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른하늘에 날벼락 ‘왕릉의 저주’[이기환의 Hi-story](82)
“날씨 비 온 뒤 맑음. 금관을 들어 올릴 때 청명하던 하늘이 갑자기 컴컴해지더니 뇌성벽력과 함께 폭우가 퍼붓기 시작했다. 모두 급변한 천기에 무섭고 놀라서 경건한 마음가짐으로 금관을 수습해….”
경북 경주 천마총 발굴단의 1973년 7월 27일자 ‘발굴일지’ 내용입니다. 천마총 발굴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단골로 거론되는 후일담이죠. 이 이야기는 시간이 흐를수록 각색됩니다. 당시 조사원과 인부들이 갑작스러운 일기변화에 놀라 혼비백산, 옮기던 상자를 그 자리에 내려놓고는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현장사무실로 뛰었다는 겁니다.
아무렴 발굴작업을 펼치던 이들이 금관 상자를 팽개치고 몸을 피하기야 했겠습니까. 뭐 그 정도는 아니었겠지만, 일단은 놀란 가슴 진정시킨 뒤 ‘경건한 마음으로’ 작업을 마무리했다는 얘기였겠죠.
그런데 금관 상자를 무덤 밖으로 옮기자 암흑천지였던 하늘이 구름 한 점 없이 개었다는 겁니다.
이전부터 조짐은 있었답니다. 그해(1973) 여름 경주 지역에 30도가 넘는 폭염과 함께 가뭄이 심했거든요.
그래서 현지에서 “왕릉을 파서 지하의 신라 임금들이 노했기 때문”이라는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었답니다.
왕릉 파내자 갑자기 뇌성벽력이… 이와 같은 일화는 2년 전인 1971년 7월 5일 우연히 모습을 드러낸 백제 무령왕릉 발굴 때에도 있었습니다.
7월 7일 오후 전돌로 완전히 밀봉된 왕릉의 입구에 진입하기 위해 구덩이를 파고 있었는데요.
바로 그때부터 천둥 번개를 동반한 억수 같은 소나기가 퍼붓기 시작했답니다. 파놓은 구덩이에는 빗물이 사정없이 고이기 시작했고요. 만약 그 물이 불어 무덤 안으로 역류하는 날이면 끝장이었죠.
발굴단은 비를 흠뻑 맞은 채 쏟아지는 빗물을 밖으로 흘려 내보내야 했답니다.
밤 11시가 넘어서야 급조된 배수구가 제 몫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다음날(7월 8일) 오후 아치형 무덤 입구의 전돌을 한장 한장 들어내자 기괴한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쏴아아~” 하면서 에어컨을 틀었을 때 뿜어지는 하얀 수증기가 빠져나온 겁니다.
1500년 묵은 무덤 안 공기가 바깥의 따뜻한 공기와 만나면서 일어나는 일순의 결로현상이었습니다.
하지만 발굴 경험이 부족했던 당시에는 모든 순간이 새로운 상황이었습니다.
발굴 현장은 수많은 언론과 주민들에게 공개되고 있었는데요. 전날 무덤 입구가 드러나자 내리기 시작한 억수 같은 소나기와 전돌을 들어내자 내뿜은 하얀 수증기 등이 ‘참새’들의 입방앗거리가 됐습니다.
멋대로 왕릉을 파서 저주를 받았다는 소문이 퍼졌고요. 또한 왕릉의 문을 열자 오색의 무지개가 섰다느니, 바깥 공기 때문에 안에 있던 모든 유물이 일시에 썩었다느니 하는 이야기가 난무했습니다.
이후 발굴과 관련된 인물들에게 좋지 않은 일이 생기면 왕릉 발굴과 연결짓게 됐습니다.
당시 김원룡 발굴단장은 공교롭게도 빚에 몰려 집을 처분했고요. 남의 차를 빌려 타고 무령왕릉에 가다가 아이를 친 일도 있었답니다. 무령왕의 ‘무’ 자만 나와도 가슴이 떨렸던 김원룡은 늘 연구실 책상머리에 유서를 붙이고 다녔다는 후문입니다.
“왕릉을 파면 저주가 생긴다 쓸데없는 미신인 것 같죠. 그러나 <삼국유사> ‘가락국기’ 등에도 이와 비슷한 ‘저주’가 기록돼 있습니다.
신라 말년에 영규라는 자가 옛 금관가야국의 사당을 빼앗아 제사를 지내다가 사당의 대들보가 부러져 깔려죽었고요.
그후 영규의 아들이 옛 금관가야 국왕의 후손이 차려놓은 제물을 치우고 자기 가문의 제사를 지내다가 병에 걸려 죽었답니다. 또 도적 떼가 사당 안의 귀중품을 훔치려 하자 갑옷 차림의 용사가 나타나 화살로 7~8명을 맞혀 죽였답니다.
얼마 후 도적 몇몇이 다시 사당에 침입했는데요. 이번에는 30여 척(약 9m)이나 되는 구렁이가 도적들을 물어 죽였답니다.
<삼국유사>는 이를 두고 “왕과 왕족의 무덤에는 반드시 신물(神物)이 보호한다”고 전했습니다. <삼국유사>가 ‘왕릉의 저주’를 언급한 겁니다. 이런 역사기록이 있으니 후대의 발굴자들도 두려워했던 겁니다.
중국판 시험 발굴 우리 역사에서만 보이는 것은 아닙니다.
중국 베이징(北京) 북쪽 약 40㎞ 지점의 톈수산(天壽山) 아래에 ‘명십삼릉’이 조성돼 있는데요.
규모가 가장 큰 영락제(재위 1402~ 1424)의 장릉을 중심으로 12명의 명황제릉이 둘러싸고 있죠.
1955년 10월 당시 베이징 부시장인 우한(오함·吳?·1909~1969)이 중국 중앙정부에 ‘장릉의 발굴’을 제안합니다.
반대에 부딪혔습니다. “아직 그렇게 규모가 큰 장릉을 발굴할 기술을 갖추지 못했다”는 이유였습니다.
설왕설래 끝에 13대 황제인 만력제(재위 1572~1620)와 두 황후(효단현황후·효정황태후)의 정릉을 시험 발굴해본다는 결정을 내립니다. 이 대목에서 천마총 발굴이 떠오르죠.
원래 우리 문화재 당국도 경주에서 가장 규모가 큰 98호분(황남대총 남북분)을 발굴하려 했거든요. 그러나 아직 발굴역량이 부족하다 해서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155호분(천마총)을 조사하게 된 겁니다.
발굴 강행론자의 최후 아무튼 우여곡절 끝에 1956년부터 정릉의 발굴을 시작했는데요.
공교롭게도 천마총 발굴 때와 같은 기이한 사건이 17년 전 중국 정릉 조사 때도 일어났습니다.
발굴 시작부터 무서운 비가 내렸고요. 명루의 돌짐승과 인부 한 사람이 차례로 벼락에 맞아 떨어지거나 죽었답니다.
실성한 노파가 발굴현장에 찾아와 “제발 부탁이니 날 용서해요. 더 이상 사람을 해치지 않을게요”라고 해괴한 소리를 지르고 다녔다고 하고요. 이것은 새발의 피입니다.
반대를 무릅쓰고 발굴을 강행한 우한 베이징시 부시장의 불행은 ‘왕릉의 저주’ 완결판입니다.
우한은 당시 마오쩌둥(毛澤東·1893 ~1976)의 비호 아래 승승장구하고 있었습니다.
즉 1959년 마오쩌둥은 우한에게 ‘해서(海瑞)’라는 인물의 선양작업을 맡겼습니다. ‘해서(1514~1587)’는 명나라 때 ‘해청천(海靑天)’으로 일컬어질 만큼 청렴하고 대쪽같은 성격으로 황제의 실정을 질타한 인물입니다.
마오쩌둥은 “해서는 황제를 비판했지만 충심으로 절개를 지켰다”면서 치켜세웠습니다. 마오쩌둥의 지시를 받은 우한은 황제 앞에서 자신의 주장을 과감하게 펼친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한 해서를 추앙하는 글을 발표했습니다.
이 글은 이듬해 <해서파관>(海瑞罷官·해서가 관직에서 물러나다)이라는 이름의 희극으로 공연됐는데요.
공연은 마오쩌둥의 극찬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우한은 곧 나락으로 떨어집니다. 1965년 마오쩌둥의 부인인 장칭(江靑·1914~1991) 등 4인방이 “우한의 <해서파관>은 독초(毒草)이며 깨끗하게 청소돼야 한다”고 포문을 열었습니다.
이른바 ‘문화대혁명’의 서곡을 울린 겁니다. 4인방은 “<해서파관>은 (현대 중국의 황제인) 마오 주석을 겨냥한 것”이라고 올가미를 씌웠습니다. 결국 우한은 1969년 홍위병들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맞았는데요. 마오쩌둥의 비호를 받아가며 기세 좋게 작업한 ‘해서 선양작업’이 도리어 자신의 목을 옥죄는 올가미가 된 겁니다.
‘반동분자’ 죄명으로 불에 탄 황제 그랬습니다. 1956년 당시 기세가 넘쳤던 우한의 강력한 주장으로 강행된 정릉 발굴은 1959년까지 이어졌습니다.
출토 유물 3000여 점을 바탕으로 박물관이 건립됐습니다. 그러나 역시 역부족이었습니다.
당초 우려대로 부족한 기술 때문에 많은 유물이 제대로 보존되지 못했습니다.
결국 문화재 당국이 황릉 발굴을 중단할 것을 국무원에 요청했고요. 당시 저우언라이(周恩來·1898~1976) 국무원 총리가 이를 승인했습니다. 정릉 발굴의 비극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문화대혁명이 발발하자 정릉은 파국을 맞았습니다. 홍위병들은 <마오쩌둥 어록>을 흔들며 광란의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1966년 8월 24일이었습니다. 정릉으로 달려간 홍위병들은 발굴 유물을 마구 훼손·소각합니다.
홍위병들은 만력제를 봉건제의 원흉으로 지목했습니다. 그들은 만력제와 두 황후의 시신을 정릉 박물관 앞에 끌어내고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집권파를 타도하라!”,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을 끝까지 추진하자!”
그들은 시신 3구를 향해 일제히 돌멩이를 던졌습니다. 시신은 만신창이가 됐는데요.
급기야 홍위병 지도자의 마지막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저들(만력제와 두 황후)을 화형시켜라.”
박물관 앞 광장은 곧 불바다가 됐습니다. 만력제와 두 황후의 시신은 그렇게 사라졌습니다.
이렇게 정릉 발굴은 중국 고고학사의 큰 비극으로 끝났습니다.
역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우한은 정릉 발굴을 반대했던 동료들에게 정릉 발굴을 후회했답니다.
“이보게, 자네들 말이 맞았어. 자네가 나보다 훨씬 멀리 내다본 것 같아.”
천마총이나 무령왕릉은 새발의 피죠. ‘우한과 만력제’처럼 뼈저린 ‘왕릉 발굴의 저주’는 없을 것 같습니다.
파라오의 저주는 사실인가 ‘왕릉의 저주’와 관련해서 단골로 거론되는 사례가 있죠.
1922년 11월 발굴된 고대 이집트의 소년왕인 ‘투탕카멘(Tutankhamun)’ 무덤입니다.
왕릉이 발굴되자 심상찮은 소문이 돌았죠. 관 뚜껑에 ‘파라오(왕)의 잠을 깨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는 겁니다. 열 살 무렵(기원전 1361) 즉위한 뒤 열아홉 살에 석연치 않은 이유로 요절한 소년왕의 ‘저주’라는 것이죠.
5개월 만인 1923년 4월 무덤 발굴을 후원한 영국의 조지 허버트 경(1866~1923)에게 화가 생겼습니다.
면도를 하다가 모기에게 물려 부풀어 오른 부위를 잘못 건드리는 바람에 상처가 덧난 겁니다. 허버트는 패혈증으로 사망했습니다. 일설에는 투탕카멘 미라의 얼굴에 난 상처와 똑같은 부위였다는 말도 있습니다.
이후 심상치 않은 이야기가 확대 생산됐습니다. 허버트를 돌보던 간호사와 조카 그리고 부인도 줄줄이 사망했다는 이야기도 나왔습니다. 미국 철도계의 거물 조지 굴드(1864~1923)는 거액을 지불한 대가로 투탕카멘의 관을 직접 만진 뒤 폐렴으로 죽었다고 하고요. 발굴책임자인 하워드 카터(1874~1939)도 기막힌 경험을 했다는 뉴스 또한 보도됐습니다.
어느 날 카터가 애지중지하던 새(카나리아)가 코브라에게 잡아먹히는 끔찍한 일을 당했다는 겁니다.
이집트에서 코브라는 파라오를 상징하는 동물입니다. 투탕카멘에서 출토된 황금마스크에도 코브라가 디자인돼 있었습니다. 그러니 투탕카멘의 저주라는 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었죠.
1500명 중 사망 21명 그런데 이 모든 이야기는 대부분 팩트가 아닙니다. 허버트의 사망 후 ‘카더라’ 통신으로 양산된 가짜뉴스가 많습니다.
따지고 보면 투탕카멘 발굴에 참여한 1500여명 중 10년 동안 사망한 이가 21명에 ‘불과’합니다.
그냥 자연사나 병사하는 경우를 상정하면 그렇게 유의미한 통계가 아닙니다.
발굴을 지휘한 카터는 이후 17년 동안 건강하게 지내다 1939년 예순네 살의 나이에 사망했거든요.
투탕카멘의 첫 발견자는 당시 열두 살 소년인 후세인 압델 라술(1910~2003)인데요. 물항아리를 나르던 소년은 항아리가 넘어지지 않게 땅을 약간 파내려다가 무덤길의 제일 위 계단을 발견해냈거든요. 이 소년은 만 아흔세 살까지 천수를 누렸답니다.
‘왕릉의 저주’ 관련 이야기를 더듬어볼 때마다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수백, 수천년 잠자고 있던 무덤 주인공을 공연히 흔들어 깨워놓고 저주가 어떠니 저떠니 하면서 호들갑을 떠는 꼴이라니….
건드려 놓는 정도는 그래도 그나마 용서가 될 텐데, 문화대혁명의 광란 속에 불타버린 명나라 황제와 황후 2명은 그 무슨 혹독한 부관참시란 말입니까.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kh074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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