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 나만의 성, 슈필라움

박희준 2023. 5. 10. 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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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번성'했던 '광장'은 '폐허'다.

"삶이란 지극히 구체적인 공간 경험들의 앙상블. 공간이 문화이고, 공간이 기억이며, 공간이야말로 내 아이덴티티다" 어떻게 보면 코로나가 우리 일상을 바꾼 것 같지만, 사실은 우리 스스로가 바이러스를 이유로 각자의 '슈필라움'을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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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희준 편집부 차장

한때 ‘번성’했던 ‘광장’은 ‘폐허’다. 이제 사람들은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지만 어딘가에 마련된 메타버스에 손쉽게 탑승하고, 세상 모든 지성을 다 모아놓은 AI와 소통하는 것이 일상이 된 세상. 오랜 관습을 벗기란 쉬운 것이 아닌데, 사람들은 어느새 또 다른 세상에서 잘도 살아간다.

포스트 코로나(Post Corona)라는 이름으로 재정립된 사회는 기존의 공간을 재해석해 놓았다. 갇혀있던 일상을 뒤로하고 무조건 바깥으로 내달리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점점 더 자신만의 세계로 침잠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안과 밖을 구분하지 않고 ‘자기만족’의 실현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것이다.

슈필라움(Spielraum). 독일에서만 쓰인다는 이 단어는 ‘공간’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슈필라움은 ‘놀이(Spiel)’와 ‘공간(Raum)’의 합성어로, 타인에게 방해받지 않고 휴식을 취하고 여유를 가질 수 있는 나만의 공간이자 물리적인 공간을 넘어 심리적 여유까지 포함하는 단어다.

문화심리학자이자 화가, 작가이기도 한 김정운 씨는 ‘공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삶이란 지극히 구체적인 공간 경험들의 앙상블. 공간이 문화이고, 공간이 기억이며, 공간이야말로 내 아이덴티티다” 어떻게 보면 코로나가 우리 일상을 바꾼 것 같지만, 사실은 우리 스스로가 바이러스를 이유로 각자의 ‘슈필라움’을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마스크를 벗고 ‘비대면’에서 다시 ‘대면’으로 전환되었음에도 아직 ‘데면데면’한 우리 사회는 언제쯤 맘 편한 ‘슈필라움’을 되찾을 수 있을까. 발길 닿는 모든 곳이 ‘슈필라움’이라면, 지금 내가 일하는 사무실이 ‘슈필라움’이라면 좋겠지만, 불가능한 이야기일 것이다. 내게 주어진 공간, 내가 만든 공간, 내가 갈 수밖에 없는 공간. 나를 둘러싼 공간은 내가 존재하는 한 계속 존재할 것이다.

베스트셀러 작가를 꿈꾸는 나의 ‘슈필라움’은 단연 집의 유일한 휴식처인 작은 방, 책방이다. 손이 잘 닿는 곳에 가장 아끼는 책이 있고, 가장 먼 곳엔 읽었지만 또 읽히기를 기다리는 책들이 있는 곳. 책상 위 작은 스탠드에 불이 들어오면, 나만의 세계로 천천히 가라앉게 된다. 무엇보다 나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새로운 가능성을 꿈꿀 수 있기에 나는 나의 ‘슈필라움’에 자주 드나든다.

당신의 ‘슈필라움’은 어디인가. 자동차 운전석일 수도 있고, 늦은 밤 아무도 없는 농구코트일 수도 있겠다. 우리는 서로를 목말라 하지만 부유하는 시선과 넘치는 관심에 피로한 날이 더 많다. 나에게만 열려있는, 타인은 입장할 수 없는 나만의 성, 슈필라움. 나는 오늘도 방문을 열 것이다. 기꺼이 나의 ‘폐허’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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