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읽기] 호퍼의 그림에 끌리는 이유

관리자 2023. 5. 10. 0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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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전하다가 사거리 횡단보도 앞에서 멈추게 되면, 나는 우르르 건너가는 사람들을 무심코 쳐다보곤 한다.

호퍼(1882∼1967년)는 무표정한 사람을 자주 등장시키는 미국 화가다.

다양한 감정이 호퍼의 그림 속에서 펼쳐지는데, 감정의 뉘앙스를 조절하는 것은 인물의 표정이 아니라 주위에 스며드는 빛이다.

"고독이 어떤 것인지 당신은 너무나 잘 아는군요." 어떤 사람이 호퍼에게 이렇게 말하자 호퍼는 "내 의도보다 훨씬 고독하게 봅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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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호퍼, ‘이층에 내리는 햇빛’, 1960년, 뉴욕 휘트니미술관 Josephine Hopper/ SACK, Seoul. 이미지 제공=서울시립미술관

운전하다가 사거리 횡단보도 앞에서 멈추게 되면, 나는 우르르 건너가는 사람들을 무심코 쳐다보곤 한다. 미소진 얼굴에 명랑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침울한 표정에 어두워 보이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저 건너에 있던 사람들이 내 차 바로 앞을 지나갈 때면 가까이에서 얼굴을 보게 되는데, 비로소 내가 포착한 인상에 오류가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행인 대부분은 무표정이다. 그런데 내가 곧바로 감정까지 알아차렸다니 희한하지 않은가.

심리학자이자 신경과학자인 리사 펠드먼 배럿은 저서 <감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에서 감정이란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기쁘거나 슬픈 일이 생겨서 그 반응으로 기쁨과 슬픔이 자연스럽게 촉발되는 것이 아니라 내 몸이 처한 여러 상황이 어떤 분위기를 조장하고, 그게 응집해 특정 감정이 구성된다는 것이다. 나 역시 낯선 행인들에게 내가 만든 감정을 투사시켰는지도 모른다. 매사 활기 넘치던 젊은 시절의 내 모습과 중년이 돼 쉽사리 재미를 찾기 어려운 지금의 내 모습을 혹시 행인들에게서 본 것은 아닐까.

‘에드워드 호퍼, 길 위에서’ 전시가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에서 8월20일까지 열린다. 호퍼(1882∼1967년)는 무표정한 사람을 자주 등장시키는 미국 화가다. 다양한 감정이 호퍼의 그림 속에서 펼쳐지는데, 감정의 뉘앙스를 조절하는 것은 인물의 표정이 아니라 주위에 스며드는 빛이다. 동틀 무렵을 그린 그림에는 막연한 두려움이 엿보인다. 무언가 격렬하게 시작해야 하는 순간에 심리적으로 위축되는 느낌이라고 할까. 새벽에 비하면 아침의 빛은 막 샤워를 하고 난 것처럼 상쾌하다. 해가 늘어져 건물 안으로 스멀스멀 들어오는 늦은 오후의 나른한 느낌도, 어둠이 내리기 직전 붉은 석양 아래서 한껏 충만해지는 감수성도 그의 그림에 담겨 있다.

‘이층에 내리는 햇빛’은 빛과 그림자의 대조가 뚜렷하고 윤곽선이 선명하며 햇빛의 각도가 머리 위에 있는 걸로 볼 때, 정오 무렵 같다. 이층집 발코니에서 한 여자는 독서를 하다가 먼 곳을 응시하고, 또 한 여자는 난간에 걸터앉아 시선을 전방으로 향하고 있다. 둘은 발코니라는 공간을 공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서 각각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긴다. 평화롭고 만족스러운 어느 한낮이다.

“고독이 어떤 것인지 당신은 너무나 잘 아는군요.” 어떤 사람이 호퍼에게 이렇게 말하자 호퍼는 “내 의도보다 훨씬 고독하게 봅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호퍼의 그림 속 주인공들은 무표정이고 감정을 드러내는 법이 좀체 없다. 고독한 게 어떤 것인지 잘 아는 사람은 아마도 그림 앞에 서 있던 그 사람일 것이다.

이주은 건국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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