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미래 강원 노포 탐방] 46. 춘천 잭슨빌

김진형 2023. 5. 10. 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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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고 산 추억을 툭 찔러, 감성을 돌려주는 곳
1987년 캠프페이지 근처
‘파킹’이라는 LP바로 출발
40년 가까운 역사 잇는 곳
미군클럽 DJ출신 주인 덕
가게 손님 발길 끊이지 않아
당시 LP 3000장으로 시작
현재 1만장으로 늘어나
함께 늙어가는 단골손님도
20대 젊은이들도 찾는 곳
▲ 40년 넘게 함께 해오며 꿈이자 현실인 LP bar를 운영하고 있는 오세윤·원복순 부부.

캠프페이지. 한국전쟁 당시 춘천에 만들어진 주한미군 주둔지. 한국전쟁 중 1950년 함경남도 장진저수지 전투에서 공을 세운 존 업셔 데니스 페이지 대령의 이름을 따왔다. 고엽제 문제가 국내에 불거지며 캠프페이지에서도 고엽제 사용 가능성을 시사하는 근거들이 발견돼 논란이 되기도 했다. 이런 논란들 외에도 춘천시 한 가운데 위치한 캠프페이지는 환경오염, 소음, 교통불편 등 각종 문제들이 있었다. 지난 2005년 한국에 반환돼 2013년 시민들에게 개방됐다. 그간 도청사 부지로 거론돼 왔으나 최근 춘천 고은리가 최종 선정되면서 아직도 활용방안 수립이 요원한 상태다.

좋고, 나쁨의 판단 이전에 캠프페이지로 인한 경제·문화적 영향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이 춘천의 역사다. 잭슨빌 역시 그 중 하나다. 오세윤(64)·원복순(66) 부부는 1980년 시청 인근에서 음악다실에서 시작해 1987년 캠프페이지 인근 파킹이라는 ‘LP bar’를 거쳐 2005년 명동 닭갈비골목에 위치한 현 잭슨빌을 인수했다. 이 40년 가까운 역사를 잇는 큰 줄기가 바로 LP와 함께한 음악이다.

‘지지직’ 장작이 타는 듯한, 얼핏 빗소리와도 같은 소리를 바라보게 되는 잭슨빌을 찾았다. 레코드 위를 따라 움직이는 바늘로 음악을 감상하는 곳이라니.

우리가 현재 LP라고 하는 이 비닐 형태 레코드는 195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까지 한국 음악시장에서 음악다방과 LP bar를 만들어내며 성행했다. 이후 카세트테이프, CD, MP3 등으로 음악을 기록하고, 듣는 방식이 변화하다가 최근 들어 LP음반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엘피 바(LP bar)를 운영하게 된 계기는 세윤 씨의 몫이 크다. 춘천이 고향인 그는 18살에 서울 이태원에 갔다가 미군클럽에서 DJ를 시작했다. 2년 정도 일하다 입대를 위해 춘천으로 돌아왔다. 15살에는 캠프페이지 덕(?)에 AFKN 방송을 들을 수 있었던 그는 매주 토요일 오전 8시부터 12시까지 수업 대신 팝송을 들었다. 라디오로 가장 처음 들었던 곡이 미국 록 밴드 이글스의 Lyin’ Eyes 였다. 그는 이 노래를 듣고, 이전부터 치고 있던 ‘기타를 내려놓았다’고 했다. “아니, 어떻게 저렇게 치겠나 싶더라. 그만큼 신선했고, 기타 연주가 좋았다.”

▲ 복순씨, 세윤씨(사진왼쪽부터)가 가게에서 손님 생일파티를 해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제대 후 시청 앞 음악다실에서 업을 이어갔다. 그는 음악을 고르고, 신청곡을 틀어주는 DJ 일이 좋았다. 그러다 복순 씨를 만나 1985년 첫 애를 낳았다. 아이가 생기니 생계를 위해 가게를 차렸다. 당시 DJ로 일하던 세븐클럽 사장과 가족들의 도움으로 현재 진아하우스자리에 10평짜리 LP bar ‘파킹’을 차렸다. DJ를 하며 모은 3000장의 LP와 세윤 씨의 음악지식, 복순 씨의 생활력을 바탕으로 장사를 했다.

미군들을 대상으로 그들이 좋아하는 팝을 틀었다. 고향이 그리운 미군들은 세윤 씨의 선곡으로 자기 동네에 와 있는 기분이 든다며 날마다 ‘미스터 오’를 찾았다. 가게 이름보다 ‘오스 플레이스(오’s place)’라고 더 많이 불렸다.

“전쟁 때문에 베트남에 간 한국인들이 ‘눈물젖은 두만강’을 들은 느낌인 거지. 얼마나 감동적이었겠어요.”

음악에 조예가 깊은 세윤 씨 덕에 가게를 찾는 손님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다. 파킹은 캠프페이지 인근 유일했던 LP bar로 다른 클럽들과 달리 많은 LP를 보유하고 있었고, 무엇보다 신청곡을 들을 수 있었다.

세윤 씨에게 팝송 말고, 한국 가요 추천을 부탁하자 김현식의 ‘사랑했어요’를 틀어줬다. 그러면서 그와 관련된 기억을 떠올렸다.

“아는 형이 데리고 왔었는데, 누군지 몰랐다. 그저 손님으로 대하고 보냈는데 어느날 방송에서 노래를 엄청 잘하는 사람이 나와서 눈 여겨 봤더니 아는 형이 데려온 그 사람이더라. 그게 현식이 형이었다.”

파킹은 주로 미국인 손님이 많아서 국내 대중가수들을 알아보는 사람이 없고, 편하게 음악과 술을 즐길 수 있어 많이들 찾아왔다고 한다. 해바라기의 이광준, 신촌블루스의 엄인호 등 지금도 이름을 대면 알 만한 가수들이 그의 단골이다.

복순 씨가 보여준 파킹 운영당시 사진에서 미군들과 인간적 교류를 나눈 모습들을 볼 수 있었다. 아직도 이름을 기억하는 미군 장교 데이빗은 명절이 되면 집으로 초대해 명절음식을 나눠 먹기도 하며 친하게 지냈다. 세월이 흘러 모두의 이름이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사진을 보면 새록새록 추억이 떠오른다. 복순 씨는 이들을 생일을 챙겨준 친구, 미국으로 갔다가 제대 후 다시 한국을 방문해 가게를 찾아온 친구 등 손님이라기보다 함께한 추억이 가득한, 한동안 못 본 친구로 기억하고 있다. 그런 추억들 덕에 가게를 운영해 온, 어쩌면 힘들었을 그 세월들을 “참 재밌었다”고 기억한다.

▲ 미군 장교였던 데이빗과는 명절에 집에 초대해 함께 할 정도로 가깝게 지냈다.

물론 한국인 손님들도 많았다. 음악을 좋아하는 20대 시절부터 파킹을 찾아 50대 후반이 된 지금, 계속해서 잭슨빌을 방문하며 함께 늙어가는 단골도 있다. 세월을 함께하는 손님은 노포의 가장 큰 매력이다.

20대 젊은이들도 가끔 찾는다. 안주도 없이 술 한잔, 노래 한곡에 시름은 사라진다. 잭슨빌의 오래된 보스 스피커에서 음악이 흐르면 청춘 또한 재생된다. 아날로그 감성을 잘 살리는 나무통으로 된 80년식 보스 901 스피커는 LP와 더불어 잭슨빌의 자랑이다.

세윤 씨는 LP를 고집하는 이유에 대해 현장에서 듣는 듯한 따뜻한 느낌 때문이라고 말했다. “디지털 음원이 담아내지 못하는 음색을 구현한다. 작은 바늘을 LP 위에 올려놓으면 스피커로 음악이 증폭되고, 다시 LP가 쿵쿵댄다. 귀에 전혀 부담이 없는 자연스러운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세윤씨 삶에서 LP의 의미를 묻자 “오래된 취미이자, 여전히 놓지 못하는 내 장난감”이라고 했다. 그런 세윤 씨와 40년 넘게 함께 해오고 있는 복순 씨는 LP에 대해 “그에게는 꿈, 나에게는 현실”이라고 했다. 이 짧은 답에 함께 웃음이 터졌다. 그 시절 여성들의 마음이 비릿하게 느껴졌달까.

3000장으로 시작한 LP는 현재 1만장으로 늘었다. 손때 묻은 LP들에 세윤 씨의 고집스런 음악을 향한 애정과 그 길에 두 자녀를 기르며 현실을 살아내 온 복순 씨의 노고가 고스란히 앉아 있다. 김진형·유승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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