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선암사와 조계산
(순천=연합뉴스) 현경숙 기자 = 전남 순천 조계산 동쪽 기슭에 자리 잡은 선암사는 한국 대표 사찰 중 하나다. 529년 아도화상이 개산하여 고청량산 해천사라고 명명했다는 설과 875년 도선국사가 창건해 선암사라 이름 지었다는 설이 함께 전하는 천년고찰이다. 한국 불교 종단 중 조계종 다음으로 규모가 큰 태고종의 유일한 총림이기도 하다.
선암사는 해남 대흥사, 공주 마곡사, 보은 법주사, 양산 통도사, 영주 부석사, 안동 봉정사와 더불어 2018년 한국의 산지승원으로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한국 문화에 관심이 있는 내외국인이라면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그 가치를 느껴봐야 할 사찰이다.
불교 신도가 아니더라도 선암사를 찾는 탐방객은 연중 끊이지 않는다. 외국인도 적지 않다. 세계적인 여행 정보안내서인 미슐랭가이드는 선암사와 경내 승선교에 각각 별점 3개를 부여했다. 이 별점은 최고 등급 여행지를 뜻한다.
'꽃 절' 선암사
웅장하고 번잡한 거대 사찰과 거리가 먼 선암사에는 여행자를 매료하는 요소들이 많다. 그 매혹은 단아하고 은근해 자신을 내세우거나 자랑하지 않는다. 선암사가 다른 절집과 구분되는 특징 중 하나는 꽃이다. 눈과 서리를 이기고 피어나는 매화를 시작으로 동백, 벚꽃, 산수유, 개나리, 진달래, 자두꽃, 철쭉, 목련, 박태기 등 온갖 봄꽃이 담장 옆에 흐드러지게 핀다.
보라색 얼레지, 흰 홀아비바람꽃, 노란 민들레 등 마당 구석구석에 돋아난 작은 야생화들까지 가세해 주체할 수 없는 봄의 기쁨을 노래한다. 남쪽 해안 지대에 위치한 선암사에는 여느 사찰이나 웬만한 정원에서 볼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다양하고 많은 꽃이 계절을 장식한다. '꽃 절'이라고 불리는 이유이다.
원통전 뒤와 각황전 담 옆에는 수령 350∼650년의 매화가 자라고 있다. 선암매로 불리는 이 노거수들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돼 있다. 세월의 흔적인지 검버섯처럼 거뭇거뭇해진 가지들에 핀 화사한 꽃들은 경외심마저 불러일으킨다. 선암사에서는 백매, 홍매, 청매를 모두 볼 수 있다.
수령 400년의 와송 옆에는 가지가 축축 늘어진 버들매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처진 올벚나무라고도 불리는, 흔치 않은 수종이다. 매화가 질 때쯤 벚꽃들이 피어난다.
꽃송이가 큰 왕벚꽃도 참배객들의 사랑을 받는다. 첨성각 앞에는 삼지닥나무가 노란 꽃을 피우고 있었다. 탐방객들은 처음 보는 꽃이라며 신기해했다.
올해는 따뜻한 기온 탓인지 봄꽃들이 시차를 두지 않고 한꺼번에 피어나 한바탕 꽃 잔치를 벌인 듯했다. 여름과 가을이 되면 수국, 석류꽃, 배롱나무, 상사화, 꽃무릇, 국화 등이 차례로 이 향연을 이어갈 것이다.
꽃과 함께 선암사의 정취를 돋우는 것이 이곳에 유달리 많은 연못이다. 정겨운 연못과 흙으로 지은 돌담은 외가나 고향에서 느낄 법한 편안함을 안긴다.
일주문 밖 삼인당은 긴 알 모양의 연못 안에 작은 섬이 있는 독특한 양식이다. '삼인'은 제행무상인(諸行無常印), 제법무아인(諸法無我印), 열반적정인(涅槃寂靜印)의 삼법인을 뜻한다. 모든 것이 변하고 '나'도 없으니, 이를 알면 열반에 이른다는 불교 사상을 표현하고 있다. 섬에는 배롱나무가 심겨 있다. 배롱나무 밑에 빨간 꽃무릇이 필 때 삼인당의 운치는 절정에 이른다.
선암사 뒷간은 화장실 건물로는 유일하게 문화재로 지정됐을 만큼 건축미가 남다르다. 1700년대에 지어졌다는 추정이 있으나 첫 건축 연대는 확인되지 않는다. 100년 전인 1920년 이전에도 지금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는 것은 확실시된다.
재래식이지만 화장실 깊이가 깊고 통풍이 잘되도록 설계돼 냄새가 나지 않는다. 탐방 필수 코스 중 하나로, 흥미를 자극하는 곳이 아닐 수 없다.
선암사의 상징이 될 정도로 유명한 승선교는 입구에서 삼인당으로 올라가는 길 중간에 있다. 주차장에서 일주문까지 거리는 1㎞를 훌쩍 넘는다. 차에서 내려 계곡을 따라 걸어 올라가다 보면 탐방객은 천천히 불심의 세계로 들어가게 되는 듯하다. 물소리, 바람 소리, 새 소리를 들으며 불교의 가르침에 귀 기울일 준비를 한다.
계곡을 가로질러 걸쳐진 승선교는 무지개형 돌다리이다. 산사를 찾은 중생은 이 다리를 건넘으로써 번뇌와 오욕을 씻고 선계로 들어간다는 의미를 간직한 다리이다. 승선교는 1707년(숙종 33년)에 세워졌다.
신선이 내려오는 누각이라는 뜻의 강선루는 승선교 위쪽 길에 세워져 있다. 계곡으로 내려가 바위 위에 앉으면 홍예의 반원 안에 강선루가 서 있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온다. 홍예, 계류, 누각이 빚어낸 풍경은 자연과 사람이 함께 만든 예술이지 싶다.
종교와 생명의 터전, 조계산
조계산(해발 884m)은 한국 불교의 가장 큰 두 종단인 조계종과 태고종의 본산을 품은 명산이다. 산 서쪽의 송광사는 조계종 총림 중 하나이고, 동쪽 선암사는 태고종 유일 총림이다. 총림은 참선 수행 공간인 선원, 경전 교육기관인 강원, 계율 전문교육기관인 율원을 모두 갖춘 사찰을 말한다.
두 종단의 총림이 함께 있는 곳은 조계산이 유일하다. 이는 조계산의 뛰어난 지세를 방증한다고 일컬어진다.
조계산은 산세가 순한 흙산이다. 물이 풍부해 계곡 물소리가 우렁차고 숲은 울창하다. 정상인 장군봉에 올라 내려다보니 서리 빛 대지가 햇살 아래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파란 새잎이 돋아나기 전, 물이 잔뜩 오른 회색 나뭇가지들이 빚어낸 광채였다.
선암사와 장군봉을 잇는 길목에는 큰굴목재, 작은굴목재라는 고개가 있다. '굴목재'는 골짜기를 가로막는 줄기에 난 길을 뜻하는 '골막이'가 어원이다. 두 고개를 잇는 능선에는 굴참나무와 진달래가 뒤섞여 밀림을 이루고 있었다. 새싹과 꽃을 틔우기 전의 은빛 수피는 생명력으로 팽팽하게 부풀어 있었다.
한국의 산티아고 순례길…천년불심 길
선암사와 송광사를 잇는 6㎞가량의 숲길이 있다. 조계산을 동서로 길게 가르는 길로, 천년불심 길이라 불린다. 선암사에서 출발하면 피톤치드 향이 그윽한 편백 숲과 큰굴목재를 지나고 계곡을 건넌다. 큰굴목재 부근에서 길은 가파르게 솟구쳤다가 급하게 내리뻗는다.
계곡 저편 송광굴목재에 닿을 즈음이면 나그네의 숨은 다시 가빠진다. 길은 하늘과 맞닿은 듯 위쪽으로 뻗어 끝이 보이지 않는다. 불가에서 시작해 불가에서 끝나는 이 길에서 자신과 싸우며 비탈을 오르내리다 보면 길손은 어느새 자신의 참모습을 찾아 떠도는 순례자가 된다. 면면히 중생을 진리의 세계로 인도해온 두 고찰을 잇는 이 길은 한국의 산티아고 길인 셈이다.
길 중간에 있는 보리밥집 두 곳은 등산객과 순례자들에게 큰 위안거리이다. 보리밥을 맛보기 위해 조계산을 찾는다는 너스레가 억지스럽지 않다.
넓은 마당에 펼쳐진 평상에 아무렇게나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며 입 안에 도는 보리 알갱이를 느낄 즈음이면 슬그머니 안식이 찾아온다.
※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3년 5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ksh@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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