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에 ‘카공족’이 없는 이유…도서관에 답이 있다
오전 10시, 베를린 미국기념도서관 문이 열리면 단골인 노인들이 컴퓨터 앞에 자리를 잡는다. 슈퍼마켓 카트에 담요·취사도구 같은 살림살이를 싣고 다니는 노숙인들도 이곳의 단골이다. 에밀리오 에스테베즈 감독의 영화 <더 퍼블릭>에서는 미국 오하이오주 신시내티에 이상 한파가 덮치자 따뜻한 도서관으로 밀려드는 노숙자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지난가을 에너지 위기로 겨울을 날 걱정이 커지자, 베를린에서 가장 큰 공공도서관인 이곳은 휴일과 늦은 시간에도 도서관 문을 열겠다고 발표했다. “우리는 집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 있다”는 관장의 말은 <더 퍼블릭> 사서들의 현실판처럼 보였다.
“집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 있다”
베를린에는 82개 도서관이 있다. 서울보다 수는 적지만 도서관 생태계는 넓고도 깊다. 1841년 그림 형제 이름을 따서 지은 훔볼트대학 도서관 코앞에는 독일어권에서 가장 큰 학술 전문 도서관이라는 110년 된 운터덴린덴 국립도서관이 있다. 동베를린 시절 학문의 중심지 운터덴린덴의 도서관이 프로이센 궁정 양식에 따라 우아하게 닫힌 건축이라면, 서베를린에 지은 포츠다머 국립도서관은 하늘을 향해 활짝 열린 건축이다. 베를린 필하모닉홀을 비롯해 전쟁 뒤 베를린의 주요 건물을 설계한 건축가 한스 샤로운의 작품이다.
그러나 베를린에서 생활하는 사람이 매일 쉽게 찾게 되는 곳은 유서 깊은 명소보다는 동네마다 있는 공공도서관 16곳이다. 공공도서관은 책뿐 아니라 문화와 생활을 나누는 공동체 공간이 되기 위해 여러 정책을 편다. 그중 하나가 도서관마다 동네 주민들에게 생활용품들을 빌려주는 것이다. 미국기념도서관에서는 드릴이나 공구, 재봉틀처럼 어쩌다 한 번 필요한 가정용 도구를 빌려준다.
우리 동네 슈테글리츠 도서관에서는 바이올린이나 우쿨렐레 같은 악기를 빌려준다. 독일에서 도서관 생활자로 지내다가 이곳 도서관 어린이책 서가에서 책을 찾으며 번역일을 시작했다. 기말이면 부족한 자료를 찾아 베를린의 다른 대학도서관을 돌아다닌다. 한국과 달리 일반인도 대학도서관에 자유롭게 출입하고 책도 빌릴 수 있다. 모두에게 열린 공공도서관은 더없이 고마운 자원인데 그중에서도 내게 공간을 빌려주는 것이야말로 가장 귀중한 대출이다.
한국에서 온 이용자의 눈으로 보면 독일의 동네 도서관은 북카페 같은 곳이다. 줄 세운 서가들 옆에 놓인 좌석에서 사람들은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고 토론하고 심지어 밥도 먹는다. 독서실처럼 조용한 도서관을 원한다면 대학도서관으로 가야 한다. 도서관 자원이 넉넉하기 때문에 이용자들이 서로 싸울 일이 적은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공용공간이 부족한 한국에선 공공도서관의 구실 일부를 카페나 독서실에 맡겼다.
북카페 같은 동네 도서관
코로나19 대유행으로 학교도 닫혔던 시기, 독일 생활에서 도서관은 더욱 중요한 곳이 됐다. 팬데믹을 계기로 베를린의 도서관은 아이들 장난감이나 생활용품으로 대출 폭을 넓히고 책을 60권까지 빌려주고 개관시간도 늘렸다. 다른 집 방문까지 제한하던 시기, 친척 하나 없는 외국인에겐 기나긴 고립이 이어졌는데 나는 그때 매일같이 공공도서관에 드나들며 음악실 열쇠를 받아 피아노를 쳤다.
나는 이곳에서 낯선 사람이다. 이곳에 일터가 없다. 이곳에 영원히 섞이지 못할지도 모른다. 낯선 땅에 온 나는 이를테면 행정관청이나 은행, 학교 같은 공간이 너무나 이질적이고 위계적이어서 나를 거부하는 느낌을 받을 때가 종종 있다. 그러나 책 냄새 사이로 다양한 인종의 냄새가 섞이는 공공도서관에 앉아 있으면 그제야 베를린에 접속한 기분이 든다. 히잡을 쓰고 나란히 앉아 뭐라 속삭이며 공부하는 여자들, 컴퓨터 화면을 보며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노인, 노숙인, 학생 그리고 아시아 여자인 내가 서로 눈 한 번 마주치지 않으면서도 더없이 어울리는 그림처럼 그곳에 함께 있다.
외국인에게 도서관 못지않게 귀중한 지원이 된 곳은 폴크스호흐슐레(Volkshochschule)라는 독일의 시민학교다. 독일에선 시민학교 858곳에서 언어, 예술, 건강, 정보기술(IT), 직업개발, 정치를 가르치는 70만 개 강좌가 열려 시민학교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다. 이민자와 난민에게 독일어를 가르치고 독일 사회의 통합을 돕는 것도 시민학교의 몫이다. 구직자로 등록하면 이곳에서 무료로 독일어를 배울 수 있다. 한국의 수많은 문화센터나 사설학원이 하는 역할을 독일에선 공공이 수업료 3분의 2를 대는 시민학교가 한다.
스웨덴에서는 폴크획스콜라(Folkhögskola)라는 시민고등학교가 있다. 고등학교를 제대로 마치지 못한 사람뿐 아니라 전직을 준비하는 사람과 외국인을 대상으로 스웨덴 사회에 대한 이해를 돕고 전문 지식을 배울 수 있도록 시민고등학교 150곳이 있다. 오스트리아와 핀란드도 공공이 성인 교육기관을 운영한다.
모두를 위한 학교
한국 대학들은 신입생이 적어지자 평생교육 쪽으로 눈을 돌려 새 수익원을 찾는다고 한다. 대학교육에 이어 평생교육까지 자본에 내맡기는 중이다. 여기에는 ‘모두를 위한 교육’이라는 시민학교의 모토가 들어설 자리가 없어 보인다.
나는 시민학교에서 독일어·노르웨이어와 사진을 배웠고, 짧은 영화를 찍어봤으며, 밤중 달리기를 하는 팀에 끼었고, 베를린 박물관을 여행했다. 독일에서 대학 공부를 시작하기 전 여러 과목을 동시 수강하면서 오랫동안 중단한 배움을 ‘워밍업’했다. 시민학교에서만 배울 수 있는 독일의 역사, 베를린의 다양한 얼굴이 있다.
정말이지 아이 하나를 키우는 데만 마을 전체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늙은 학생을 위해서도 사회의 도움이 필요하다.
베를린(독일)=글·사진 남은주 자유기고가·번역가 eunjoonam@web.de
*공부하는 늙은 엄마: 나이 오십에 독일 대학에 들어간 전직 기자의 이주 생활과 나이 든다는 것에 대한 탐구.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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