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념한 듯 슬픈 김서형의 마지막 표정, 이 장면 잊지 못할 거다('종이달')

정덕현 칼럼니스트 2023. 5. 10.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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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서형을 위시한 배우들 덕분에 더 커진 ‘종이달’의 여운
‘종이달’, 태국 낯선 마을까지 흘러간 김서형이 마주한 것은

[엔터미디어=정덕현] "여기서 멈추지 않아도 돼요. 당신도... 계속 흘러갈 수 있어요." 흐르고 흘러 태국의 어느 낯선 마을까지 들어오게 된 유이화(김서형)는 그곳 숙소를 찾아와 자살하려던 한 여인을 구해낸 뒤 그렇게 말한다. 무슨 사연이 있는지 알 수 없지만 그 여인은 무언가로부터 도망치는 중이었고 그렇게 도망쳐도 소용없다 절망해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다. 그런 그에게 유이화가 마치 체념한 듯 '흘러갈 수 있다'고 말한 건 무슨 의미였을까.

지니TV 오리지널 드라마 <종이달>이 종영했다. 그 끝은 이 드라마의 시작점에서 이미 보인 것처럼 태국까지 오게 된 유이화의 모습이었다. 마침 비가 쏟아졌고 공항에서 나와 그 비를 맞던 유이화는 피가 묻은 소매를 숨기기 위해 꽁꽁 싸매듯 입었던 옷을 벗는다. 마치 그 피를 비에 씻어 지우고 싶다는 듯. '돈의 위치'를 바꾸는 것이라고 고객의 돈에 손을 대기 시작했던 유이화. 그 돈으로 가난하지만 전도유망한 영화감독의 꿈을 꾸던 윤민재(이시우)를 지원하고, 노숙자들을 일할 수 있게 돕고, 가족조차 없이 홀로 죽어가는 노인을 요양원에 보내주기도 했지만, 그 횡령의 끝은 해외로의 도주였다.

'돈의 위치'를 바꾸어 꼭 필요하지만 없는 이들에게 돈이 가게 만들어주면 보다 나아질 거라고 생각했던 유이화는 어째서 끝내 도망칠 수밖에 없었을까. 그건 자본이 만들어내는 문제들은 단지 '돈의 위치'가 잘못되어 생겨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돈 자체가 끄집어내는 욕망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는 걸 유이화는 뒤늦게 깨닫는다.

유이화가 거액의 돈을 횡령해 도운 윤민재의 변화는 섬뜩하다. 그는 결국 해외영화제에서 수상한 유명 감독이 되었고, 투자자들이 생겨났다. 더 이상 국밥에 막걸리를 먹으면서도 꿈을 키우던 윤민재가 아니었다. 고급 샴페인을 마시고 유명 연예인이 된 친구와 파티를 한다. 그러면서 유이화와의 관계에 불편함을 느낀다. 그는 물론 유이화를 사랑했었지만, 이제 그는 유이화를 사랑하던 가난했지만 꿈 많은 청년이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불꽃놀이가 펼쳐지는 장관을 볼 수 있는 루프탑 파티에서 유이화와 만나는 장면은 윤민재가 무엇에 눈이 멀었고 그래서 변화했는가를 영상을 통해 그려낸다. 화려하게 터져 오르는 불꽃에 모두가 눈이 멀어 환성을 질러댈 때, 그 불꽃 뒤편으로 희미하게 가려진 초승달이 바로 그 은유다. 돈이 만들어내는 화려함 속에서 윤민재는 그 뒤에 가려진 실체를 보지 못하게 된다.

또 유이화가 도와주고 일자리까지 갖게 해준 노숙자들은 과연 그의 생각대로 나은 삶을 살아가게 됐을까. 그 중 한 명은 사채업자 박병식(장항선)의 집에서 일을 하다, 임금을 주지 않는다며 다툼이 벌어지고 결국 그를 칼로 찌르는 사건을 벌이게 된다. 안하무인에 돈이면 뭐든 된다고 생각하는 박병식 때문에 촉발된 사건이지만, 유이화의 바람과는 너무나 다른 결과가 아닐 수 없다.

자신이 은행 고객의 돈에 손을 대고 있다는 걸 알고 협박까지 했던 루리(보라)도 마찬가지다. 그가 남자친구에게 지속적인 폭력과 협박을 당하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된 유이화는 끝까지 그를 구하려 했지만 끝내 변사체로 발견된다. 돈에 집착하는 남자친구로부터 루리는 도망치려 했고 유이화는 이를 도우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결국 유이화가 마주한 건 절망이다. 자본의 세상에서 돈이 만들어내는 욕망은 없는 자들도 가진 자들도 망가뜨린다. 유이화의 태국행은 그래서 돈을 횡령한 범죄자의 도주지만, 동시에 도저히 마주해 싸운다고 이길 수 없는 자본으로부터의 도망이기도 하다. 그렇게 태국에서도 낯선 곳까지 흘러온 유이화는 과연 끝내 돈이 만들어낸 지옥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었을까. 드라마는 쉽게 유이화의 편안한 마지막을 허락하지 않는다. 열린 결말이지만, 흐르는 물을 바라보고 있는 그에게 다가오는 누군가의 발소리를 끝으로 들려주기 때문이다.

그 발소리는 마치 그를 붙잡으러 온 누군가의 것처럼 들리고, 그래서 발소리에 고개를 돌리는 유이화의 얼굴은 복합적인 감정이 느껴진다. 그건 체념한 듯 보이기도 하고 슬퍼 보이기도 한다. 어디로 도망쳐도 돈이 매개되어 살아가는 세상에서 결코 자본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그런 뜻일까. 유이화의 그 마지막 표정이 주는 여운은 그래서 오래도록 긴 잔상으로 남는다.

종영에 이르러 되돌아보면 <종이달>은 치열한 문제의식을 담은 대본과 계속 변화해가는 인물들의 감정선을 군더더기 없이 담아낸 연출이 더해진 가운데 무엇보다 연기자들의 연기 포텐이 터진 작품이라는 걸 새삼 느끼게 된다. 괴물이 되어가는 역할도 납득되게 그려낸 김서형은 물론이고, 친구들 역할의 유선, 서영희, 꿈 많은 영화학도였지만 점차 자본에 물들어가는 윤민재를 연기한 이시우, 자본기계 같은 비정함을 연기한 공정환, 또 빼놓을 수 없는 신스틸러 보라와 이채은까지 강렬한 연기 앙상블이 돋보였다. 이들이 있어 작품의 밀도가 높아졌고 종영했지만 남은 여운도 커질 수 있었다.

정덕현 칼럼니스트 thekian1@entermedia.co.kr

[사진=지니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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