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스팝 무기로 틱톡 타고 英·美 석권…피프티피프티 성공 요인은?
데뷔 165일·K-팝 최단 빌보드 입성
글로벌 음악 트렌드인 신스팝 장르
듣기 편한 이지 리스닝 노래의 힘
10대 놀이터 틱톡에서 자발적 인기
원 히트 원더 우려…팬덤 구축 시급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K-팝의 미국 빌보드 차트 입성이 흔해진 시대다. 때문에 초반엔 ‘큐피드의 행운’이라 여겨졌다. 이제는 다르다. 그룹 피프티 피프티(FIFTY FIFTY)의 상승세가 예사롭지 않다. 이름도 생소했던 신인 걸그룹의 행보는 ‘반짝 돌풍’을 넘어 K-팝에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피프티 피프티는 데뷔 165일 만에 빌보드에 입성, K-팝 사상 최단 기록이라는 역사를 쓰고 있다. ‘돌풍의 시작’은 지난 달로 시계를 되돌린다. 피프티 피프티는 첫 번째 싱글 ‘더 비기닝: 큐피드(The Beginning: Cupid)’의 타이틀곡 ‘큐피드(Cupid)’로 지난 4월 1일자 미국 빌보드 메인 싱글 차트인 ‘핫100’에 100위로 진입했다. 이후 꾸준히 순위를 올리고 있다. 2주차에 94위, 3주차 85위, 4주차 60위, 5주차 50위, 6주차 41위에 올랐다.
이번주 성적은 단숨에 뛰어올랐다. 10일 공개된 최신 차트에 따르면 ‘큐피드’는 ‘핫 100’에 19위로 오르며, 톱20에 처음으로 이름을 올렸다. 이는 해외 팝스타와의 협업 없이 이룬 K-팝 걸그룹 단일곡 최고 성적이다. 앞서 블랙핑크가 셀레나 고메즈와 ‘아이스크림(ICE CREAM)’으로 13위를 기록했다.
미국 빌보드와 양대 차트로 꼽히는 영국 오피셜 차트에서의 성적은 더 높다. 이미 K-팝 걸그룹 최초의 기록을 세웠다.
최근 영국 오피셜 차트가 발표한 최신 차트(5월 5~11일)에 따르면 ‘큐피드(Cupid)’는 이번 주 싱글 차트 톱100에서 9위에 올랐다. 이 곡은 오피셜 싱글 차트 톱100에 96위로 처음 진입한 이후 61위, 34위, 26위, 18위, 9위에 이르기까지 6주 연속 차트에 머무르며 새로운 기록을 써내려가고 있다.
지금까지 영국 오피셜차트에서 기록한 K-팝 걸그룹의 최고 성적은 블랙핑크가 2020년 레이디가가와 협업한 ‘사워 캔디(Sour Candy)’였다. 당시 ‘사워 캔디’는 17위에 올랐다.
오피셜닷컴은 “피프티 피프티는 ‘큐피드’가 첫 번째 K-팝 걸그룹 ‘톱 10’ 노래가 되면서 영국 차트의 역사를 만들었다”며 “블랙핑크, 뉴진스, 트와이스 같은 K-팝 걸그룹이 아직 달성하지 못한 기록을 뽐냈다. ‘큐피드’의 성공은 영국에서 K-팝의 꾸준한 성장을 증명한다”고 분석했다.
피프티 피프티 멤버들조차 “너무 놀라 입을 틀어막았다”(시오)는 성취의 배경엔 두 가지 중요한 요소가 핵심 전략으로 자리하고 있다.
가장 큰 힘은 ‘노래’다. 피프티 피프티의 ‘큐피드’는 몇 해전부터 국내외에서 불고 있는 신스팝 트렌드를 이어간 곡이다.
정민재 대중음악평론가는 “영미 팝 시장에선 위켄드의 ‘블라인딩 라이츠’(2019), 두아 리파의 ‘돈트 스타트 나우’가 큰 인기를 얻으면서 시작된 1970~80년대 레트로 사운드에 대한 수요가 신스팝의 흐름으로 이어지고 있다”며 “‘큐피드’는 이런 트렌드의 연장에 있는 곡으로, 통속적인 코드 진행과 멜로디로 누구나 쉽게 들을 수 있는 노래다”라고 분석했다.
국내에선 지난해 뉴진스의 등장 이후 ‘이지 리스닝’ 계열의 곡들이 대거 등장하는 추세와도 멀리 있지 않다. ‘큐피드’는 국내 최대 음원 플랫폼 멜로 톱100에서도 최고 22위까지 기록했다.
‘큐피드’의 성공 뒤에 ‘노래의 힘’을 뛰어넘는 ‘플랫폼의 힘’도 작용했다. 이 곡은 틱톡의 한 사용자가 ‘2023년 최고의 프리 코러스’로 꼽은 이후 바이럴이 시작됐다.
2021년 등장한 미국의 괴물 신예 올리비아 로드리고의 노래 ‘드라이버스 라이센스’가 틱톡에서의 자발적 확산으로 큰 사랑을 받으며 국내에서까지 인기를 얻은 사례가 있었으나, K-팝 가수의 노래가 틱톡을 타고 영미 팝 시장에 영향을 미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특히 국내 가요계에서 틱톡을 활용하는 방식은 의도된 챌린지가 다수였기에 ‘큐피드’의 사례는 상당히 생소하게 다가오고 있다.
정 평론가는 “국내에선 틱톡의 영향력이 크지 않아 와닿지 않을 수 있지만, 미국 시장에선 10대들이 습관처럼 들락거리는 플랫폼으로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틱톡에서의 노래들이 인기를 얻으면 많은 사용자들이 음악과 무관한 영상의 배경음악으로 사용해 차트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게 된다”는 것이 정 평론가의 설명이다.
K-팝 중 이런 사례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블랙핑크 리사의 ‘머니’는 틱톡에서의 바이럴로 미국 빌보드, 영국 오피셜 차트에서 역주행을 기록했다. 막상 공개 당시엔 그리 큰 반응은 아니었다. 이 즈음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게임’이 전 세계에서 인기를 얻은 이후 틱톡 내 관련 영상에 난데없이 리사의 ‘머니’가 배경음악으로 사용돼 차트 역주행이 시작됐다. “노래와는 관계없이 곡명과 드라마의 주제가 맞닿으며 활용 빈도가 높았다”는 것이 틱톡 측의 분석이다.
‘큐피드’도 비슷한 사례다. 틱톡 사용자들은 노래와는 상관없는 모든 영상에 ‘큐피드’를 사용 중이다. 기획사의 영리한 전략이 통한 점이 있다면, 한국어 원곡과 영어곡인 ‘큐피드 트위 버전’을 앨범에 함께 수록했다는 점이다. 틱톡 내에선 이 때문에 ‘큐피드’가 K-팝 가수의 곡인 줄 몰랐다는 반응이 상당하다.
익명의 틱톡커가 이 영상을 소개할 때 원곡의 BPM을 높여 올린 탓에, 여러 차트에선 ‘큐피드’ 원곡보다 속도를 높인 ‘스페드 업(Sped Up·속도를 높인) 버전’이 더 큰 반응을 얻고 있다. 이번주 오피셜 차트에선 ‘큐피드 트윈 버전-스페드 업 버전’이 ‘데일리 바이럴 송스(Daily Viral Songs)’ 차트 1위에 오르기도 햇다.
‘큐피드’의 인기는 유튜브에서도 확인되고 이다. 2개월 전 올라온 피프티 피프티의 공식 뮤직비디오는 현재 4900만 조회수를 기록 중이다. 영미 차트를 석권했지만, 유튜브에선 동남아시아 지역에서의 반응이 좋다. 써클차트에 따르면 피프티 피프티의 유튜브 영상 조회수의 비중은 필리핀이 13.3%로 가장 높았고, 인도네시아가 10.1%, 베트남이 8.74%로 톱3에 올라있다. 미국에선 8.39%의 비중을 차지했다.
지금까지의 흐름으로 봐선 빌보드 차트에선 더 높은 성적도 기대된다. 정 평론가는 “기존 빌보드 차트에 오른 곡들의 순위 상승 과정을 살펴보면, 피프티 피프티는 현재의 추이를 이어갈 경우 2~3주 안에 빌보드 ‘핫100’의 10~15위 안에 들어갈 것으로 예상된다. 몇 주 안에는 톱10에 근접할 것으로 보인다”며 “이 경우 좀 더 많이 울려퍼지고 소구하는 히트곡이 나오게 되리라 본다”고 전망했다.
피프티피프티의 성과는 K-팝 업계에도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 소위 말하는 하이브, SM, JYP, YG 등의 대형 기획사 소속 빅그룹이나 TV오디션을 통해 결성된 K-팝 그룹이 아니고는 성공 확률이 낮아진 업계에 피프티 피프티의 사례는 신선한 자극과 희망이 되고 있다.
정 평론가는 “피프티피프티의 성공이 여러 기획사에 새로운 충격을 줬으리라 본다”며 “의도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지만, 틱톡에서 챌린지를 넘어 실질적 바이럴로 이끌 수 있다는 점, 이지 리스닝 음악 트렌드의 영향력이 크다는 점이 하나의 힌트가 됐다고 본다”고 말했다.
다만 피프티 피프티에겐 과제가 많다. 음악의 인기로 글로벌 차트에서 활약 중이나, 그룹에 대한 인지도는 여전히 떨어진다. 노래는 알지라도 그룹의 이름조차 모르는 사례도 많다. 정 평론가 역시 “노래가 인기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수의 인지도나 대중의 반응은 전무하고 있어 원 히트 원더(One Hit Wonder. 데뷔 이후 한 개의 싱글(혹은 곡)만 히트시키고 사라진 가수)에 대한 우려도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써클차트에 따르면 피프티 피프티의 SNS 팔로워 추이는 4월 초 하루 최고 4만 명 가량 증가하다 차츰 떨어져 4월 중순 일간 2만 명 정도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스포티파이에서도 4월 초엔 1만 명의 팔로워 수가 증가했으나, 4월 중순엔 6000명대로 떨어졌다. 현재로선 탄탄한 팬덤 구축이 시급한 과제다.
김진우 써클차트 수석 연구위원은 “음원 관련 지표와 팬덤 관련 지표를 종합해 볼 때 현재 피프티 피프티 관련 이슈는 가수보다는 노래에 더 비중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며 “단기적 이슈가 아닌 지속적인 성장을 위해선 ‘큐피드’에 대한 국내외적 관심을 가수 자신에게로 돌려 걸그룹 시장에서 입지를 다질 수 있도록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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