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마고지 영웅의 마지막 길, 룩셈부르크에 울려퍼진 아리랑

정석우 기자 2023. 5. 10. 0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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룩셈부르크 참전용사 호펠스씨
“장례 때 아리랑 불러달라” 유언

8일(현지 시각) 오후 룩셈부르크 남동부 레미히의 한 성당에서 열린 장례식 미사 도중 ‘아리랑’이 울려퍼졌다. 지난달 24일 별세한 룩셈부르크의 6·25 참전 용사 질베르 호펠스(90)씨를 위해서다. “장례식 때 꼭 아리랑을 불러 달라”는 유언장을 그의 조카 파스칼 호펠스(62)씨가 서재에서 발견, 현지 한인회에 연락했다.

고인은 19세이던 1952년 6·25에 참전했다. 최대 격전지였던 백마고지 등에서 활약했다. 불과 10m 거리에 포탄이 떨어지는 생사의 고비를 수차례 넘겼다.

6·25 당시 인구가 약 20만명이던 룩셈부르크는 연인원 100명을 파병했다. 참전 22국 가운데 인구 대비 가장 많은 전투병 파병으로 기록돼 있다. 이 중 15명이 전사하거나 다쳤다. 이제 남은 생존자는 2명뿐이다.

지난달 24일 90세로 별세한 룩셈부르크인 질베르 호펠스씨가 1952년 19세로 6·25전쟁에 참전한 당시 모습. /룩셈부르크 전쟁박물관

‘장례식에서 아리랑을 불러 달라’고 당부한 룩셈부르크의 6·25 참전 용사 호펠스씨는 한국이 어떤 나라인지조차 몰랐고, 부모도 참전에 반대했지만, ‘침략당한 나라의 자유를 되찾는 데 기여하겠다’며 자원했다.

“아이랑, 아이랑, 아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감다.”

호펠스씨는 생전 ‘아리랑’을 유독 좋아해 서투른 한국말로 따라 부르곤 했다. 그에게 아리랑은 애락이 담긴 노래였다. 자녀가 없었고 수년 전 아내도 먼저 떠났다. 작년 11월 그의 생일 파티에서도 ‘아리랑’이 연주됐다. 8일 열린 장례식에서는 아리랑을 박미희 룩셈부르크 한인회장이 노래 부르고, 연주는 고인이 참전 후 재직한 현지 세관의 관악단이 맡았다.

지난 8일(현지 시각) 룩셈부르크 레미히의 한 성당에서 열린 장례식에 국가보훈처가 전달한 추모패가 놓여 있다. /연합뉴스

이날 장례식에 참석한 박성호 주벨기에 유럽연합 대사관 무관은 국가보훈처에서 제작한 추모패를 유가족들에게 전달했다. 조카 파스칼씨는 “지금으로 치면 우크라이나 전쟁에 참전했던 것과 비슷한 것”이라며 “삼촌이 정말 자랑스럽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그는 “한국인들이 참전 용사의 헌신을 잊지 않아 감사하다”고도 했다. 룩셈부르크도 독일에 점령됐다가 미국 등 우방국의 도움으로 해방된 역사가 있었다.

1951년 5월 자국군에 입대한 호펠스씨는 군 복무가 끝나갈 때쯤 한국전에 자원해 1952년 3월 부산에 도착했다. 이후 1953년 1월 룩셈부르크로 복귀할 때까지 벨기에와 통합대대 소속의 일등병 기관총 사수로 임무를 수행했다. 그는 치열했던 하루하루를 일기로 기록, 현재 룩셈부르크 전쟁박물관에 사료로 전시돼 있다.

지난달 24일 90세로 별세한 룩셈부르크의 6·25전쟁 참전 용사 질베르 호펠스씨의 생전 모습. /박미희 룩셈부르크 한인회장

호펠스씨는 참전 뒤 10여 차례 한국을 찾았다. 몇 년 전까지 룩셈부르크 참전용사협회장으로 활발히 활동했고 한국 역사에도 관심이 많았다. 그는 2019년 한국전쟁유업재단(KWLF)이 진행한 인터뷰에서 지난 1975년 첫 방한 당시 한국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오래된 기차역들이 아직 있었지만, 동시에 새로 지어진 역들도 많았다”면서 “우리의 희생이 헛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또 “일본은 위안부 문제에 대해 아직 사과하지 않았다. 한국에 사과해야 한다”면서 한국 역사에 대한 소신을 밝히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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