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RA 개정 기대말고 R&D 2배 투자… 2년뒤 韓전기차에 깜짝 놀라게 해야”[현안 인터뷰]
현대·기아차 매출 감소… 年 1조원 타격 전망
IRA는 美자국보호법… ‘개정논의’는 립서비스
美배려만 바라다간 2026년 전기차 경쟁 도태
韓 R&D 지원 8000억→1조6000억으로 늘려야
기업·정부 원팀으로 대응 ‘넥스트스텝’ 준비를
북미에서 최종 조립된 전기차에 한해 최대 7500달러(약 990만 원)의 보조금(세액공제)을 지급하는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이 지난해 8월 시행되면서 국내 완성차 업체를 향한 파고가 본격화하고 있다. 기대를 걸었던 지난달 IRA 세부지침 발표에서도 현대자동차·기아의 전기차 모델은 보조금 대상에서 최종 제외됐다. 2024년 하반기 완공을 목표로 하는 미국 조지아주 현지 공장을 완성하기 전까지 현대차·기아는 가격 측면에서 약점을 안고 미국을 비롯한 글로벌 완성차 업체들과 경쟁을 이어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일각에서는 긴밀해진 한·미 관계를 활용해 IRA 개정을 이끌어 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지만, 관련 업계 전문가들은 미국이 자국 우선주의 정책의 핵심으로 완성한 IRA를 뒤집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고 진단한다.
국내 자동차산업 정책 분야의 최고 전문가인 이항구(64) 자동차융합기술원 원장도 IRA에 관련해선 ‘현실론’을 강조한다. 약 2년의 보조금 공백기 동안 수동적으로 미국의 입만 바라보고 있을 게 아니라 현실적인 피해 파악과 과감한 연구·개발(R&D) 투자 등을 통해 초기 형성 단계를 넘어 성장 단계에 접어들 전기차 시장 진검승부에 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원장은 “IRA는 단순히 한 기업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기차라는 미래 핵심 산업의 글로벌 주도권이 걸린 국가 차원의 문제”라며 “기업과 정부가 한 팀이 돼서 위축될 수 있는 R&D 분야에 적극 투자해 ‘넥스트 스텝’을 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기술원이 있는 전북 군산시에 머물다 업무차 서울을 찾은 이 원장을 지난 3일 중구의 한 카페에서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다.
―외교 차원의 노력이 있었지만 IRA 개정과 관련해선 새로운 소식이 없다.
“미국은 자국 우선주의 정책을 위해 오랜 기간에 걸쳐 IRA를 만들었다. 법이 완성된 이상 IRA를 개정하는 건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미국 측에서 논의가 가능하다는 얘기도 나오지만 냉정하게 얘기하면 립서비스일 가능성이 크다. 미국 입장에서는 이미 IRA를 종료된 사안으로 보고 있을 것이다.”
―IRA 개정이 어렵다면 국내 자동차산업이 받을 타격은 어느 정도로 예상하나.
“지난해 8월 IRA 시행 이후 최근 나오는 전기차 판매 관련 수치들을 보면 이미 보조금 배제에 따른 영향이 나타나고 있다. 미국 자동차 시장 분석업체 켈리블루북에 따르면 올해 1분기 현대차·기아의 미국 현지 전기차 판매는 1만3834대로 전년 동기(1만9321대) 대비 28.4% 줄었다. 대수로는 약 5000대가 감소한 셈이다. 현대차 미국판매법인(HMA)의 가장 최근 자료를 봐도 전기차 대표 모델인 아이오닉5의 지난달 미국 판매는 2323대로 전년 동기 대비 13.2%, 기아의 EV6는 1241대로 52.8%씩 줄었다. 집계마다 수치가 다를 순 있지만 보조금 제외로 인한 가격 경쟁력 저하가 판매 감소로 이어졌다고 봐도 무리는 아니다. 올해 1분기 데이터를 기반으로 대략적으로 추산해 본다면 미국 현지 공장이 완성되기까지 공백기에는 한 분기에 2500억 원, 연간 1조 원 정도의 매출 차질이 발생할 수 있다고 본다.”
―위기 타개를 위한 방안은 없나.
“미국 공장을 짓는 동안 현대차·기아도 조건 없이 보조금이 지급되는 리스 시장 공략과 고급화 마케팅 등을 통해 피해를 최소화할 것이다. 하지만 근본적인 해결 방안은 될 수 없다. 현대차·기아의 상품성과 제품 이미지는 이미 글로벌 시장에서 충분히 인정을 받고 있는데 가격 경쟁력에서 밀리면 답이 없다. 지난해 테슬라에 이어 전기차 판매 2위까지 올라갔던 현대차가 이제는 포드, 제너럴모터스(GM) 등에 역전당한 건 전적으로 IRA 영향 탓이다. 전기차 시장 형성 초기에 현대차·기아가 입지를 확실히 다질 좋은 기회를 만들었는데 IRA가 발목을 잡은 부분이 가장 아쉽다.”
―약 2년의 보조금 공백기가 발생한다면 국내 완성차 업계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무엇인가.
“이 부분이 가장 중요하다. IRA가 개정된다면 가장 좋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게 어렵다면 IRA 영향이 사라지는 2년 후 깜짝 놀랄 만한 결과물을 미국 소비자들에게 보여줄 필요가 있다. IRA 개정에만 의지한 채 손을 놓고 있으면 2026년쯤 소위 전기차 시장의 대경쟁이 본격화할 때 한국산 전기차는 뒤로 밀려날 수밖에 없다. IRA로 인한 타격으로 국내 완성차 업체들의 R&D 투자가 위축되는 건 당연한 일인데 이때 정부가 나서 적극적으로 지원을 늘릴 필요가 있다. IRA는 단순히 한 기업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기차라는 미래 핵심 산업의 글로벌 주도권이 걸린 국가 차원의 문제로 봐야 한다. 기업과 정부가 한 팀이 돼서 R&D 분야에 적극 투자해 넥스트 스텝을 준비해야만 향후 IRA가 아닌 또 다른 무역장벽에 가로막히더라도 ‘그래도 한국차는 살 가치가 있다’는 이미지를 구축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어떤 지원이 필요하다는 것인가.
“IRA로 인한 판매 타격은 기업이 감내한다고 해도 R&D 부문 투자에는 정부가 최대한 많은 지원을 해줄 필요가 있다. 현재 한국 제조업에서 자동차산업이 차지하는 기여도는 13%에 달하지만 자동차 분야에 지원되는 R&D 비용은 정부 지원액의 4∼5% 수준밖에 되지 않는다. 금액으로는 8000억 원 정도인데 자동차 분야 혁신 역량 강화를 위해서라도 지금의 두 배인 연간 1조6000억 원 정도의 지원은 필요하다.”
―정부의 기업 지원에 대한 반감도 존재한다.
“R&D 투자와 혁신 역량 강화를 과거처럼 단순히 재벌을 지원한다는 개념으로 인식하면 곤란하다. 세계 주요국이 전기차 시장 선점을 위해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데 우리나라만 ‘기업이 알아서 하라’는 식으로 대응하면 당연히 경쟁에서 뒤처질 수밖에 없다. 당장 IRA만 해도 미국 정부가 나서서 자국 완성차 기업들을 보호해주는 것 아니겠나. R&D 분야 지원이라고 하면 특정 기업에 대한 직접 지원도 아니고, 이를 기반으로 자동차산업에서 발생할 지역경제 활성화, 고용 창출 등의 효과까지 생각해봐야 한다. 모든 대내외 환경이 불확실한 현시점에 정부와 기업이 같이 뛰며 시너지를 발휘할 필요가 있다. 보조금 공백기가 생긴 2년 동안 모든 역량을 R&D에 집중해 한국만 만들 수 있는 차량, 기술, 부품 등을 개발한다면 2026년부터는 어떤 장애물도 넘을 수 있다고 본다.”
―향후 전기차 시장에서의 경쟁력을 가를 핵심은 무엇이라고 보나.
“이 대목에서 R&D가 더욱 중요해진다. 내연기관에서 전동화로의 전환이 본격화하면 디자인부터 각종 기능까지 기존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많은 부분이 바뀔 것이다. 지금 나오는 전기차는 여전히 내연기관차의 디자인을 따라가고 있지만 사실 기능적인 측면만 놓고 보면 전혀 다른 모습으로 진화해 나갈 수밖에 없다. 전기차의 전비, 배터리의 성능과 안전성, 생산 공장의 디지털화 등도 완성된 전기차의 경쟁력으로 녹아들 것이다.”
―공장의 디지털화를 위해서는 노동조합과의 협의가 필요한데.
“실제 국내에서는 디지털 공정에 대해 얘기하면 노조에서 상당한 반감을 보인다. 디지털 공정은 공장 스마트·자동화와는 차이가 있다. 디지털 공정은 공장의 모든 데이터를 클라우드에 수집해 이를 기반으로 시스템을 운영하는 것인데 단순히 생산 인력이 줄어들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지금 중국은 디지털 공정을 빠르게 도입하며 생산성과 경쟁력을 높이고 있는데 국내에서는 이 작업이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기업 입장에서는 노조와의 갈등을 우려해 기존 인력들이 자연스럽게 정년퇴직할 때까지 기다리는 방법으로 대응하게 되는데 이렇게 디지털 공정이 지연되면 해당 기업은 물론 국가 차원에서도 큰 손해다. 디지털 공정을 위해선 직원 재교육 등 물리적인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노조도 이 문제에 대해 전향적으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최대 전기차 시장 中, 전동화·고급화로 재공략”
■ 李원장의 글로벌전략 제안
이항구 자동차융합기술원 원장은 세계 최대 자동차 시장 중 하나인 중국에서 한국 완성차 업체들이 고전하고 있는 이유가 단순히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 논란 때문만은 아니라고 지적했다. 이는 사드 논란에서 벗어나야만 새로운 기회를 만들 수 있다는 응원의 의미이기도 하다.
이 원장은 “글로벌 무대에서 펄펄 나는 현대자동차·기아가 중국 시장에서만 힘을 못 쓰는 건 스스로 무너진 경향이 크다”며 “2016년 사드 사태 이후 판매량 회복을 못 하고 있다는 얘기를 하기보단 중국 소비자들의 취향 등에 대한 더 세밀한 연구와 접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 원장은 과거 일부 완성차 업체들이 중국에 택시와 승용차 모델을 함께 판매하거나, 옵션을 부실하게 제공해 중국 소비자들로부터 외면을 받은 사례가 적지 않다고 설명했다. 반면 일본 완성차 업체들의 경우 양국 간 국민감정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도 꾸준히 현지화 전략을 추진한 끝에 이제는 중국 시장에 안착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원장은 “일본 사례를 보면 중국이 ‘난공불락’의 시장은 아니다”라며 “이미 현대차·기아 차량의 우수한 상품성에 대해서는 중국 소비자들도 SNS 등을 통해 충분히 알고 있을 텐데 현지 맞춤형 전략에 조금 더 공을 들인다면 문은 열릴 것”이라고 했다.
전동화 전환기에 중국은 최대 전기차 시장으로도 급부상했다. 한국자동차연구원에 따르면 지난해 순수 전기차의 중국 판매량은 507만 대로 세계 1위를 차지했다. 현대차·기아는 최근 막을 내린 ‘2023 상하이 국제 모터쇼’에 참가해 전동화·고급화 전략을 전면에 내세워 중국 시장 재공략을 선언했다.
이 원장은 “미국이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으로 벽을 세웠지만 중국은 아직 정책적으로 막는 건 없다”며 “그 어느 나라보다 빠르게 전동화로 전환하고 있는 중국 시장을 잘 공략한다면 IRA로 인한 타격을 상당 부분 만회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1959년 서울 출생 △용산고 △한양대 생물학과 △워싱턴대 경영학 석사 △국민대 경영학 박사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한국자동차연구원 연구위원 △호서대 기계자동차공학부 조교수 △자동차융합기술원 원장
이근홍 기자 lkh@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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