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이면 늦으리[편집실에서]
2010년쯤이었습니다. 미국에 갈 일이 생겼습니다. 일정을 마치고 모처럼 여유가 났습니다. 편한 차림으로 뉴욕 시내를 활보했습니다.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하이라인 파크’까지 둘러보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어느덧 땅거미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뉴요커’로 보이는 한 남성이 말을 걸어왔습니다. “어디서 왔나요?” 한국을 소재로 다양한 얘기를 주고받았습니다. 그는 “뉴욕에 왔으면 꼭 가봐야 할 곳이 있다”면서 길을 안내했습니다. 성인 영상물 전용 매장이었습니다. 낯선 이방인한테 말을 걸고 시간까지 할애하는 친절함이 고마워 따라가긴 했지만 원하던 목적지는 아니었습니다.
최근 넷플릭스가 신동엽·성시경 등을 앞세워 일본 AV(성인 비디오) 시장을 탐방하고 AV 배우들을 인터뷰한 예능 프로그램을 공개했습니다. 방송을 보진 못했지만, ‘갑론을박’이 한창인 모양입니다. 일각에선 성 착취 논란, 무분별한 19금 콘텐츠의 범람 우려 등을 이유로 맹렬히 비판합니다. 표현의 자유가 우선이라며 옹호하는 쪽도 있습니다. 제작진은 최근 기자간담회에서 “세상 모든 일에 빛이 있으면 그림자도 있다”며 정면돌파를 시도했습니다. 명암(明暗)이 있게 마련인 해외여행 콘텐츠를 명만 다뤘다고 시청자들이 대놓고 비판만 하느냐는 취지의 역질문을 던지며 반박에 나서기도 했지요. 그러면서 일본 AV 산업의 크기가 1조원 규모의 편의점 시장과 맞먹는다고 주장했습니다.
문득 10여년 전 뉴욕 거리의 그 매장이 떠올랐습니다. 바글바글 모여 있는 손님들을 보며 가졌던 의문이 있었습니다. ‘수요를 차단할 것인가, 공급 자체를 막을 것인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양한 플랫폼을 타고 각종 영상 콘텐츠가 쏟아지는 세상이 됐습니다. 기존 문법으로는 생각도 할 수 없는 수위의 발언과 행위 묘사를 담은 자극적 콘텐츠들이 맞춤형 알고리즘을 타고 저마다의 스마트폰을 파고듭니다. ‘부캐’도 모자라 ‘N캐’를 넘나들며 연기자들도 활동반경을 공격적으로 넓혀가고 있습니다. 업계 관련자들의 선의에 기대 프로그램의 선정성을 막을 수 있을까요. 회의적입니다. 법을 들이대고 비판의 강도를 높인다고 시청자들의 유입을 원천 봉쇄할 수는 있을까요. 주목도만 더 높아지겠지요. 지금처럼 웅성웅성 일회성 논란에 그쳐서도 내성만 키울 뿐 관련 산업의 팽창이라는 도도한 흐름을 되돌리긴 어렵습니다.
이번 논란을 계기로 일본은 어쩌다 ‘야동(야한 동영상) 천국’이 됐는지, 실태는 어떤지, 왜 열광하는지, 부작용은 무엇인지, 뭘 반면교사로 삼을 건지, 국내 확산은 어떻게 막을 건지 지금이라도 면밀히 들여다보고 제대로 대비해야 합니다. ‘편의점 종주국’ 일본을 넘어선 한국의 저력이 AV 산업에서만큼은 예외일 거라고 장담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때 가서 호들갑을 떨어봐야 이미 늦습니다.
권재현 편집장 jaynew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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