곱 살 꼬마의 손은 키보드를 팡팡 눌러댔다. 누를 때마다 숫자가 올라갔다. Enter(엔터)키 위에 지우개를 올려놓고 넋을 잃었다. 까만 모니터 위에 초록색 숫자들이 변화무쌍하게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올라가는 광경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그게 남세동이 컴퓨터란 광막한 세계의 문을 연, 첫 순간이었다.
#1988년 _ 다시 만난 세계
“야, 텔레비전 같은 게 여러 대 생겼는데, 거기에 우리 이름이 나와.”
도대체 ‘텔레비전 같은 게’ 뭔지, 거기에 ‘내 이름’이 나온다는 건 무슨 말인지. 흥분해서 목소리가 잔뜩 커진 친구들을 따라가 본 끝에 만난 건, 다시 컴퓨터. 짧았던 첫 만남으로부터 2년이 흐른 1988년이었다. 그해 당시 세동이 다니던 초등학교는 국내 최초 ‘컴퓨터 시범 학교’로 지정됐다. 종일 컴퓨터만 하는 컴퓨터반에 들어갔다. 처음엔 까만 화면에 동그라미와 네모를 그려 넣는 것으로 시작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쯤엔 주사위를 굴려 말을 이동하는 윷놀이 게임을 자기 손으로 만들었다. ‘세동이는 컴퓨터만 끼고 산다’는 소문이 돌더니, 큰맘 먹은 외삼촌이 집에 컴퓨터를 놔 줬다. 밥 먹고, 자는 시간만 빼면 오직 컴퓨터뿐이었다.
컴퓨터의 세계 가장 깊은 곳에 가라앉아 보냈던 10대의 끝자락에서, 그는 ‘웹web’이라는 커다란 파도에 올라타게 된다. 그 파도가 남은 인생의 전부를 지배할 정도로 거대하고, 또 지나치게 조속했던 성공을 그에게 안겨 줄 것이란 걸, 그땐 몰랐다.
컴퓨터, 컴퓨터, 오직 컴퓨터. 머릿속에 컴퓨터밖에 없었던 열여섯 살 남세동의 장래 희망은 새삼스럽게도 물리학자였다고 합니다. ‘개발자’라는 단어가 널리 쓰이기 전이었을 뿐 아니라, 업의 개념조차 희미했던 시절이었죠. 물리학자를 꿈꿨던 이유는 순진했습니다. “나는 과학 성적이 제일 좋으니까 = 나는 과학을 잘하니까.” 그 빼어난 성적을 앞세워 17살에 과학고를 조기졸업하고 한국과학기술원(KAIST, 이하 ‘카이스트’)에 입학하는 순간, 그 꿈은 금세 휘발돼 버리고 말았죠. ‘나는 내가 제일 천재인 줄 알았는데, 여긴 나 빼고 다 천재잖아!’ 날고 기는 애들이 많아도 너무 많았어요. 그렇게 공부는 사뿐히 놔 버렸습니다. 이유는 두 가지였죠. 첫째, ‘나 생각보다 못하네?’ 둘째, ‘못하니까 하기 싫어!’ 강의실에선 금세 주눅이 들었습니다. 모두가 미친 듯이 공부만 하는 학교에서 그래서 뭘 했냐고요?
“그냥 하루 종일 놀아버렸어요. 어떻게 놀았냐? 뭐가 따로 있겠어요. 컴퓨터죠. 술 퍼마시면서 논 게 아니라, 종일 코딩하고, 게임을 하다 게임 만들고, 그러다가 전자게시판(BBS) 같은 것도 만들어 보고. 그거의 연속, 또 연속이었죠. 그도 그럴 게 카이스트는 정말 그걸 하기 좋은 환경이었거든요.”
세동씨가 대학에 입학한 1996년, 카이스트엔 국내 최초로 강의실 건물, 기숙사 전체에 고속통신과 근거리통신망(LAN)이 일제히 깔렸습니다. 전국 최초였던 건 물론, 전 세계 인터넷 역사상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파격적 설비였죠. 당시 카이스트 전산학과 교수이자, 한국 인터넷의 아버지라 불렸던 전길남 박사의 영향이었습니다. (주석: 그는 한국을 전 세계 두 번째 인터넷 국가로 만든 컴퓨터 과학자다) 세동씨 같은 ‘컴퓨터 긱(computer geek)’들에겐 말 그대로 밥만 먹고 밤새 인터넷만 할 수 있는 천국이 열린 셈이었습니다.
“자원이 풍부한 환경에 있다 보면 전 세계에서 처음으로 ‘자기만’ 보는 것들이 생겨요. 이때 카이스트를 다녔던 사람들이 2000년대 대한민국 인터넷과 게임 역사를 많이 이끌었거든요. 이를테면 네이버 창업자 이해진, 넥슨 창업자 김정주, 네오위즈 창업자 나성준 같은 사람들이요. 빌 게이츠가 처음 컴퓨터를 만진 게 1966년이에요. 그러니까 딱 열한 살일 때. 저보다 20년 넘게 앞선 거예요. 그 어린 나이에 컴퓨터 귀신이 된 그가 고등학생 때 폴 앨런을 만나 같이 창업한 게 마이크로소프트고요. 아아, 고기 맛을 본 사람이 고기를 먹을 줄도 알고, 나중엔 팔 줄도 아는 거구나. 지나고 나서야 알았어요. 앞선 걸 먼저 보면, 거기서 앞선 생각을 할 수 있고, 앞선 일을 할 수 있다는 걸요. ”
자원이 풍부한 곳에 나를 가져다 놓는 경험은 무척이나 중요합니다. 많이 누리고, 맛보고, 즐기고, 무아지경으로 푹 빠져보기까지 했다면, 그 분야에서만큼은 시야의 질이 달라지거든요. 144p로 보는 세상과 2440p HD로 보는 세상이 완전히 다르듯, 남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해상도의 시야를 갖게 되는 겁니다. 선명히 보는 사람일수록, 그 너머를 상상할 수 있는 폭이 넓어지게 되죠. 더 광활한 그들만의 세계에서 더 구체적으로 상상하며 놀 수 있게 되는 거고요.
#1998 _ 열아홉에 어쩌다 취업, 어쩌다 홈런
“세동아. 당장 코딩할 사람이 필요한데, 너 좀 하는 거 같다. 일단 와서 일부터 해봐라.”카이스트 컴퓨터 동아리 ‘스팍스’의 동방엔, 언제나 그 선배가 있었다. 장병규. 베틀그라운드 신화를 쓴 ‘크래프톤’의 창업자이자, 아직도 현역에 있는 1세대 벤처기업인인 바로 그 장병규. 어찌어찌 전산학과에 들어가긴 했지만, 과연 컴퓨터학자가 되는 게 진짜 내 길인지, 자신도 의심스러울 때였다. 당시만 해도 카이스트 출신은 못 가는 사람 빼고 거의 전원이 ‘응당 그래야 한다는 듯’ 대학원에 갔다. 이상했다. 스스로에게 물었다. ‘공부 아니면 뭐 할래?’
선배의 제안에 덥석 ‘저 해볼래요’ 했다. 세동은 자신이 있었다. 이미 18살 때부터 코딩으로 돈을 벌었으니까. (어쩐지 과외는 하기 싫었단다. 좋아하고 잘하는 일로 돈을 벌 수 있는데, 왜?) 카이스트 연구소 홈페이지를 만들며 첫 돈을 벌었고, 장병규의 연구실에서 코딩하다가, 얼결에 그가 만든 회사에 취직까지 했다. 그게 네오위즈다. 거기서 그는 훗날 2,000만 명이 사용하고 매일 현금으로만 1억 이상을 벌어들이던 채팅 프로그램 ‘세이클럽’을 만들게 되는데.
당시 네오위즈는 인터넷 접속 간편화 프로그램 ‘원클릭’으로 한창 주가를 올리던 인터넷 벤처였습니다. 출시 첫해에만 5억 원, 이듬해 85억 원의 매출을 올릴 정도로 잘 나가는 회사였죠.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했어요. 이용자들이 인터넷에 오래 머물러야, 돈을 더 버는 비즈니스 구조상, 유저들을 웹에 잡아 둘 수 방법을 궁리해야 했습니다. 사실 큰 고민의 여지는 없었다고 해요. 당시 사람들은 대개 두 가지 이유로 인터넷을 했거든요. 음란물을 보거나, 채팅하거나. 그래서 ‘채팅 프로그램’을 만들기로 한 겁니다. 처리할 용량은 적은데, 시간은 하염없이 많이 쓰게 할 테니까.
“거의 한 달 만에 만든 거 같아요. 작은 회사니까 달리 그 일을 할 사람이 없어서 인턴이었던 제가 리드해서 코딩했죠. 근데 그게 나오자마자 (잠깐 숨을 고르고) 너~무 잘 됐어요. 막 이렇게(손가락을 위로 가리키며) 수직 성장을 한 거죠. 전체 10명이 시작한 팀이었는데, 2년이 지나자 세이클럽 하나만 두고 봐도 40~50명이 넘는 팀이 됐고. 수익화를 위해 시도했던 유료화 서비스였던 아바타는 하루 수익이 거의 1억 원에 달했어요. 요즘 업계 느낌상 매일 10억 원가량의 수익이 났던 셈이죠.”
세이클럽의 파죽지세는⋯.
기사의 뒷 내용을 커리업의 전용 뷰페이지에서 이어서 읽으실 수 있습니다.
☞ https://careerup.hankookilbo.com/v/2023051001/
커리업의 새로운 연재 '맨땅브레이커'
'커리업'이 한국일보의 디지털 프로덕트 실험 조직인 'H랩(Lab)'과 함께 돌아왔습니다. 탐사선 H랩은 기존 뉴스 미디어의 한계선 너머의 새로운 기술과 독자, 무엇보다 새로운 성장 가능성과 만나려 합니다. 첫 번째 시도로 자기만의 커리어를 개척한 개척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맨땅브레이커'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저마다의 커리어의 정답을 찾아가는 여정을 다른 기사와 차별화되는 밀도 높은 시선으로 담아냅니다. 360도로 생생하게 담아낸 커리어 현장부터 독자들이 직접 고화질 사진을 확대, 축소해 보며 사진 속 숨은 요소를 둘러보는 재미를 제공합니다. 커리업이 제공하는 비주얼 스토리텔링을 아래의 URL에서 만나보세요.
남세동 上편 - 깨져야 열리지 새로운 세계가
https://careerup.hankookilbo.com/v/2023051001/
남세동 下편 - 정답 없는 세상에서 실패의 바다를 표류하다
https://careerup.hankookilbo.com/v/2023051101/
박지윤 기자 luce_jyun@hankookilbo.com
김유진 기자 zoeyful@hankookilbo.com
이한호 기자 han@hankookilbo.com
박길우 기자 gwpark1@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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