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어떻게 콘텐츠에 활용할까? [서병기의 콘텐츠 이야기]

2023. 5. 10.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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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콘텐츠의 주요한 소재다. 역사를 바탕으로 잘 만들어진 사극 한 편은 콘텐츠로서의 가치가 매우 크다. 역사는 시공간을 확장할 수 있다. 그것만으로도 콘텐츠화에 유리하다. 현대극은 빈부 차이, 결혼 반대, 출생의 비밀 등 갈등요인과 장애물의 설정이 매끄럽지 못한 경우가 적지 않다. 반면 사극은 멀리는 선사·고대, 가까이는 현대까지 갈 수 있고 신분제 사회, 전쟁, 가부장적이고 유교적인 정치 대결구도 등 극적 구성을 가능하게 하는 갈등요인을 펼치기도 좋다.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

▶시공간 확장할 수 있는 역사는 콘텐츠화에 유리= ‘옷소매 붉은 끝동’(2021년)은 역사의 그런 강점을 잘 활용해 콘텐츠로서 완성도를 높인 대표적 사극이다. 최종회 시청률이 무려 17.4%를 기록하며 MBC에서 최근 몇 년 새 가장 성공한 드라마로 꼽힌다. ‘옷소매’는 궁중 멜로라는 한계 속에서도 미세함을 담아 성공했다. 다시 말해 봉건적·유교적·가부장적인 남녀관계에서 소신과 철학, 고민과 갈등이라는 관계로의 조심스러운 변화를 모색하며, 사극 로맨스의 진화를 보여줬다.

‘옷소매’의 차별점은 상당 부분 성덕인(이세영 분)이라는 궁녀 관점에서 풀어나갔다는 점이다. 왕(정조) 앞에서 청혼 제의를 거절하며 소신을 당당하게 밝히는 지밀나인은 주체적인 사극 여성 캐릭터다. 당시는 목숨이 두 개가 아니면 왕의 후궁 제의를 거절할 수 없었겠지만 왕의 후궁 제의 거절은 기록에 근거하기에 사극에서 충분히 풀어낼 수 있는 구성이다. 우리는 후궁이 어떻게 하면 왕에게 선택받아 성은(왕과의 합방)을 입을 수 있을까만 생각하고, 왕과의 밤을 차지하려는 질투, 투기만 봐왔다. 그런 시청자들에게 ‘옷소매’는 충분히 먹힐 수 있는 설정이다.

▶국사 말고 지역사를 익혀야 한다=사극을 통해 역사적 사실을 알게 됐다는 사람이 많은 정도로 사극은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적어도 콘텐츠 제작진은 역사를 알아야 한다. 국사뿐만 아니라 동양사, 서양사까지 익혀야 한다. 우리 역사는 국사만 알아서는 안 된다.

역사적으로 중국은 우리 왕조 교체와 연관돼 있고, 일본도 임진왜란뿐만 아니라 메이지유신 등 근대사로 오면 우리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많다. 그런데도 사극에는 주변국 인물이 별로 등장하지 않는다. 임진왜란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고니시 유키나가, 가토 기요마사 정도이고, 구한말에도 이토 히로부미 등 몇몇밖에 등장하지 않는다. 상대의 캐릭터가 지극히 단순화돼 있어 어떨 때는 보기 민망할 정도다. 그래서 ‘종횡무진 서양사’ 등을 썼던 재야사학자 고(故) 남경태는 국사가 아닌 지역사를 공부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영화 ‘한산-용의 출연’에 등장하는 왜군 수군 최고사령관 일본 장수 와키자카 야스하루(변요한 분)는 분량이 많지만 캐릭터를 좀 더 입체적으로 그렸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물론 ‘한산’은 마지막 30분이 넘는 학익진 스펙터클이 압권이다. 하지만 한산도대첩과 명량해전에 참가한 와키자카는 자칫 ‘이순신의 위대함과 원균의 무능’ 부각을 위해 설정된 왜군 장수가 될 수도 있어, 미세함이 필요하다. 와키자카가 일본에서 어떤 역사적 평가를 받는 인물인지, 원래 수군이 아닌 육군이었고 임진왜란 직후 일본에서 벌어진 ‘세키가하라 전투(동서합전)’에서 동군에서 서군의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어떻게 갔는지를 파악하면 와키자카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만드는 데에 도움이 된다.

KBS ‘징비록’(2015년)에서는 임진왜란의 두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이광기 분)와 가토 기요마사(이정용 분)를 대조적 캐릭터로 세밀하게 살려내 당시 상황을 좀 더 입체적으로 만들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가토는 잔인한, 다혈질의 사무라이다. 반면 상인 출신으로 부유하게 자란 고니시는 협상을 할 줄 아는 지략가다. 종교적으로 고니시는 기독교, 가토는 불교 신자다. ‘징비록’ 제작진은 이 두 라이벌이 펼치는 숙명적인 대결과 심리, 처세술을 담은 엔도 슈사쿠의 역사소설 ‘숙적(宿敵)’을 참조했다고 밝힌 적이 있다.

이토 히로부미 구택 앞 푯말

▶구한말 콘텐츠는 일본 역사가 필수적=역사적으로 볼 때 우리는 지피지기를 그리 썩 잘하지 못했다. 그래서 국익에 손상을 입은 적도 있다. 일본은 메이지유신 때는 지피지기를 잘해 근대화에 유리했다. 당시 일본에서는 네덜란드를 통해 들어온 서양의 학문과 기술, 문화를 의미하는 ‘난가쿠(蘭學)’가 크게 발달했다.

구한말로 오면 일본을 더 잘 알아야 우리 역사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 ‘미스터 션사인’은 잘 만든 사극이지만 일본 인물을 좀 더 다양하고 입체적으로 그렸다면 지피지기에 더 많은 도움이 됐을 것이다. 사극 콘텐츠는 사안을 좀 더 입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게 해준다.

나는 일본 역사를 좀 더 알고 싶어 최근 야마구치현 하기(萩)시를 찾았다. 야마구치현(메이지유신 전에는 조슈번으로 불림)은 내가 몇 년 전 방문한 가고시마현(사쓰마번)과 함께 일본 보수우익 사상의 태동지다. 이 두 번(藩) 간 동맹(샷조동맹)을 중재해 메이지유신으로 이끌었다고 해서 일본의 영웅이 된 인물이 사카모토 료마다. 일본 유신 3걸 중 사이고 다카모리와 오쿠보 도시미치는 가고시마 출신이고, 기도 다카요시만 야마구치 출신이다. 하지만 일본의 보수우익 정신의 열기는 야마구치현의 하기시가 훨씬 더 뜨겁게 느껴졌다.

에도 시대 조슈번의 성도(城都)인 하기시는 인구 4만3700여명의 작은 도시다. 대부분의 면적은 마쓰모토강과 하시모토강 사이에 형성된 삼각주 형태로 이뤄졌다. 하지만 메이지유신 이후 최고의 권력자로 부상한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해 다카스키 신사쿠, 기도 다카요시, 야마가타 아리토모, 이노우에 가오루, 가쓰라 다로 등 쟁쟁한 유신 인사들이 태어났거나 수학했던 곳이다. 이 지역에서 배출한 일본 총리만도 9명이다. 하기시는 무려 5곳이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 유산’이라는 이름으로 2015년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돼 있다.

▶작은 도시 하기시의 역사적 배경=하기는 임진왜란 직후 1600년 세키가하라전투에서 동군 총대장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패배한 서군 총대장 모리 데루모토가 이곳에 유폐된 후 계획적으로 하기 성하(城下)마을을 지으면서 역사적인 의미를 지니게 됐다.

조카마치(城下町)로 불리는 하기 성하마을은 사농공상의 신분제도로 인해 무사와 마을주민이 생활하는 구역이 엄격하게 구분돼 있다. ‘작은 교토’로도 불리는 성하마을은 일본 전통가옥 형태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어 걸어다니면서 구경하는 게 좋다. 동해를 바라보는 곳에는 성터(시즈키공원)가 있고, 기도 다카요시와 다카스키 신사쿠가 태어나고 어린 시절을 보냈던 집도 있다.

비옥한 대부분의 영지를 빼앗기고 척박한 하기시를 개발한 모리 가문은 절치부심하며 인재를 양성해 도쿠가와 막부에 복수하려 했을 것이다. 이 지역은 반(反)막부의 정서가 260년간 이어졌다. 그 정서는 메이지유신의 강력한 동력원으로 작용했다. 조슈번과 사쓰마번의 메이지유신 세력들은 봉건 체제인 도쿠가와 막부 체제를 무너뜨렸다.

탁월한 중재자 사카모토 료마는 1867년 에도 막부 시대 마지막 쇼군(15대)인 도쿠가와 요시노부에게 국가통치권을 일왕에게 돌려줄 것을 권고했다.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이 방안을 순순히 수용해 대정봉환(大政奉還)이 손쉽게 이뤄졌다.

▶日 메이지유신은 어떤 정치 역학구도에서 나왔나=메이지유신은 1868년 막부를 타도하고 일왕(日王)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집권 체제를 구축하며 근대화를 위해 이뤄나간 개혁을 말한다. 그래서 일본의 보수우익 사상에는 항상 일왕이 등장한다. 오늘날 반한류, 혐한류도 이의 연장선이라 할 수 있다.

메이지유신은 막부의 봉건 체제를 없애고, 중앙집권제와 정치·경제·문화 전 분야에 걸쳐 근대화 개혁정책을 내놓았다. 하지만 방법론은 군국주의와 제국주의였다. 우리에겐 식민통치 35년의 암흑기다. 한국인에게 하기시는 정한론이 나온 조선 침략 본거지라는 점에서 ‘다크 투어리즘(비극적 역사의 현장이나 재난과 재해가 일어났던 곳을 돌아보며 교훈을 얻는 관광)’이다.

당시 조슈 개혁가들은 도쿄만에 들어온 미국 함대 ‘흑선(구로후네)’의 요구를 너무 쉽게 들어주는 막부에 반대하면서도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했다(지금도 일본 드라마에는 흑선의 매튜 페리 함장이 자주 등장한다. 일본에서는 유명한 외국인인 페리는 부정적으로 묘사되면서 자주 희화화된다).

개혁가들은 단순히 ‘존왕양이(尊王攘夷·일왕을 받들고 외세를 배격한다)’가 아니라 ‘우세한 서양의 기술을 배워 서양을 극복하자’는 발전론도 지니고 있었다. 동시에 ‘구미 열강에 의해 피해를 보게 되면 아시아에서 보상을 받자’는 공격적 실리론도 포함됐다. 이는 대동아공영론으로 포장돼 있지만 이때부터 류큐 왕국을 오키나와로 편입하는 등 본격적으로 영토를 넓혀나갔다.

하기지역에서 개혁에 대한 교육기관은 크게 두 개다. 번교(藩校)인 ‘명륜관(메이린관)’과 사설 학당인 ‘쇼카 손주쿠(松下村塾)’다. 메이린관은 상급 무사 계급 자제에게만 입학이 허용됐다. 반면 쇼카손주쿠는 하급 무사나 농민도 갈 수 있었다. 그래서 농부의 아들인 이토 히로부미도 여기서 수학할 수 있었다.

쇼카손주쿠는 조슈번의 천재 사상가 요시다 쇼인이 주관한 사설 학당이다. 쇼인은 1854년 25세 때 이즈시모다에서 미국 함선을 타고 해외 밀항을 시도하다 실패해 투옥됐다. 당시 집필한 ‘유수록(幽囚錄)’에 서구 열강의 위협에서 벗어나려면 일본이 중국과 조선을 정벌해야 한다고 적고 있다. 정한론의 선구자인 그는 인재를 모으는 재주가 있었다. 요즘으로 치면 ‘일타 강사’라 할 수 있다.

하기시 쇼인 신사 내에 있는 쇼카손주쿠

▶일본 역사 거물이 된 쇼카손주쿠의 학생들, 우리에겐 무엇인가=하기시에는 서쪽(W)을 도는 버스와 동쪽(E)을 도는 버스, 두 종류가 있는데 100엔만 주면 탈 수 있다.

쇼카손주쿠는 E버스를 타고 마스모토강을 건너 히가시하기역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쇼인 신사 안에 있다. 집 앞에는 ‘메이지유신 태동지’라고 쓰인 입석이 있다.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요시다 쇼인의 탄생지와 묘소, 이토 히로부미의 구저택과 별장이 있다.

쇼카손주쿠(松下村塾)는 ‘소나무 아래의 사숙’이라는 단어의 뜻처럼 주변에 크고 작은 소나무가 많았다. 원래는 강의실 한 칸이었지만 교무실처럼 사용하는 한 채가 붙어 있다. 8장의 다다미 단칸방에서 일본 보수우익 사상과 정한론이 나왔다는 게 의아하다. 그의 제자들의 모습은 사진 액자에 걸려 있다. 일본에서는 엄청난 인물들이지만 우리 콘텐츠에는 이토 히로부미 외에는 찾아보기 힘들다.

요시다 쇼인보다 세 살 어린 제자 기도 다카요시는 의사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유신 정부 최고의 실세로 병학자이자 서구식 헌법 제정에 일익을 담당한다.

요시다 쇼인의 가장 탁월한 첫 번째 제자라 할 수 있는 다카스키 신사쿠(高杉晋作)는 메이지유신 세력들에게 자신감을 갖게 한 인물이다. 25세에 평민 군대인 ‘기헤이타이(奇兵隊)’를 조직해 4000여명으로 조슈 정벌을 하러 온 10만 막부 대군을 물리친 풍운아다. 사쓰마번이 조슈번과 손을 잡게 한 원동력이기도 했다. ‘기마 기(騎)’자가 아닌 ‘기이할 기(奇)’자를 쓴 이유를 알 만했다. 그는 28세에 폐결핵으로 죽었다.

일본 총리를 역임한 아베 신조(安倍晋三)의 ‘晋(진)’은 다카스키 신사쿠의 ‘晋(진)’에서 따왔다. 아베의 외고조부인 오시다 요시사마가 요시다 쇼인의 외부 문화생이고, 외조부는 역시 총리이자 A급 전범인 기시 노부스케다. 노부스케의 친동생인 사토 에이사쿠 전 총리도 이 지역 출신이다.

이토 히로부미 별채 내부

▶요시다 쇼인의 제자들인 이토 히로부미와 그의 정적 야마가타 아리토모도 동문수학 관계=쇼카손주쿠에서 수학한 이토 히로부미는 유신 3걸이 모두 40대에 죽는 바람에 유신정부의 최대 수혜자가 됐다. 이토는 이들보다 열 살 정도 어리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최고직에 오른 그는 초대 총리를 포함해 5대, 7대, 10대 등 4차례 총리를 역임했다.

아명이 하야시 리스케(林利助)인 이토는 야마구치현 남부 해안의 히카리시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그의 부친이 하기번 무사 집안의 양자가 되면서 이토 성을 얻어 하급 무사 신분이 됐고, 9세부터는 하기시에서 자랐다.

“사나이 일생은 한 편의 시(詩)가 되어야 한다”고 했던 요시다 쇼인이 ‘도막(倒幕·막부 타도) 운동’을 계속하다 29세에 반역죄로 참수당하고 시체가 나무통 안에 구겨지자 이토는 스승의 시신을 수습하며 복수를 다짐했다. 이토는 ‘다크 히어로’인 다카스키 신사쿠를 특히 좋아했다. 조선 침략의 원흉 이토의 집에 들어서면 다소 흥분될 수밖에 없다.

3대와 9대 총리를 역임한 야마가타 아리토모도 요시다 쇼인의 제자다. 자신보다 세 살 어린 이토 히로부미의 정적이기도 하다. 이토가 안중근 의사에 의해 저격당하자 당시 일본에서는 아리토모의 소행이라는 말이 나돌았다. 메이지 정부의 징병제(1873년)를 도입하는 등 일본 군국주의의 아버지로 불린다. 아리토모는 프로이센의 비스마르크를 만나 군사 체제의 근대화 방법을 배웠다. 일본의 계파정치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다양한 역사적 인물이 등장하는 콘텐츠가 제작돼야=이토 정부의 외무대신 이노우에 가오루도 이곳 출신이다. 이토는 절친인 이노우에를 조선 공사로 발령 내려 조선 병탄작업을 진행시켰다. 이노우에는 후임으로 미우라 고로를 천거해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키게 한다. 이노우에와 미우라 고로는 조선에서 러시아 세력이 커져가는 데에 대한 반작용으로 터닝포인트를 노리며 조선 황후 시해계획을 기획하고 실행했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주인공이자 아베 이전에 ‘일본 총리 최장 재임’기간 기록을 가졌던 가쓰라 다로로 하기 출신이다. 초대 조선 총독을 지내고 18대 일본 총리까지 오른 데라우치 마사타케도 야마구치시 출신이다. 대한제국 병합과 무단통치의 실행자인 그는 세이난전쟁이 발발한 후 반란군을 토벌하다 오른손에 중상을 입어 오른손으로 총을 쏠 수 없지만 후원자인 아리토모 등의 지원에 힘입어 육군대신까지 승승장구했다. 러일전쟁 뤼순 전선 육군 사령관인 노기 마레스케도 야마구치현 시모노세키 출신으로, 요시다 쇼인 집안과 관계가 있다.

이토 히로부미와 외무대신 이노우에 가오루 외에 ‘공업의 아버지’로 불리는 야마오 요조(공부경)와 이노우에 마사루(철도청 장관), 엔도 긴스케(조폐국장)는 모두 영국에서 유학한 뒤 본국에 돌아와 메이지산업혁명 등 일본 근대화에 앞장섰는데, 모두 조슈번 출신이어서 ‘조슈 파이브’로 불린다.

구한말 사극을 제작할 때 이들이 지금보다 다양하게 나오면 근대를 훨씬 더 입체적으로 볼 수 있다. 우리에게는 어두운 과거일지라도 엄연히 존재하는 우리 역사를 제대로 바라보기 위해서는 이들이 우리가 제작하는 사극 콘텐츠에도 등장해야 할 것 같다.

서병기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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