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위의 시인’ 파파이오아누 신작 ‘잉크’…“이해 못할까 두려워 말아요”

허진무 기자 2023. 5. 10.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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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미트리스 파파이오아누 신작 <잉크>의 한 장면. (C)Julian Mommert. 국립극장 제공

무대의 막이 오르면 캄캄한 암흑 속에서 물이 보슬비처럼 바닥을 적신다. 한 남자가 물에 흠뻑 젖은 검은색 옷을 입은 채 모습을 드러낸다. ‘무대 위의 시인’으로 불리는 그리스 출신 연출가 디미트리스 파파이오아누(59)가 자신의 신작 <잉크>에 직접 등장하는 첫 장면이다. 파파이오아누의 <잉크>는 오는 12~14일 서울 중구 국립극장에서 공연한다. ‘물’을 원형적 소재로 활용해 인간의 몸과 시각적 이미지를 결합해 시를 보는 듯한 신비로운 무대를 구현한다. 대사가 없는 2인극이다.

파파이오아누는 지난 9일 국립극장에서 기자들과 만나 “관객께서는 무언가 이해하지 못할까봐 두려워할 필요가 전혀 없다”고 말했다. “작품을 분석하고 판단하는 최고의 적임자는 제가 아니죠. 제 역할은 실행하는 것이고 분석은 다른 사람들의 몫이라고 생각해요. 공연이라는 장르에서 어떤 명확한 이해를 바랄 필요도 없죠.”

파파이오아누는 작품의 내용을 미리 구상한 뒤 제작하지 않고, 착상을 자유롭게 떠올려가며 작품을 제작한다. 그는 “물을 이용한 작품을 만들겠다는 생각만 갖고 <잉크>를 시작했다. 미리 생각한 서사나 정해진 목표 같은 것도 없었다”고 말했다. “저는 자유롭게 실험하는 과정이 ‘네가 원하는 건 이것이다’라고 이야기해주길 바라고 작업해요. ‘물’이라는 요소를 선택한 의식적인 이유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다만 물은 현실의 모든 것을 변화시키거나 용해시키고, 빛을 흡수하거나 반사하기도 하죠. 물은 굉장히 익숙하지만 원초적이고 태고의 요소라고 생각해요.”

디미트리스 파파이오아누 신작 <잉크>의 한 장면. (C)Julian Mommert. 국립극장 제공

파파이오아누는 연출은 물론 안무, 의상, 조명, 미술 등까지 전부 담당하고 직접 배우로 출연하기도 한다. <잉크>에선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에일리언> <노스페라투>의 한 장면, 고야의 그림 ‘아들을 잡아먹는 크로노스’, 가쓰시카 호쿠사이의 춘화, 니콜라 테슬라의 전기 실험, 베트남 전쟁에서 고엽제로 숨진 태아 등의 이미지를 차용해 강렬한 시각적 경험을 전한다. 파파이오아누는 “저는 작품의 종류나 규모와 상관없이 창작에 대한 모든 요소를 통제하려 한다”며 “모든 요소를 종합하는 것이 제 작업 방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파파이오아누는 원래 미술을 전공해 화가이자 만화가로 활동했지만 서서히 공연예술로 창작 영역을 옮겼다. 1986년 ‘에다포스 댄스 시어터’를 창단한 뒤 실험적인 공연들로 주목을 받았고, 2004년 아테네 올림픽 개·폐회식 총감독을 맡아 유명해졌다. “저는 항상 화가의 눈으로 공연예술을 하죠. 저는 캔버스나 종이 위보다는 무대 위에서 더 좋은 화가라고 생각해요. 공연예술을 통해 같은 시대를 사는 사람들과 만날 수 있다는 점이 저에게는 굉장히 중요했어요.”

<잉크>는 2020년 이탈리아 토리노 댄스 페스티벌에서 초연했고, 올해 월드투어에 돌입했다. 아시아에선 한국이 첫 공연이다. 파파이오아누는 기자간담회 내내 <잉크>의 서사나 의도에 대해선 입을 굳게 닫았다. 자신은 공연을 ‘하는 사람’이고, 공연을 ‘보는 사람’은 관객이라는 입장이다.

“작품에 대해 너무 많이 설명하면 관객이 가이드라인에 의존할까봐 주저하게 되네요. ‘무대 위의 시인’이란 별명은 예술가로서 저의 의도를 정의하는 말이라고 생각해요. ‘시인’의 어원은 고대 그리스어 ‘하다’에서 왔기 때문에 ‘시인’은 ‘하는 사람’이죠. 저는 작품을 단단하게 규정하지 않으면서도 최선을 다하는 데 집중하려고 해요.”

디미트리스 파파이오아누. (C)Julian Mommert. 국립극장 제공

허진무 기자 imagin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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